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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오징어 게임' 전세계 돌풍

이 친구 없었으면 4전 5기 ‘국민복서’ 홍수환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는 나오지 않았다[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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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부. 국어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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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권투의 슈퍼스타, ‘4전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 전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오른쪽)에게는 아주 소중한 60년 지기 친구가 있다. 평생 ‘홍수환’만 생각한 친구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며 권투를 함께 했던 김택구 씨다. 지난달 광화문 역 인근에서 만나 회포를 푼 두 사람.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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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범한테 되겠어(맞서겠냐)?”

4전 5기 신화의 대명사, 한국 권투의 슈퍼스타 ‘국민 복서’ 홍수환 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73)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긍정 에너지를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역 시절처럼 혈기왕성했던 패기를 부려보고 싶을 때, 한결같이 그 끼를 받아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홍수환의 60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좋아해준다. 그래서 이 친구 때문에 인생 후반부가 신이 난다.

김택구 씨(72)는 홍 전 회장의 둘도 없는 절친이다. 범띠인 홍 전 회장보다 한 살 어린 토끼띠이지만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평생 ‘불알 친구’가 됐다. 지난 달 만난 홍 전 회장은 택구 씨를 보자마자 “얘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며 손을 꽉 잡고 안 놓아준다. 택구 씨는 ‘홍수환이라면 무조건 편드는’ 친구다. ‘홍수환 교’의 2인자 같다. “홍수환이 친구여서 평생 남들 앞에서 폼 잡는다”고 한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져서 존경심도 크다고. 진심이 크게 와 닿는다. 홍 전 회장은 “수환이와 연락이 되는 것만도 인생의 큰 낙”이라는 택구 씨가 마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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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역 인근 단골음식점에서 잣 막걸리로 건배를 하고 있는 홍수환 전 회장과 김택구 씨. 택구 씨도 선수와 매니저로 권투 인생을 살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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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구는 나랑만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그래. 네가 보약이야 보약.”
막걸리 잔을 부딪히지 않고 쉴새 없이 몸을 기댄다.

● 두 아버지가 이어준 ‘우리’

“택구가 아니었으면 권투를 안했겠지. 지금의 ‘홍수환’은 없었을거야.”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살던 초등학생 홍수환은 10살 무렵 어느 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권투 경기를 봤다. 권투 선수였던 택구 씨의 아버지 김준호 씨가 홍 전 회장이 살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이 분의 열렬한 팬이었던 홍 전 회장의 아버지가 김 씨 경기에 아들을 데려간 것이다.
“택구 아버지가 은퇴를 했다가 다시 복귀를 했어요. 아버지가 원래 택구 아버지 팬이셨거든. 권투를 처음 봤는데 결국 택구 아버지 때문에 내가 권투를 한 거죠.”
그 인연으로 아들 택구 씨도 만났다. 아버지 권유로 권투를 막 시작했던 택구 씨를 따라 홍 전 회장도 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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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초등학교 시절 함께 택구 씨의 아버지인 선수 출신 김준호 씨 지도를 받고 권투를 시작했다. 왼쪽이 홍수환 전 회장. 바로 옆이 김택구 씨. 홍수환 제공


“삼각지에 있는 동양체육관에서 택구하고 운동을 같이 했었죠. 택구가 원투 스트레이트를 참 잘 쳤었어. 그리고 저한테 바람을 많이 넣었죠. 권투 계속하라고.”
“수환이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합숙하다시피했죠. 기억나? 내가 훈련 안 한다고 아버지한테 맞고 벌을 서고 있으면 너희 아버지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셔서 밥 먹이고 그려셨어. 나는 그 때도 근성이 없었어. 아버지가 시켜서 억지로 한 거지. 그런데 너는 달랐어. 나는 널 처음 볼 때부터 ‘얘는 권투를 위해 태어난 놈’이라고 생각했어.”

