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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이태원 참사

“기억공간 조성에 상인·주민도 동의…갈등 전환해 한뜻 모아”[이태원 참사 1주기-망각과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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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 통해 갈등 전환하고 한뜻 모아

시민대책회의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 인터뷰

15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참사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억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들은 말한다. “진실과 기억의 힘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주간경향] 이태원 참사의 기억공간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되는 ‘과정’ 또한 주목 받고 있다. 유가족은 물론 지역 상인 및 주민들까지 동참해 이들의 의사가 반영됐다. 자칫 갈등을 빚을 수 있는 여러 주체가 조율을 거쳐 한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참사 발생 1주기에 앞서, 참사 현장에 기억공간을 마련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내 피해자권리위원회가 큰 역할을 했다. 피해자권리위원회는 유가족과 상인 및 주민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했다. 책임과 권한이 있지만 손 놓고 있던 용산구 등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조금이나마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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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장인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가 지난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용산나눔의집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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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권리위원장을 맡은 대한성공회 자캐오 신부는 “희생자와 유가족뿐 아니라 이태원의 상인과 주민 모두를 피해자로 보고 대화를 시도했다”라며 “제대로 된 기억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상인 모임인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가 협약을 맺고 기억공간 조성에 합의했다. 자캐오 신부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참사 현장 주변을 정비하고 소통하면서 상인들도 신뢰를 갖게 됐다”라며 이번 기억공간은 서로 간 신뢰와 존중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평가했다.

자캐오 신부는 “참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를 통해 핼러윈 축제를 안전하게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이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용산나눔의집’ 원장 사제로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권과 성소수자의 주거권 등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캐오 신부를 지난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용산나눔의집 사무실에서 만났다.

-기억공간 조성의 전반적인 과정은 어땠나.

“갈등 요소가 많았다. 참사 이후 이태원역 1번 출구 일대에 추모공간이 자연스레 형성됐다. 유족들 사이에서는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이 공간을 마음대로 정리해도 되는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처음에는 상인들을 접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들은 참사의 목격자이고 구조자이기도 했다. 참사 당시 처참한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또 자신이 한 말이 자칫 오해를 낳거나 오용될까 두려워 누구한테 마음껏 털어놓기가 두렵다고 토로했다. 여러 번의 거절 끝에 만날 수 있었다.”

-상인들과는 어떤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했는지.

“피해자권리위원회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뿐 아니라 이태원 상인, 주민, 공적 구조자 모두 피해자 범주에 포함된다고 봤다. 상인들에게도 ‘여러분은 잘못한 게 없다. 피해자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권리라는 맥락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상인들이 놀랐는데, 마음을 연 계기가 된 듯하다. 대화의 접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설득은 어떻게 했나.

“처음에는 모든 얘기를 경청했다. 대형 참사가 발생한 사실은 억지로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지울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어떻게 갈등을 전환하고 사회적 의미로 승화시킬지를 말해야 한다. 제대로 된 기억과 애도만이 우리를 다시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상인들을 설득했다. 지난해 12월 추모공간을 1차로 정비한 이후에도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정비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본 상인들이 신뢰를 갖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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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에 조성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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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코로나19로 인해 상권이 초토화된 이후 지난해 핼러윈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상인들로선 유족의 마음은 알겠으나, 추모공간이 정리되길 바랐다. 과거 참사 때처럼 피해자와 피해자가 갈등하는 상황에 이르면 안 되겠다, 사전에 방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과 상인들이 서로 반목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기억공간의 명칭에 담긴 ‘기억과 안전’이라는 표현도 협의를 통해 결정한 것인가.

“그렇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해 긴 시간 대화와 설득 과정을 거쳤다. 유족, 상인 모두 기억과 안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의견이 같았다. 특히 안전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중요하다. 유족들의 일관된 입장이 있다. ‘이태원과 핼러윈이 참사의 원인도 본질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축제에 간 이들은 잘못이 없다. 안전을 지키지 못한 시스템과 정부의 대응이 문제였다. 이런 맥락에 비춰 참사가 발생했으니 핼러윈을 그만두라는 것은, 결국 핼러윈 때문에 참사가 발생한 것처럼 오인될 우려가 있다. 핼러윈 자체는 안전하게 진행돼야 한다. 이 생각에 상인들도 동의한 것이다.”

-용산구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는데.

