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이 최초의 국민' 국민투표 부결
6만년 전부터 살던 원주민, 각종 차별에 노출
235년 전에 호주 발견한 영국, 원주민 학살
원주민 자녀 낳으면 강제로 백인들에게 입양
"가결 되면 집 뺏긴다" SNS에 가짜뉴스 양산
NYT "호주가 트럼프식 가짜뉴스에 직면했다"
야당 "모르면 부결 찍어라" 결국 개헌 무산돼
■ 방송 : CBS 라디오 <오뜨밀 라이브> FM 98.1 (20:05~21:00)
■ 진행 : 채선아 아나운서
■ 대담 : 신혜림 PD, 조석영 PD
◇ 채선아> 좀 더 밀도 있게 알아볼 이슈 짚어보는 <뉴스 탐구생활> 시간입니다. 신혜림 PD, 조석영 PD 나와 계세요.
◆ 신혜림, 조석영> 안녕하세요.
◇ 채선아> 호주 국민투표 얘기네요.
◆ 신혜림> 네. 지난 14일에 호주에서 역사적인 국민투표가 열렸거든요. 호주의 원주민을 헌법상 최초의 국민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개헌 투표입니다. 호주는 오세아니아 대륙을 통째로 혼자 쓰고 있는 나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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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림> 호주 원주민은 두 종류인데 '어보리진'이라는 대륙 쪽의 원주민이랑 그 위에 토레스 해협이라고 파푸아뉴기니 사이에 있는 해협이 있어요. 섬이 엄청 많은데 거기 사는 원주민까지 두 종류입니다. 호주 전체 인구가 2,600만 명 정도 되는데 이 둘은 3.8%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요. 호주 역사가 250년이 안 됐거든요. 그런데 원주민은 이 땅에 6만 5천 년 전부터 살아왔습니다. 호모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처음 출현했는데 그때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는 얘기도 있고요. 이들이 250개의 언어를 썼어요. 그리고 다양한 부족 국가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1788년에 딱 영국인이 등장합니다. 235년 전이죠.
◆ 조석영>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이 1492년인데 그때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 그랬어요. 서구 입장에선 호주는 훨씬 새로운 대륙이죠.
◆ 신혜림> 235년밖에 안 됐어요. 식민지 개척하면서 1900년부터 100년에 걸친 학살이 시작됩니다. 이때 원주민이 90%가 감소해요. 10%밖에 안 남아요. 1901년에 독립 연방이 되면서 독자적인 헌법이 만들어지는데요. 헌법 제정 당시에도 원주민은 백인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 채선아> 그런데 원주민이 더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잖아요. 6만 5천 년 전부터 살아왔다면서요.
◆ 신혜림> 그렇죠. <규정과 지배>라는 책이 있어요. 원주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책인데요. 여기 보면 잘 나와 있거든요. 작가가 인류학자인데 인도 출신이고 우간다에서 오래 살았어요. 두 나라 다 식민지잖아요. 그래서 이 상황을 많이 분석했는데 "원주민은 서구에서 식민 통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라고 해요. 누가 만들었냐. 대영 제국의 지식인들, 영국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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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영> 과거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던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하죠.
◆ 신혜림> 이들은 주인 없는 땅에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명분이 필요해요. 그러면 주인이 없어야겠죠. 국가도 없어야 되고요. 그러니까 먼저 살고 있는 인간이 없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원주민은 동등하지 않다' 이런 취급을 오랫동안 받아온 거예요.
◇ 채선아> 저는 호주에 대한 이미지가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인종이 자유롭게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원주민은 쏙 빠진 거예요?
◆ 신혜림> 쏙 빠졌죠. 예를 들어 원주민 보호구역이라는 게 있어요. 표면적으로 보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격리와 통제를 한 거예요. 이동의 자유가 없고요. 재산도 못 가지게 통제하고 자녀를 낳으면 백인 가정으로 입양시키는 식으로 구역을 설정한 건데 보호라고 볼 수 없죠. 식민 지배 방식이 직접 지배, 간접 지배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예를 들어 유럽식 건물도 세우고 제도도 이식해서 유럽화하는 방식이 직접 지배라면 간접 지배는 보존, 보호 대상으로 구분해요.
◆ 조석영> 천연기념물처럼 보호하는 동물 같은 건가요?
◆ 신혜림> '우리는 문명화된 인간인데 너네는 근대화의 가능성이 없다. 미개하다. 그래서 어떤 생물체로 규정하고 지배한다' 이런 게 아까 말씀드린 <규정과 지배> 책의 내용이에요.
◆ 조석영> 먼 얘기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국주의가 들어와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건 일제강점기 때 저희가 겪었던 방식이랑 비슷할 수 있어요.