● 복싱 글러브 다시 끼게 해준 ‘너’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택구 씨가 이사를 가면서 의도하지 않게 사이가 멀어졌다. 짝이 없으니 홍 전 회장은 권투에 흥미를 잃었다. 중학교 때 권투를 좋아하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권투가 아예 머리에서 지워졌다. 중앙고에 진학해선 야구를 했다. 유격수도 봤다. 마음이 다시 권투로 돌아선 건 한국 권투 역사상 첫 세계 챔피언인 김기수의 타이틀전을 보고 나서다.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고 사실이다. 그런데.

- 더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서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신)기철이라는 친구가 ‘너 혹시 홍수환 만나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기철이는 신기남 전 국회의원 형이죠. 그러면서 기철이 때문에 다시 수환이를 만났고 수환이가 다시 우리 아버지 밑에서 나랑 권투를 했지.”(김택구)
“너 다시 만나기 전에 기철이가 ‘너는 맞아도 권투하는 게 보기 좋았는데 왜 관뒀느냐’고 그러더라고. 그러다 택구가 기철이에게 다리를 놓아서 다시 우리가 만났잖아. 그래서 아버지와 다시 운동을 하게 됐고. 예전에 운동하면서 택구 아버지 배를 때리던 기억이 나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아버지가 진짜 제대로 운동을 시켜주셨지. 기철이도 고마운데 세상을 떴네.”(홍수환)

학교 있는 시간을 빼고 둘은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학교는 달랐지만 아침 일찍 홍제동 고개를 뛰었다. 그러면서 아마추어 4라운드 경기에 나가 열정을 불태웠다. 홍 전 회장이 “너는 권투를 못했어”라고 농담삼아 놀리니 그래도 택구 씨는 웃으면서 “링에 올라갈 때마다 4000원이나 받았어. 그 때 쌀 한 가마니 값이야”라고 어깨에 힘을 준다.
힘들게 권투를 했어도 붙어다는 자체가 인생 재미였다. 관통하는 둘만의 추억이 많다. 한 얘기 또 한다고 하는데 전혀 지겨운 표정이 아니다.
“네 동생들 기억이 난다. 수덕이, 수철이. 그런데 내가 수미 누나를 굉장히 좋아했었어. 예뻤거든. 현모양처 스타일이었어.”
“큰 누나하고 내가 7살 차이야. 누나가 노래를 잘했어. 나도 너희 택주 누나를 좋아했던 거 알지? 누나가 양장점에서 일했잖아.”
“우리 누나한테 돈 받아 같이 쓰고 재밌었지. 택주 누나가 엄마를 제일 많이 닮았어.”
“택구야. 네 조카 아직도 노래하냐?”
“하이디라고 가수있잖아. ‘지니’라는 노래가 떴었지.”
“맞아. 그런데 노래는 택미 누나가 잘했어. 우리 집도 수철이가 가수가 됐잖아. 택주 누나는 우리가 경기할 때마다 트렁크(권투 반바지)를 기가 막히게 다려준 거 기억나지? 선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쭈글쭈글한 팬티 입는 거 아니냐. 너희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다준 트렁크는 죽여줬어. 천이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게, 우리 둘이 그거 입고 링에 올라가면 기가 막혔어. 4라운드짜리 선수들이 동양챔피언보다도 멋있게 하고 링에 올라갔어.”

‘잔챙이’ 복서 둘은 프로 선수도 같이 된다. 택구 씨가 조금 먼저 프로 데뷔를 하고 홍 전 회장이 데뷔를 했다. 홍 전 회장이 “1969년 5월 10일에 데뷔(상대 김상일·4라운드 무승부)를 했지. 데뷔전 할 때 하도 못해서 아버지가 놀렸어”라고 하자 ‘수환바라기’ 택구 씨가 바닥을 깔아준다.
“난 12번 경기를 했는데 일본에서 두 번 졌어. 한국 타이틀전까지 3번을 졌지. 타이틀전 상대가 나한테 한 번 졌던 친구야. 거기서 지니까 권투를 하기 싫더라고. 나는 너처럼 근성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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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권투 선수로 함께 데뷔했던 둘이 일본 원정 경기를 치르고 오사카 엑스포 박람회를 관람하면서 추억을 남겼다. 홍수환 씨(오른쪽)와 김택구 씨.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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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를 졸업할 무렵 권투를 그만둔 택구 씨는 친구인 홍 전 회장의 열렬한 응원자가 된다. 택구 씨는 인생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는데 그의 아버지 김준호 씨는 트레이너로 홍 전 회장에게 첫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안겨주게 된다.