“참사 이후 용산구에는 참사대책추진단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그런데 뭐하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역할이 거의 없었다. 지난 8월 기억공간 조성에 용산구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뒤에야 용산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박희영 구청장은 배제하라고 요구했고 추진단과 협의를 시작했다. 용산구는 법적 근거가 없다, 선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사실 유족과 상인 사이에서 판을 만들고 중재하는 것은 그런 책임과 권한이 있는 용산구나 서울시 등 지자체의 역할이다. ‘나 몰라라’ 회피하다가, 유족과 상인들이 안을 다 만든 뒤에야 용산구는 테이블에 나왔다. 물론 뒤늦었지만, 그렇게라도 용기를 갖고 움직인 일부 공무원들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 생각한다.”

-용산구가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같은 이름의 ‘명예도로’로 지정했다.

“명예도로 지정도 우리가 먼저 용산구에 요청한 사안이다. 지방정부가 참사의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사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유가족, 시민사회, 지역 주민과 상인들의 빠른 협의를 거쳐서 참사 현장을 명예도로로 지정한 건 처음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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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이태원 참사의 기억공간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알리는 명예도로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정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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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과정은 어땠나.

“기본적으로 기억공간은 유가족협의회의 결단과 양보, 수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상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설치물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들도 수용했다.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 같은 다양한 사회활동가와 주민, 시민들의 생각도 함께 반영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으면 갈등과 답보 상태도 이겨낼 수 있고, 아무리 그럴듯한 내일을 얘기해도 변화할 것이란 희망이 없으면 견뎌내지 못한다. 이를 사회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경험했다. 사회활동가는 이런 ‘숨 쉴 틈’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꽉 막힌 벽에 난 틈과 같은 희망 하나만으로도 유족, 주민과 시민사회, 상인, 공적 기관이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양쪽 얘기를 서로에게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쉽게 단정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반복했다.”

-기억과 안전은 어떤 관계인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은 죽음과 상실의 기억이 클 수밖에 없다. 지역 주민과 상인은 이곳을 매일 지나다니고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 유족과 상인이 날 선 채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배려를 통해 사회적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참사가 ‘기억’되는 것, 핼러윈을 ‘안전’하게 진행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요소다. 제대로 된 기억을 통해 안전한 핼러윈 축제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공동체의 회복이다. 기억과 안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기억공간은 수많은 시민이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기억공간의 사회적 의미는.

“기억공간을 통해서 참사가 유족뿐 아니라 ‘우리’의 얘기가 될 수 있다. 아직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기소된 일부 책임자들의 1심 선고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유족과 상인이 추모공간을 두고 갈등했다면 유족들의 고립감은 더 커졌을 수도 있다. 기억공간 조성 과정에서 진행한 소통과 합의에 큰 의미를 두는 이유이다. 길이 열린 것이다. 기억공간 조성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디딤돌이 된다는 게 어떤 뜻인지.

“과거 참사를 보면 정부가 ‘적극적인 책임 회피’와 ‘소극적 권한 행사’를 통해 피해자들끼리 갈등하게 하면서 진상규명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자주 반복됐다. 피해자끼리 다투게 하면서 진짜 가해자와 싸울 힘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정부가 왜곡된 프레임을 짜서 전파하는 등 여론의 물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잡아서 피해자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심화시켰다. 이번 기억공간은 이런 왜곡된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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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이 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에 조성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의 표지판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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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억공간은 ‘미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간단계, 중간정비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재발방지 대책도 제대로 얘기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억공간을 완성했다고 하면, 마치 모든 게 마무리된 것처럼 잘못 비칠 수 있다. 중간단계라는 표현에는 또 사회적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발판, 시작점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아쉬운 점은 없는지.

“책임과 권한이 있는 공적 기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참사 이후에 시민들이 분노한 이유도 정부와 책임자들이 적극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제대로 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기억공간 조성은 그 결과와 과정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다양한 주체가 합의해 1주기에 맞춰 기억공간을 만든 건 드문 일이다. 그러나 한계도 많다. 당연하다. 책임과 권한이 없는 이들이 문제를 푼 것이기 때문이다. 조성 과정에서 미처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런 과정들도 기억되고 공유될 때 아픔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공유할 것인가는 사실 어려운 지점이다. 잘못하면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다. 서로 간 신뢰와 존중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점과 함께, 공적 기관의 제대로 된 역할과 책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웹페이도 운영한다. ▶웹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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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지난 10월 26일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에 조성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초입 바닥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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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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