◇ 채선아> 제가 생각했던 원주민의 생활 방식과 좀 다르네요. 저는 원주민이 삶의 방식이 달라서 따로 분리시켜놓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존, 보호 대상으로 생각한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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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림> 맞아요. 그리고 원주민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영국인이 왔을 때까지 이 사람들은 수렵, 채집만 하던 민족이다' 그런데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들은 농사도 짓고 어장을 관리한다든가 주택을 그럴 듯하게 지어놓는다든가 법률도 있다든가 무역도 한다든가. 국경이라는 건 없지만 서로를 구분 짓는 확연한 질서가 있었다고 해요.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 들어갈 때는 환영 인사를 꼭 받아야 한다는 의례도 있었고요. 이런 것들이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죠.
◆ 조석영> 이게 국가가 아니면 고조선도 국가가 아니죠.
◇ 채선아> 나름의 룰이 있던 거네요.
◆ 신혜림> 네. 이런 게 인정받지 못했던 헌법이었다는 거잖아요. 원주민에 대한 개헌 국민투표가 지금까지 호주에서 두 번 이루어졌는데요. 첫 번째가 1967년이에요. 이때는 의회의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위한 법률 제정 권한에서 "단, 원주민 인종을 제외하고 의회에 권한이 있다."라고 써놓은 헌법이 있었고 또 "국가 인구 조사에서 원주민을 제외하고"라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이런 게 동물과 다름없다는 거죠.
◆ 조석영> 동물이라고 규정한 건 아니지만 사람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얘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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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선아> 주민 수에도 포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네요. 그럼 원주민은 뭐예요?
◆ 신혜림> 사람이 아닌 거죠. 그래서 이런 조항을 제외한다는 투표를 1967년에 했어요. 그때는 90%의 사람들이 찬성했는데 차별은 헌법이 바뀌어도 지속됐고요. 자녀를 낳으면 강제 분리해서 백인에게 입양시키는 것이 1970년대까지 이어졌거든요. 이때 원주민 세대를 '도둑맞은 세대'라고 불러서 2008년에야 공식 사과를 합니다. 15년 전밖에 안 됐어요. '재산 통제했다.', '이동의 자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 100년 이상 살아온 거잖아요. 그래서 원주민은 지금 호주의 최하 빈민층이에요. 호주의 다른 사람들이 100만 원 벌 때 원주민은 30만 원 벌어요. 그리고 기대 수명도 훨씬 짧고 처참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죠.
◆ 조석영>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기회도 안 주어지고 자유도 없다시피 하고 보호라는 이름으로 격리시켜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자식 낳으면 뺏기고, 그런데 어떻게 잘 살 수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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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림> 지금은 영어 쓰거든요. 좀 안타깝지만 언어가 거의 다 사라졌는데요. 겉보기엔 거의 똑같은데도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원주민을 최초의 국민으로 인정한다고 헌법에 넣는다는 건 어떤 인간을 나랑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묻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 채선아> 아직까지 안 된 게 희한한데요.
◆ 신혜림> 그렇죠? 그러니까 헌법에 넣고 싶은 거예요. '원주민이 최초의 국민이다' 이걸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게 차별을 막는 시작점이라고 원주민들이 주장하기 시작했던 거죠.
◆ 조석영> 소위 서구 선진국이라고 하는,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국가들은 이미 이런 과정을 거쳐 왔죠.
◆ 신혜림> 맞아요. 캐나다 같은 경우 1982년 헌법에 캐나다 원주민의 기존 원주민 및 조약 권리가 인정되고 확인됩니다. 이렇게 딱 명시를 해놓고요. 호주 옆에 뉴질랜드 있잖아요. 거기는 1867년 때부터 마오리족을 대변하는 국회 의석을 만들어서 국회의원으로 무조건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어요.
◇ 채선아> 정치적 발언권이 보장된 거네요.
◆ 신혜림> 네. 어떤 기구나 의석이 마련돼도 차별이 줄어들까 말까잖아요. 그런데 호주는 헌법에 명시된 것도 없고 대변할 기구도 없는 거예요. 호주 공영방송 ABC에서 "호주는 헌법에 원주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식민지 역사를 지닌 유일한 선진국이다."라고 했어요.
◇ 채선아> 본인들도 알고 있네요. 세계적 추세가 이러면 이번에 국민투표가 열렸을 때 '최초의 국민으로 인정한다'에 찬성했을 법도 한데요.
◆ 신혜림> 2017년에 울룰루 성명이라고, 지구의 배꼽으로 불리는 울룰루 지역에서 성명을 냈어요. 당시 보수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 성명을 묵살했고 그다음 총선 승리한 게 진보적인 정부인데요. 지금 호주 총리인 앤서니 앨버니지가 "최초의 호주인을 인정하는 일은 1901년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됐다" 하면서 3월에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합니다. 이게 공약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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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영> 그런데 그 국민투표 결과가 부결된 거네요.