● 세계 타이틀전 승리 유일하게 믿어준 ‘친구’… 너에게도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하고 싶었던 ‘나’


1971년 한국 밴텀급 챔피언에 이어 이듬해 동양 타이틀을 따낸 홍 전 회장에게 1974년 7월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가 찾아온다. 한국과 동양챔피언이었지만 1973년 태국 원정에서 당시 세계 6위 타놈칫 수코타이(태국)를 8회 KO로 꺾기 전까지 홍수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들던 때가 언제인가요?
“1970년 12월 장충체육관에서 장규철을 이겼을 때죠. (장규철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권투 -54kg급 동메달리스트 출신이다) 그 전에 장규철이 일본 선수와 경기하는 것을 관중석에서 봤어요. 그런데 내 옆에서 경기를 보던 사람들이 ‘홍수환하고 장규철하고 붙으면 누가 이길까’ 내기를 하더라고. 한 양반이 ‘그래도 장규철이 관록이 있잖아’라며 장규철 손을 들어주더라고. 열이 받기도 하고 ‘사람들이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리고 장규철을 이겨버렸지. 거기서 탄력이 붙은 거야.”

수코타이까지 꺾고 세계랭킹에 진입한 홍 전 회장은 군에 입대해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복무를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1년 넘는 기다림 끝에 때마침 세계복싱협회(WBA)밴텀급 챔피언에 오른 아놀드 테일러(남아프리카공화국)가 첫 방어전 상대로 홍 전 회장을 지목했다. 보통 1차 방어는 쉬운 상대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상대를 안방으로 불러들이는 테일러 입장에서 동양 선수가 딱 적당했다. 여러 모로 챔피언이 유리한 조건에서 방어전을 치를 수 있었다. 때문에 국내에서도 홍 전 회장이 이길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의 마음은 당시 어땠을까. 택구 씨는 홍 전 회장보다 1년 정도 앞서 군에 입대했다. 공항에 마중을 나갈 수는 없었다. 택구 씨는 “수환이가 남아공 더반으로 갈 때만 해도 누구 하나 챔피언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권투위원회 관계자도 공항에 오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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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 열린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와 도전자 홍수환의 WBA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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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전 회장은 택구 씨 아버지와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타며 남아공 더반에 도착했다. 몸도 힘든데다 준비는 테일러 사진을 몇 번 본 게 전부다. 홍 전 회장은 “그래도 택구는 자기 아버지가 나를 데려 갔으니 내가 이길 거라고 믿었을 거야”라고 하자 택구 씨도 “맞아. 내가 은근히 신기가 있어. 수환이가 예전에 경기에서 지면 그런가 보다라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는데 이 때는 무조건 이길 것 같더라고. 수환이가 맞은 것보다 더 때릴 거라고 믿었어”라고 말했다.
홍 전 회장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테일러를 시종일관 몰아붙인 끝에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김기수에 이어 한국의 역대 두 번째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위기도 있었다. 11회 테일러의 스트레이트 펀치에 귀가 찢어졌다. 12회 들어 출혈이 그치지 않자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링 닥터와 상처 부위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 사이 완전히 그로기로 몰렸던 테일러는 천금같은 휴식 시간을 벌었다. 닥터가 더 이상 경기 진행이 안 되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거의 손에 넣은 챔피언 벨트를 놓쳐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경기는 한국에서 라디오로만 중계하고 있었어요.
“예수 말씀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있는데 맞는 말이야. 택구 너도 내 경기를 보지 못했지만 믿어줬기 때문에 복을 받았지? 하하. 방송 중계가 안 되니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모를 거야. 당시 링 닥터가 상처를 보더니 너희 아버지를 부르더라고. 선생님이 ‘이거 안 되겠다. 그만두자’ 라고 했으면 지는 거였지. 그런데 ‘다운을 두 번이나 시켰는데 중지하면 쓰냐. 계속 하자’고 밀어붙여주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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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테일러와의 WBA 밴텀급 챔피언타이틀 전이 끝나고 서울에서 슈퍼스타가 된 당시 육군 일병 홍수환의 귀국 축하 카퍼레이드가 열렸다. 홍수환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 옆은 모친 황농선 여사.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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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수환아. 장하다. 대한민국 만세다.”
1974년 7월 4일. 지구 반대편을 오고갔던 홍 전 회장 모자의 전화 통화 대화가 온 국민을 울렸다. 그날 한국에는 비가 촉촉히 왔다. 이날 택구 씨도 부대에서 터질 듯한 감격을 속으로 터트렸다.
“당시 밴텀급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준급 선수들이 즐비했어요. 한국 랭킹에 들면 세계 타이틀전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수들 실력이 좋았죠. 그 중에서 수환이가 가장 먼저 해낸 겁니다. ‘내 친구가 세계 챔피언’이라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고 싶었는데 제 몸은 부대에 있었죠.”
듣고 있던 홍 전 회장도 택구 씨를 위해 아껴놓은 말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솔직히 말할게. 경기 끝나자마자 택구 너한테도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하고 싶었어.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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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역대 두 번째 한국인 세계 쳄피언이 된 홍수환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전 대통령(위 사진)과 육영수 여사의 환대를 받고 있다.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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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버지 같은 친구 아버지

