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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이태원 참사

산 사람도… 살린 사람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악몽 [심층기획-이태원 참사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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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끝나지 않는 고통

주변 상인·생존자·출동 경찰 등

1년 지나도 트라우마 못 벗어나

생존자 대부분 일상생활 어려워

‘놀다 죽었다’는 주변 시선에 끙끙

사회적 관심 갈수록 시들해지고

사고현장 추모 공간 관리도 허술

유족 “지지부진한 진실 파악 답답

불명예 죽음으로 낙인 찍기 안돼”

“가슴이 콱 맥히고 항시 눈물이 고여있어. 가만히 있을 때 바보 같고 멍하게 있는 거야. (트라우마) 치료는 안 받아. 그 얘기 반복하면 또 울렁거리니깐, 지인들도 만나고 다른 데로 눈과 귀를 많이 돌리려고 노력해. 물질적, 심적 고통? 누구한테 얘기도 못해. 애들 영혼을 둘 추모 공간 문제도 해결이 안 났는데.”

159명이 희생된 그 골목에서 패션 상점을 운영했던 남인석(82)씨는 이태원 참사 이후 자신의 지난 1년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면 현장이 보이니 그날 생각이 났다. 그걸 얘기해달라며 찾아온 사람들에게도 매번 자세히 설명해줬다. 1년 동안 상주(喪主) 같이 살며 참사 당일 살려달라고 외치던 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수시로 울컥하고 때때로 성질이 났다. 끝없이 찾아오는 괴로움에 결국 남씨는 지난 6월 중순 가게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근처로 옮겼다. 장사를 그만두려고도 했지만 ‘애들이 어디 가 있을 데도 없는데’라는 생각에 접었다.

세계일보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사고 골목에서 패션 상점을 운영하던 남인석(82)씨는 지난해 10월29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버선발로 가게로 밀려 들어온 아이들을 보살피고, 인파 속에 깔린 아이들을 잡아당기며 진땀을 뺀 그 날 이후 그는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다. 지난 23일 녹사평 인근으로 새로 터전을 옮긴 상점 안에서 남인석씨가 지난 1년의 삶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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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참상을 잊을 수 없다”는 건 비단 남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일보는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지난 20∼24일 참사 유족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을 찾아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모두 저마다의 트라우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었다. 사회적 관심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붙잡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사자들에게 여전히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고, 회복은 머나먼 길이다.

악몽이 벌어지던 순간의 한복판에 있던 생존자들, 참사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소방관 등의 트라우마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날 그 순간을 연상케 하는 작은 자극 하나에도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게 반응한다.

참사 생존자 이주현(28)씨는 자신과 같이 이태원에 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친구들에 대해 “문앞에 깔려있다가 구조됐는데 아직도 구급차 소리를 들으면 공황이 오는 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며 “생존자는 일상이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참사로 하지마비가 됐던 이씨는 어느 정도 재활은 끝났지만 무릎과 발목, 발가락 통증이 남았다.

생존자임을 숨기지 않았던 자신은 주변에서 배려해줘서 어려움이 덜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날 이태원에 갔다는 걸 밝히지 못하는 생존자들은 말 못할 고통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태원이 마약·유흥의 장소라는 편견, 놀러갔다가 당한 일은 온전히 개인이 감당할 몫이라는 일각의 냉담한 시선 등은 생존자들을 고립시키는 측면이 있다.

세계일보

24일 서울 용산구청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박희영 용산구청장 사퇴촉구 지자회견’에서 유가족이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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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당일 딸, 남편과 사고가 났던 골목 위쪽에 있다가 빠져나온 상인 박모씨는 싱크대에만 서면 그날 기억이 떠오른다. 오후 6시34분쯤 ‘나 죽는 건가’ 싶어 경찰에 신고한 그는 이태원 지리를 잘 아는 덕분에 해밀턴 호텔 쪽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신고했으니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던 그에게 딸이 “이태원에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죽었대”라고 했다. 박씨는 “몰려든 인파를 정리해주는 구청 직원도 경찰 기동대도 없는 그런 무관심이 만든 참사였다”며 “아직도 왜 경찰이 안 나왔고, 그 골목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어서 회복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력으로 참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이들대로 깊은 상흔을 갖게 됐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누워있었던 것, 빠져나와 달라고 이동해달라고 소리질렀던 것 등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있고 떠오를 때 힘들죠. 심리상담도 받아봤지만 한두번으로는 효과가 없고 꾸준히 치료해야 하는데 근무하다 보면 쉽지 않고요.”