◆ 신혜림> 70%가 투표했어요. 호주는 투표가 의무입니다. 안 하면 벌금을 부과 받아요. 그래서 투표를 많이 했는데도 반대가 60% 나온 거예요. '사람 취급을 계속 안 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요. 투표 내용을 자세히 볼게요. 투표 내용이 '원주민이 이 대륙에 거주했던 최초의 호주인이라는 걸 인정하느냐?'
◆ 조석영> 이건 그냥 역사적 사실 아닌가요?
◆ 신혜림> 그걸 헌법에 명시하는 걸 찬성하느냐. 그리고 '의회나 정부에 원주민을 대표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는 헌법 기구인 보이스를 만들 건데 동의하느냐?' 이걸 헌법에 넣겠다는 게 투표의 내용이었어요. 개헌 절차를 밟기 직전까지는 이견이 별로 없었는데요. 막상 투표할 때가 되니까 드라마틱하게 의견이 바뀐 거예요. 2023년 7월쯤 돼서 여론이 완전히 역전돼요. 반대가 훨씬 더 많아져요.
◇ 채선아> 찬반 양쪽 입장이 어땠길래 이런 결과가 나온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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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림> 찬성하는 쪽은 '원주민을 인정하는 것이 6만 5천 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거다. 그리고 국가 통합에 도움이 될 거다. 주택, 고용 등 여러 분야가 발전할 거니까 모두에게 좋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80% 이상 지지한다'고 했는데요.
야당이 주축이 된 반대 측에서는 '여당이 필요 없는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헌법에 특정 인종을 명기하는 것은 오히려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원주민에게는 이미 많은 혜택이 있다. 이들을 대변하는 기구까지 생기는 건 역차별이다'
◇ 채선아> 부결됐다는 건 반대측 논리가 통했다는 거네요.
◆ 신혜림> 최초의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건 많이들 찬성 한대요. 그런데 이 보이스라는 기구에 대해서는 "이게 뭐야 잘 모르겠는데" 이런 반응이 있으니까 야당은 "모른다면 반대 표를 던져라." 이런 식으로 나온 거죠.
◇ 채선아> 모른다면 알려주거나 좀 더 설명해 주지 않을망정 모르면 반대해라?
◆ 신혜림> 국회에서는 개정안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해놨거든요. 그런데 "모르겠지? 어렵지? 이게 왜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지?" 이런 식으로 선동하는 거죠. 그래서 개헌이 될 경우 벌어질 일에 대해 SNS를 통해 가짜 뉴스가 생산된 거예요. '보이스라는 기구의 권한이 의회를 넘어설 거다. 우리는 주택을 빼앗길 거다. 정보 제공을 안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요. 너무 심했어요.
◆ 조석영> 차별을 유지하고 싶은 쪽의 에너지가 강해서 가짜 뉴스가 많이 생산된 걸 수도 있고요.
◆ 신혜림> 외신 반응을 볼게요. "국민투표를 거부하겠다는 '노 캠페인'은 사실보다는 두려움, 불확실성, 의심에 기초해서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거짓인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해외 언론들 가디언이나 워싱턴 포스트의 얘기입니다. 또 뉴욕타임스 같은 경우는 이렇게 말해요. "양극화된 호주가 '트럼프식 가짜 뉴스'와 직면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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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선아> 지금 원주민들 난리 났겠는데요.
◆ 신혜림> "우리 세대의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됐다." 이렇게 너무 절망하고 있고요. "국민투표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깃발을 게양하겠다." 그래서 제가 이 투표를 보면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아직도 영국, 서구가 잘못 끼운 첫 단추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있구나. 삶이 팍팍해지고 있잖아요. 호주 사람들도 이견이 없다가 가짜 뉴스에 휘말리면서 '주택을 빼앗긴다고? 안 그래도 난 힘든데…' 이런 식으로 오히려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죠. 호주가 다양성의 국가잖아요. 원주민도 포용할 수도 있었는데 당연히 했어야만 하는데 후퇴해버리는 결과가 세계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채선아> 개인적으로 '가짜 뉴스가 이렇게 중요한 국민투표를 망치다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슬펐거든요. 결국에 가짜 뉴스를 사람들이 믿고 혹하게 되는 건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혹은 우리가 믿을만한 정부나 언론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는 신뢰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뉴스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좀 슬프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여기까지 호주에서 치러진 국민투표 얘기 정리해 봤습니다. 신혜림 PD, 조석영 PD 수고하셨습니다.
◆ 신혜림, 조석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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