세계 챔피언이 된 홍 전 회장의 귀국길은 출국할 때하고 180도 달랐다. 하루 아침에 슈퍼스타가 된 그는 귀국하자마자 성대한 카퍼레이드 환영을 받았다. 청와대 초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만났다. 격려 하사금은 200만 원이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액수인데 본인은 주변에 조금씩 나눠주고 남은 게 없었다고 한다. 권투 인생이 탄탄대로 펼쳐지는 듯 했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와의 경기 전후로 복잡한 일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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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 4일 홍수환(가운데)이 남아공 더반에서 벌어진 WBA 밴텀급 타이틀 전에서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 아놀드 테일러(오른쪽)를 위로하고 있다. 홍수환의 왼쪽 옆이 김준호 트레이너. 테일러는 1981년 교통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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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전 회장을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 스승, 매니저이자 트레이너였던 택구 씨 아버지와는 1971년 계약 관계를 끊고 잠시 떨어져 있던 기간이 있었다. 가족도 다투는데 물론 서로 소원했던 시간이 있었다. 홍 전 회장은 다른 매니저와 3년 계약을 하고 세계 타이틀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매니저에게서 대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러 이유로 불협화음을 심하게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테일러와의 타이틀 전은 택구 씨 아버지가 다행히 트레이너로 극적으로 합류해 원정에서 함께 감격을 누리긴 했지만 매니저와의 오랜 갈등으로 심적 불안이 컸다.
7월 4일 테일러와 경기가 끝나고도 문제가 생겼다. 기존 매니저의 계약 만료일이 8월 15일이었는데 홍 전 회장은 매니저와 계약 해지를 하고 다시 택구 씨 아버지와 새롭게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배신자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다.

