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 종합 대책·연구에 학계도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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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대책 관련 수많은 보고서가 있었지만, 정책 효과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한 것은 처음이다. 예산 당국을 움직이려면 정량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행 보고서가 반가운 이유다."(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홍석철 상임위원)
한국은행이 지난 3일 내놓은 경제전망보고서 '초저출산과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 원인·영향·대책' 중장기 심층연구에 대한 각계각층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첫 번째 반응은 그동안 저출산 영역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은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반응은 저출산 관련 주제별·부분적으로 진행된 기존 연구와 달리 종합적으로 각 대책에 대한 출산율 제고 효과를 구체적인 숫자로 보여줘 정책 당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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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효과 숫자로 제시한 첫 보고서= 지난해 기준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청년층 고용률(15~39세, 58%)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평균 수준(66.6%)으로 증가하면 출산율이 0.12명 올라 0.90명이 된다. 또 10.3주에 불과한 한국의 육아휴직 실이용기간을 OECD 평균 수준인 61.4주로 늘리면 출산율이 0.1명 높아져 출산율이 1.0명대로 반등할 수 있다. 산술적으로 여러 정책 중 한국의 도시인구집중과 혼외출산비중을 OECD 평균 수준에 맞추면 출산율은 각각 0.41명, 0.16명이나 급증해 효과가 크지만, 이 정책은 현실적으로 단기간 변화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은은 청년 고용률을 높이고 남성의 육아휴직 실이용기간을 늘리는 것이 현 시점에서 보다 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한은의 이번 연구는 2000명을 대상으로 경쟁압력이 희망자녀수에 미치는 영향 등을 국내 처음 확인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조사에서 경쟁압력 체감도가 높은 그룹의 평균 희망자녀수는 0.73명으로 체감도가 낮은 그룹의 평균 희망자녀수 0.87명보다 0.14명 적은 것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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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위원은 "한국의 육아휴직급여 소득대체율이 44.6%에 불과하고, 육아휴직 급여 월 상한액이 150만원으로 기존 소득의 절반도 보장받지 못하는데 남성이 육아휴직을 선택하기 쉽지 않다"면서 "스웨덴은 남성의 육아휴직을 90일 의무화하고 소득대체율도 70% 가까이 된다"고 전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육아휴직 사용률이 높은 국가는 육아 휴직 자동개시 등의 규정을 명시해 근로자의 신청만으로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
한종석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남성들의 육아휴직 비율이 현저히 낮은데 문화적인 차이도 있지만 결국 노동시장 전반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라며 "육아휴직을 쓰면 커리어 손상이 우려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승진·성과 측정 시스템을 개선하고 유연근로제를 적극 확대해 돌봄 참여를 늘리는 등 변화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남성 육아휴직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 4월부터 근로자 1000명이 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어길시 기업은 후생노동성의 행정지도를 받게 된다. 현재는 공개 의무 대상 기업을 300명 이상 기업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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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 한은 보고서 읽고 긴급 회의도= 한은 보고서는 정부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6일 저출산 문제를 전담하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함께 긴급 전문가 자문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보고서를 집필한 황인도 한은 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이 초청됐다. 최근 뉴욕타임스(NYT)가 '한국은 사라지고 있나' 칼럼을 통해 한국의 초저출산은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창궐보다 심하다고 진단하고, 향후 합계출산율 1.8명인 북한이 남침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은 터라 정책당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홍 위원은 "외신의 시각이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며 "이스라엘의 2021년 합계출산율이 3명으로 OECD 국가 중 최고인데 주변에 아랍 국가들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이유로 전쟁의 위협이 크다 보니 인구는 곧 안보와 국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이기일 복지부 제1차관은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같이 인구 위기를 극복할 범국민 협의체가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전문가 회의에서 나온 대안을 관련 부처와 협의해 정부 정책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한발 나아가 저출산위는 오는 19일 한은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저출산·고령화 연구에 대해 양 기관이 적극 협력키로 했다. 이번 MOU 체결은 저출산위가 한은에 적극 제안해 성사됐다. 특히 복지부는 내년 예산안에 민간위탁사업비 10억원을 신규 반영해 '인구정책평가센터'를 설치할 계획인데, 저출산위는 이 예산을 외부 연구기관에 위탁해 인구정책 평가 업무를 수행할 계획이다. 저출산위는 "최근 한은의 저출산 연구가 인상 깊었고, 한은이 일부라도 평가 기능을 담당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한은의 보고서는 OECD 국가 비교를 통해 정책 효과를 분석했는데 MOU 이후 양 기관의 협력을 강화해 후속 연구가 진행된다면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효과적인 정책을 발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 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저출산 보고서는 지난 5월 발표한 고령층 경제활동참가율 분석 보고서에 이은 두 번째 중장기 심층 기획연구"라면서 "총재가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한국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과 해법을 찾아보라고 제안·독려하면서 호흡이 긴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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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키우는 한은…이창용 효과= 업계에서는 최근 한은이 정부 정책에 목소리를 키우고 깊이 있는 보고서를 내는 데에는 지난해 4월 부임한 이창용 총재 효과라는 안팎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부임 직후 '달라진 한은'을 주문한 총재가 몸소 변화를 주도하면서 효과가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직전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으로 일했던 이 총재가 IMF의 장점을 적극 벤치마킹하면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해 취임사에서 "통화신용정책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를 가장 잘 아는,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서 한은의 면모가 더욱 굳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한은은 중립적인 어조로 정부 정책에 소극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양질의 내부 보고서를 외부에 적극 공유하면서 점차 달라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3일 한은이 발간한 '지역 간 인구이동과 지역경제 보고서'는 '김포 서울 편입'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수도권 집중을 강도 높게 비판해 화제가 됐다.
이 총재의 소신은 평소 발언에도 드러난다. 그는 지난 11월 금융통화위원회가 끝난 후 기자간담회에서 매주 빅4 회의로 불리는 기관장 모임에 총재가 참석해 한은의 독립성이 우려된다는 질문에 "한은이 정부를 만나서 정부에 영향을 준다고는 왜 생각 안 하는지, 정부의 독립성이 자꾸 사라진다고 왜 안 물어보는지" 반문하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가계부채 대책을 비롯해 한은의 보고서와 아이디어가 정부에 좋은 영향을 주고, 한은도 정보를 정부로부터 듣기 때문에 정책공조의 시너지가 기대되지, 독립성 훼손 우려는 없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한은 블로그를 게시해 외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보고서에 쓰인 기존 개조식 방식의 문장을 서술형으로 바꿔 가독성을 높인 점도 눈에 띄는 변화다. 앞서 한은은 지난 5월 경제전망 보고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인디고북'이라 명명했는데, 심층적인 주제를 다뤄 경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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