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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이태원 참사

"국가 실적쌓기 상담도 신물...8번 자살 시도 내몬 그날의 악몽" [이태원 참사 1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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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아침을 먹으면서 생각해요. 언제쯤 이 약을 끊을 수 있을까. "

2003년 2월 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화재참사의 부상자 김수진(38)씨는 21년째 우울증약을 복용하고 있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씨는 영어학원에 가기 위해 대구역에서 중앙로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다다를 무렵 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중앙로역에 불이 났어.’ 중앙로역에 도착한 열차 출입문이 잠시 열렸다가 닫히는 찰나에 시꺼먼 연기가 객실로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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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화재참사 부상자인 김수진(38)씨는 참사 이후 자살시도를 7~8차례 시도하고 21년째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사진은 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씨의 모습. 19개월된 딸을 키우고 있는 김씨는 2차 가해 우려로 얼굴 공개를 주저했다. 이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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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하세요!”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김씨가 타고 있던 1번 칸 출입문이 열렸다. 김씨는 앞선 남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열기와 비명이 뒤섞인 생지옥 속에서 승강장 벽을 더듬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역 안으로 진입하던 소방관은 “소방호스를 잡고 올라가라”고 외쳤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영남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날 중앙로역에선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항공사 승무원을 꿈꾸던 소녀의 일상은 무너졌다. 몸은 나았지만, 마음은 곪은 채 컴컴한 지하철역 속에 갇혔다. 참사 이후 조금만 어두워지거나 사람들이 밀집한 공간에 있으면 심장이 요동치다 공황상태에 빠지곤 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멍하니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고교 시절 1차례를 포함해 총 7~8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김씨는 “‘왜 하필 내게’라는 생각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짓눌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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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중앙로역 역사 한 곳에 마련된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 이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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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고교 시절 2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공황장애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정부나 지자체의 마땅한 안내가 없어 김씨가 스스로 찾아갔다. 그는 “정부나 대구시는 돈만 주면 끝난다는 식이었다”고 했다. 대학 졸업 뒤 취업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지금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삶의 의지를 간신히 붙잡아 주는 건 19개월 된 딸이다. 김씨는 “아이에겐 나밖에 없으니 책임감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고 말했다.

김씨의 병명은 ‘재난에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재난 트라우마’라고도 불린다. 주로 재난 발생 1개월을 전후로 증상이 발현하고, 9개월 전후 회복되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그러나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3명 중 1명은 3년 뒤에도 증상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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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시기별 반응은 ▶급성기(사고 후 3일~1개월) ▶아급성기(1~3개월) ▶만성기(3개월 후)로 나뉜다. 급성기 때는 급성 스트레스 반응이 나타나고, 아급성기에는 애도·불안·공포·우울·죄책감·불신 등의 감정이 신체 증상과 함께 나타난다. 만성기엔 이런 감정들이 절망감으로 악화한다. 사고 1주기 등에 기념일 반응이 나타나거나 자살 시도, 가족 간 갈등 등 2차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학계에선 급성기엔 정서적 안정감과 실질적 정보를 제공하는 심리적 응급처치를, 만성기부터는 전문적 치료를 권하고 있다.

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심리지원을 해온 김경희 대구공업대 교수는 “당시엔 심리적 응급처치라는 개념이 없어서 신체 부상만 살폈을 뿐 트라우마는 방치됐다.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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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생존자인 유가영(26)씨는 참사 관련 에세이를 출간하고 지난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는 동료지원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일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유씨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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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에야 ‘트라우마 치료’ 논의 본격화



재난 트라우마의 위험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다. 299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인 데다 사망자 대부분이 미성년자(고교생 248명)였기 때문에 유가족·생존자에 대한 심리지원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경기도·안산시가 구성한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이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현 안산온마음센터)로 재편, 참사 발생 보름 만에 문을 열었다. 2015년 1월 세월호피해지원법에 센터 설치의 법적 근거도 생겼다.

단원고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스쿨닥터로 배치됐다. 참사 생존자인 단원고 졸업생 유가영(26)씨는 지난 4월 출간한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에 당시의 경험을 소개했다. PTSD로 자해를 반복하던 유씨는 “힘들 때 스스럼없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고 꾸준히 피해자에게 관심을 쏟는 전담 선생님이 있어서 좋았다”며 “지속적인 상담이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후 유씨는 다른 재난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고 있다.

중앙일보

박경민 기자





정부 나섰지만 반응 ‘싸늘’…인력난 심각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뒤엔 정부가 직접 나섰다. 2018년 4월 출범한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중심으로 통합심리지원단이 구성됐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가·권역트라우마센터와 지자체 광역·기초정신건강복지센터를 통해 지난해 10월 30일부터 지난 5일까지 유가족 1880건, 부상자 1041건, 대응인력(경찰·소방·의료진 등) 196건 등 총 7141건의 심리지원이 이뤄졌다. 비대면 상담이 5625건(78.8%), 대면 상담이 1516건(21.2%)이다.