사고 골목에 출동했던 용산경찰서 관할 파출소 소속 A씨는 그때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트라우마가 생겼다.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졌다”는 그는 “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근무 때 말고는 사람 많은 곳을 피하는 등 대인기피증이 생긴 동료들도 있다고 했다. 다만 이를 애써 밖으로 티내지 않고, 생각하려 하지 않으려고들 한다.

◆1년 전 그 시간에 멈춘 삶

“살면서 하고자 했던 모든 일이 중단됐죠. 아이가 불명예스럽게 죽었다고 낙인찍히지 않도록 하는 일에 남아있는 모든 걸 바칠 겁니다.”

이정민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참사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뀐 유족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1년이 지났는데 아무리 목소리 높여 요구해도 반응이 없다”며 한탄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제정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까지 올라갔지만 논의는 진전이 없고, “가시적인 것 없이 1년 전과 똑같은 상황에서 추모제를 하는 게 굉장히 아프고 힘들다”는 것이다.

숱하게 제기한 의혹이 설명되기는커녕 외면되는 현실, 실무자를 법적 조치해도 구속이 만료돼서 나오는 상황,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지지부진한 참사 관련 재판 등 “총체적으로 이뤄진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제일 답답하다”고 이 위원장은 말했다. 이는 유족의 일상 역시 멈추게 만들었다. 참사 원인 및 대응에 대한 진실이 파악되고 책임자가 책임을 지고 나서야 시곗바늘이 다시 돌아갈 것이란 설명이다.

이제 ‘그 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이 위원장은 생각한다. 그는 “이 일을 겪으며 깨달은 바가 너무 많아서 제가 힘들게 쌓아온 경험을 우리처럼 힘 없이 목소리 내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한다고 느낀다”고 했다. 거리에 나와 외롭고 어려운 투쟁을 할 때 자신의 손을 잡으며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한 시민의 한마디가 소중하다는 걸 절실히 체감해서다. 이 위원장은 “공감하는 시민들이 없으면 소수자가 무언가 하려는 일은 묻혀버리고 만다”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참사 당일 인파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찰 신고를 했던 이태원 인근 거주민 50대 박모씨와 남인석씨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사고 골목에 도착해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김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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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을 가로막는 것들

참사로부터 회복을 더디게 하는 주 요인은 우리 사회의 추모와 애도가 1년째 제자리걸음이란 사실이었다. 생존자 이주현씨는 “저희가 맺힌 것이 있는데, 해결되지 않아서 감정을 해소할 수 없으니 회복이 힘든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씨의 마비됐던 다리는 나아졌지만 정신적 통증은 악화됐다.

그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확실한 끝맺음, 저희 아픔을 이해하는 사회적 시선이 (회복에) 중요한 것 같다”며 “아직 1년밖에 안 됐냐는 등 주변의 관심이 꺼져가는 것을 보며 이걸 일부의 참사로만 생각해 공감이 못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족인 이 위원장도 “생존자들이 가장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정부나 기관의 외면 때문에 오히려 자기가 힘든 걸 호소하기를 포기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이 돼 버렸다”며 “정부가 무엇을 더 해줄지 깊이 고민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행정적·관료적 사고로 접근하니 상처를 더 받는다”고 지적했다.

사고 현장에 마련된 간이 추모 공간의 상태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상인 남인석씨는 “참사 100일 때와 비교해서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초라해졌다”며 “젊은이들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경종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글 몇 개 붙여놓고 너무 허술하다”고 말했다.

이곳을 쭉 지켜본 상인이자 참사 생존자인 박모씨도 “그동안 사고 현장을 너무 지저분하게 관리했다”며 “쓰레기가 막 굴러다니고, 사람들이 추모하려고 두고 간 꽃들도 버려지듯 저렇게 두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참사 희생자·생존자 부모들이 뭔가 떳떳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인 것이 가장 분한 마음”이라며 “유족들이 ‘놀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식의 나쁜 프레임이 여전하니까 회복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게 내 몫의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는 책임자들이 제대로 사과를 한다면 조금 마음이 가라앉을텐데 아직은 불편한 감정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팀=김선영·정지혜·박유빈·조희연·김나현·윤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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