덕수궁 함녕전 기둥에 새겨진 낙서. 〈사진=이지현 기자〉 |
이 기둥 4면에는 연필로 쓴 낙서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6-2 OOO'라고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도 했고 욕설 표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교태전으로 향하는 문 옆쪽에는 오래 전 붙인 듯한 판박이 스티커가 남아있다. 〈사진=이지현 기자〉 |
경복궁 사정전 내 굴뚝에는 여러 언어로 새겨진 낙서가 벽돌 칸마다 있다. 〈사진=이지현 기자〉 |
최근 경복궁 담벼락 스프레이 낙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문화재 훼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낙서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 전부터 문화재들은 크고 작은 낙서에 패이고 멍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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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대궁 안 곳곳에 낙서…언어도 다양
━취재진은 22일 서울 덕수궁·경복궁·창경궁·창덕궁을 돌아봤습니다.
모든 궁궐 안에는 언제 새겼는지 모를 낙서들이 있었습니다.
덕수궁 내 담벼락에 새겨진 낙서. 〈사진=이지현 기자〉 |
정관헌 뒤쪽 벽돌에도 숫자, 이름 낙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덕수궁 관리소 관계자는 "요즘은 궁궐 안 곳곳에 관리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낙서는 꿈도 못 꾼다"면서 "아마 예전에 한 낙서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낙서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낙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궁궐 안 CCTV가 비추지 않는 곳이나 관리자가 배치되지 않은 곳들이었죠.
많은 관람객이 찾는 경복궁에서는 더 쉽게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궁 벽면에 펜이나 연필로 낙서를 새겨놓은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었고, 벽돌에 새긴 낙서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사정전 뒤쪽 굴뚝 벽돌에는 칸마다 낙서가 빼곡했습니다. 한글·영어·한자 등 언어도 다양했습니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상대적으로 낙서 개수가 적긴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연필 등으로 새긴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관람객이 많이 찾는 경복궁에서는 낙서를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이지현 기자〉 |
'장난으로, 신념 때문에'…문화재에 상처 입힌 사람들
━낙서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저 장난으로, 누군가는 잘못된 신념에 따라 문화재에 상처를 입혀왔죠.
2011년, 세계적인 암각화 유물이자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 이름을 새긴 혐의로 한 고등학생이 붙잡혔습니다.
붙잡힌 학생은 처음엔 "친구를 놀리려 장난삼아 했다"고 진술했는데, 이후 진술을 번복하고 혐의를 부인하면서 결국 불기소 처분됐습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가 대적광전 등 17개 주요 전각 벽의 낙서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
이 낙서는 40대 여성이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악령을 쫓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19년 부산 금정산성 망루와 비석 곳곳에서는 검은 매직펜으로 이름 등을 쓴 낙서가 발견됐는데요.
낙서를 한 건 70대 등산객. 그는 산을 오르다가 쓰러지면 가족이 쉽게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문화재에 낙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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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관광지에도 새겨진 한글…'어글리 코리안' 논란
━낙서 때문에 국제적인 망신을 산 일도 있습니다.
해외 문화유산이나 자연에 한글로 낙서를 해 논란이 된 건데요.
지난 2016년 태국 시밀란 국립공원 한 산호초에 '박영숙'이라고 적힌 한글 낙서가 발견됐습니다.
태국에서 발견된 한글 낙서. 〈사진=트위터/중앙 DB〉 |
만리장성에서 발견된 한글 낙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죠.
스위스 루체른 무제크 성벽 타워 난간에는 5명의 이름과 '2019.8.16'이라는 글자가 매직펜으로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진을 찍은 한국인 네티즌은 "부끄러운 줄 알라"며 지적했고,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거셌죠.
대표적인 '어글리 코리안(다른 나라에서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일부 비매너의 한국 관광객)'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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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낙서까지 단속 어려워"…"어렸을 때부터 교육해야"
━지난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방향 경복궁 서쪽 담벼락에 붉은색과 푸른색 스프레이로 낙서가 적혀있다. 〈사진=연합뉴스〉 |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 제82조의 3은 '누구든지 지정문화재에 글씨 또는 그림 등을 쓰거나 그리거나 새기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낙서를 한 사람에게 원상복구를 명령하거나, 복구 비용을 청구할 수도 있죠.
만약 낙서 등으로 인해 문화재가 손상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궁궐 내 낙서와 관련해 "이번 스프레이 낙서처럼 큰 낙서들은 바로 조치를 취하지만 현실적으로 궁궐 안 작은 낙서들까지는 일일이 단속하고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력이 되는 선에서 점검하고 복원을 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문화재청은 CCTV를 추가 설치해 이번 낙서 테러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 걸 막겠다는 방침입니다.
하지만 낙서를 애초에 하지 않도록 인식 개선도 필요합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우리나라 문화재들 중에서는 특히 궁궐 내 낙서가 심각한 편"이라면서 "해외에서도 낙서 때문에 논란이 된 한국인 사례도 많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낙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어렸을 때부터 문화재를 소중히 할 줄 알게끔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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