하지만 중앙일보가 만난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유가족 송해진(47)씨는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락했더니 전화를 몇 번이나 돌리다가 굉장히 형식적인 답변만 내놨다. 나라에서 해준다는 심리치료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해 민간병원을 알아봤다”고 말했다. 유가족 김상민(56)씨는 “주변에서 뭔가 추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릴까 두려워서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청 마음동행센터의 심리지원을 받은 A 경관은 “아직 상담을 받고 싶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상담을 받도록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보여주기식, 실적쌓기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참사 현장에 출동했던 유모(32) 소방관도 “상담을 받다 중간에 출동했고, 돌아와서 똑같은 내용을 또 얘기했다. 짜증만 나던 상담이었다”며 “상담받으려 누군가 내 근무를 대신 해야 하는 상황이라 한 번만 받고 그만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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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심리상담을 위한 재난심리지원 카페가 서울 용산구에 지난해 11월 마련됐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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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개선도 더디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회엔 국가의 재난 심리지원 기능을 확대하는 내용의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한 건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7월 유사 법안을 한데 모은 대안이 국회 보건복지위를 겨우 통과해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정부가 5년마다 수립하는 정신건강 국가기본계획에 ‘재난 심리지원’을 포함하고, 국가·권역트라우마센터의 업무 범위를 넓히는 게 법안의 골자다.

국가트라우마센터 설립 이후 관련 예산 증액은 소폭에 그쳤고, 인력난은 여전하다. 내년도 국가·권역별트라우마센터 예산안은 48억4800만원으로 ‘1국가 4권역’ 체계가 갖춰진 2021년 예산(42억5900만원)과 비교해 13.8% 늘어난 정도다. 하지만 국가트라우마센터(3명)를 제외하면 정신건강 전문의는 권역 센터당 1명뿐이다. 그마저 각 센터가 설치된 국립병원장이 센터장 업무를 겸임하는 식이다. 지난해 각급 트라우마센터별 전문의·정신건강전문요원 1명이 담당하는 사례는 국가센터 800건, 영남권 459건, 호남권 824건, 강원권 1059건, 충청권 493건에 달했다. 지난 1월 정부가 발표한 ‘국가안전시스템개편 종합대책’의 97개 세부 과제에도 ‘재난구호 심리지원 확대·강화’가 포함됐지만 예산 증액이나 심리지원 인력의 근무여건 개선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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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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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트라우마센터, 실적 압박에 제 기능 못 해”



복지부 연구용역과제를 수행한 가톨릭대 산학협력단과 한국행정학회가 각각 2021년 8월과 지난 4월 내놓은 보고서는 ▶기간제 채용에 따른 신분 불안정 ▶민간보다 적은 보수 ▶전무한 보상·승진 체계 등을 인력난의 원인으로 꼽았다. 신규 인력이 유입되지 않고 기존 인력은 소진돼 이탈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단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의지 있는 소수의 전문인력으로 트라우마센터가 버티고 있지만, 언제 무너지질 모를 정도로 인력난이 극심하다”고 말했다.

실적 중심 관리도 문제다.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은 “트라우마센터 설립 초기인데도 복지부의 실적 압박에 쫓기다 보니 정작 필요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며 “양적 지표 중심의 평가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행정학회는 심리지원 기능이 복지부(트라우마센터)와 행정안전부(재난심리회복지원단)로 이원화돼 있는 점, 컨트롤타워나 협업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은 점 등도 꼬집었다.

복지부는 지난 5월 중앙재난심리회복지원단 전체회의에서 “재난 심리지원 인력을 15명 확충하고,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재난 심리지원 기초 인프라로 기능하도록 전문인력 약 500명을 늘리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다만 복지부 관계자는 “인력 채용 외에 별도의 추가 대책은 없다”며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후속 조치를 차질 없이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선우 의원은 “트라우마 치료의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 대응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전문성을 갖춘 인력 확충을 위한 유인책과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정부 주도 불신에 별도 의료심리지원단 꾸렸다…85명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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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의료심리지원단에 참여 중인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태원 유족을 위로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다양한 형태의 모임과 연계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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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전문가 41명은 지난 2월 정부와는 별도로 ‘이태원 참사 의료심리지원단’(지원단)을 구성했다. 정부가 제공하는 심리지원을 불신하거나 상담 수준에 만족하지 못한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자원봉사 방식으로 심리지원에 나선 것이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유가족 심리지원 사례는 참사 직후인 지난해 11월 788건이었지만, 12월 310건으로 한 달 새 반 이하로 줄었다. 지난 8월엔 40건에 그쳤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심리상담전문가, 사회복지사 등이 지난해 12월부터 지원단 구성을 논의했고 지난 2월부터 본격 활동에 나섰다. 지난 23일까지 유가족과 생존자 총 85명이 지원단으로부터 상담과 치료 등을 받았다.

지원단은 간담회와 행사 등에 여러 번 방문하며 유가족과 신뢰관계를 쌓았다. 지속적인 심리 상태 모니터링과 대면 심리지원에 나섰고, 신체적 증상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는 “유가족의 재방문율도 높고, 다른 유가족에게 지원단 상담을 추천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지원단의 최종 목표는 ‘사회적 장례’다. 재난 피해자들이 우리 사회가 안전하고 믿을 수 있도록, 사회 공동체의 치유와 공감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지원단에서 활동하는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유가족을 위로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교육과 문화활동을 통해 여러 모임과 연계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정민·하준호·이영근·이찬규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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