-군인 신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겠어요.
“계약 해지한 날 부대장으로부터 ‘니가 뭔데 마음대로 계약을 깨냐’고 엄청 혼이 났죠. 기존의 매니저는 매스컴을 움직였어요. 여론은 당연히 나한테 불리했죠. 군인 신분이니까 정작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더라고. 홍수환은 배신자라고 난리도 아니었죠. 또 택구 아버지까지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제명을 한 거야. 아버지가 매니저 라이센스를 받아야 하는데 막아버린 거지. 링 위에서도, 링 밖에서도 힘들었죠. 처음 얘기하는건데 그날부터 권투가 하기 싫었어요. 내가 권투를 제일 잘했던 때를 물어보면 ‘아놀드 테일러 경기 때’까지라고 말을 하는데 이 때문이야. 세계 챔피언이 됐는데 계속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이 생겼다니까. 군인 신분으로 운동은 할 수 없는 여건이고, 게다가 동양챔피언만 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절친 홍수환에게 이런 불편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아셨어요?
“내가 몰랐던 얘기가 많네. 내 아버지하고 계약 관계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더 깊숙하게 알고 싶지는 않았죠. 사실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어요. 무서우셨지. 수환이는 당시 비즈니스 체계가 잡힌 구조에서 권투를 했다면 정말 롱런했을 겁니다.”(김택구)

-비즈니스, 선수 보호 개념이 없던 당시 시절이 야속했겠네요.
“테일러를 이기고 택구 아버지하고 팜피치 호텔에 있는데 영국 프로모터가 잠깐만 차 한잔하자 하더라고. 만났더니 “5년 계약하자”며 테이블에 2만 달러를 놓고 가는 거야. 이건 계약금이라고 못을 박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육군 일병이라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었지요.”(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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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구 씨의 아버지로 홍수환을 세계 챔피언으로 이끈 스승인 김준호 매니저(작고). 김 매니저가 홍수환이 슈퍼스타 복서들과 함께 표지에 나온 해외 권투 잡지를 보여주고 있다.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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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아버지이면서 트레이너였던 김준호 선생님에 대해선 만감이 교차하시겠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죠. 여건만 좋았으면 프로모터로도 성공을 하셨을 텐데. 저는 외국에 원정을 가서 세계 챔피언 벨트를 땄잖아요. 선생님은 늘 ‘홍수환이 한국의 초대 세계 챔피언’이라고 치켜세워 주셨죠. 택구 아버지는 멋있는 분이셨습니다. 택구야! 아버지가 가수 현인 선생님하고 무척 닮으셨지? 보고 싶다.”(홍수환)
“택시 타면 기사들도 아버지가 현인 선생님인줄 알았다니까. 아버지가 79살에 돌아가셨는데 우리도 그 나이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김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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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왼쪽)과 스승 김준호 씨. 스승이자 매니저, 트레이너였던 그는 홍수환 권투 인생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홍수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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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인생 ‘첨잔’ 해주자”

1975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WBA 밴텀급 세계타이틀매치 2차 방어전에서 알폰소 사모라(멕시코)에게 4회 KO로 패하며 타이틀을 내준 홍 전 회장. 이후 3년의 절치부심 끝에 그는 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벌어진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를 맞아 2라운드에 4번이나 다운 당한 충격을 이겨내고 3라운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KO승을 거두고 ‘4전 5기’의 기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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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를 맞아 2라운드 4차례 다운을 당했지만 3라운드 기적같은 KO승을 거두고 두 번째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홍수환이 트로피를 들고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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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위성을 통해 방송 중계를 해 부연 설명이 필요없었다. 적지에서 완전 KO패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에서 승부사의 기질을 또 한 번 발휘하며 드라마를 썼다. 홍 전 회장 스스로 “맛이 간 나이”라고 할 만큼 전성기를 지나 기회를 잡은 세계 타이틀전. 이 때도 친구 택수 씨는 친구 수환의 끼와 운을 믿었다.

-이웃 사랑이었을까요?
“하하. 그 중계를 끝까지 본 사람이 몇 안 될 걸요. 나는 영화를 봐도 맨 끝에 제작 관계자 이름 올라가는 자막까지 다 보거든요. 수환이의 작은 것들도 놓치지 않았어요. 경기를 보면서 수환이가 ‘왜 어린 놈한테 수세에 몰리고 맞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4번 쓰러졌는데 설맞은 펀치도 있었거든요. 제가 봤을 때는 상대 펀치가 제대로 꽂히지 않았어요. 결국 수환의 근성이 경기를 뒤집더라고. 운도 따랐지만 ‘주님의 은혜’까지 받았죠.”(김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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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을 4번 쓰러뜨렸지만 KO패를 당하고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파나마의 복싱 영웅 헥토르 카라스키야(오른쪽). 세기의 대결 40주년을 맞아 내한해 홍수환 전 회장과 우정을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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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분석, 인정하십니까?
“택구야, 두 번째 다운됐을 때는 제대로 맞았어. 나도 한국에 와서 영상을 보니 완벽하게 걸렸더라고. 비밀이 하나 있는데 지금 돌아다니는 경기 영상에는 내가 4번 다운되고 바로 3라운드에 KO로 이기는 장면으로 이어져. 그런데 사실 4번 쓰러지고 종 울릴 때까지 엄청 더 많이 맞았어. 심판이 끊어도 할 말이 없었지. 수건을 던지려고 했어. 그래도 파나마 독립기념일 전날에 자국 권투 선수를 어쨌든 기가 막히게 역전해서 때려눕힌 거 아니냐. 그 때 카라스키야가 17살인데 11전 11승 11KO였어. 지금 봐도 주먹이 내 두 배야. 파나마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 했고, 지금은 시장이야. 대통령 선거에도 나간대. 지금도 나를 보면 자기가 이겼다고 해. 4-1로. 하하. 카라스키야가 대통령이 되면 파나마에서 살아볼 생각도 있어.”(홍수환)

운명이 걸린 권투 인생 결정적인 순간마다 마음의 지킴이, 무조건 친구 편이 돼준 택구 씨가 그저 고맙다. 막걸리 한 잔을 택구 씨에게 따라주던 홍 전 회장은 “우리나라에도 첨잔 문화가 있어야 돼. 대부분 잔을 다 비워야 술을 따라주잖아. 우리도 서로 거덜나기 전에 도와주자고”라고 의지를 다져본다. 이미 본인은 택구 씨에게 진 마음의 빚을 어떤 식으로든 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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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홍수환 없이 못 살아” “그래 홍수환이 나의 보약이다”. 평생 인연으로 만나자고 대동단결한 두 사람이 셀카를 찍고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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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죠?
“베트남에 갔다가 정말 우연하게 수환이를 만났는데 바로 주머니에 있는 베트남 돈을 전부 주는 거예요. 꽤 많은 돈을. 아직도 그 돈 쓰고 남아 있어요.”(김택구)
“얘 이빨이 보통 이빨이 아니야.”(홍수환)
“아, 내 치아 교정한 것도 수환이가 해줬어요. 내가 장난으로 돈 없다고 하니까 바로 결제를 해버리더라고요.”(김택구)
“그게 뭐 어렵냐. 카드 할부로 긁었지.”(홍수환)
“내가 강연은 가끔 소개하잖아. 앞으로 강연료 받으면 33% 떼어줄 마음은 있는거지? 하하”(김택구)

‘오는 정 가는 정’이 난무(?)하는 가운데 홍 전 회장은 앞으로 택구 씨가 ‘챔피언 홍수환’의 ‘찐 친구’로 알려졌으면 한다. 친구에게 받기만 한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다. 내 뒤에만 있던 택구가 아닌 옆에 서 있는 택구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단다.
“오늘 강연을 하고 왔는데 마지막에 한 얘기가 있어요. 예전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 시간을 아낍시다’라고요. 나는 앞으로 시간을 아껴 택구에게 집중할 겁니다. 그러다보면 80대 중반까지는 건강하게 만날 힘이 생길 것 같네요. 택구야! 우리는 오래 살 거야.”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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