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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소진증후군 사회’ 당신의 기력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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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에서 일하는 김도헌씨(31)는 매일 출근길에 에너지음료를 들고 집을 나선다.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로 피로해 자칫 운전 중 사고라도 낼까 두렵기 때문이다. 빈 속에 카페인을 들이부은 셈이지만 내성이 생겨서인지 효과는 오전을 넘기지 못한다.

오후를 지나 밤중까지 이어지는 야근을 견디려면 커피를 두세 잔은 마셔야 졸음을 쫓고 쌓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정작 집에 돌아가서는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지쳐버렸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못하는 술이지만 조금이라도 마셔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다.

퇴근이 이른 날은 한 달에 서너 번을 꼽기 힘들지만 이런 날엔 어김없이 회식 계획이 잡혀 있다. 전형적인 한국의 직장문화다. 최근 연달아 개장하는 신규 점포에 관한 마케팅 기획을 짜야 하고, 기존 점포의 판매행사도 김씨 손을 거쳐야 하지만 그에겐 지금 ‘사수’도 ‘부사수’도 없다.

“휴일만 되면 퓨즈가 끊어진 것 같다”

각 매장마다 담당자가 있지만 본사에는 모든 매장의 마케팅·홍보업무를 총괄하는 김씨 혼자뿐이다. 인력을 늘려달라는 요청은 위계질서가 강한 회사 분위기 때문에 부장 이상으로는 전달되지도 못하는 듯하다. 역시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 직장 선임이 이직한 뒤로 김씨는 1년 가까이 우울한 심경에 시달린다. 이젠 가끔씩 실제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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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한 건물에서 야근을 계속하는 사무실의 조명이 꺼지지 않고 있다.|강윤중 기자


“직장 상사건, 주위 사람들이건 일이 많아 힘들다고 해도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라며 조금만 더 참으라고 한다. 어쩔 수 없으니까 일은 하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몸이 버텨주기는 할지 짐작도 못하겠다.”

명목상 일주일에 하루 휴일은 있지만 마음 편히 쉬지는 못한다.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책상 앞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김씨는 “휴일만 되면 퓨즈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더 이상 갈아끼울 퓨즈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 앞에서 일 생각에 눌린 채 휴일은 지나가버린다. “휴일 전날 술 몇 잔만 마셔도 뻗어버리고, 깨보면 점심 때가 지나 있다. 그럼 오후부터는 내일 어떻게 출근하나 하는 걱정으로 하루를 다 보낸다.”

소진증후군이란 육체적·정신적인 피로가 쌓여 일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어버리는 증상을 뜻한다. 장시간 반복적으로 기력을 소모한 탓에 활동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리는 것이 원인이다. ‘번아웃’(burnout)이란 원래의 용어대로 연료가 다 타버린듯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의욕도 잃은 무기력한 상태를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지쳐 나가떨어진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용어는 아니지만, 노동·생산·복지 같은 사회적 관계를 다루는 경영학·사회학·사회복지학에서 현대의 병리적 징후를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돼 왔다.

몸이 결국 못 버티는 ‘과사용증후군’

한 의류업체의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조덕균씨(48) 역시 부쩍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 날이 늘었다. 조씨의 일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새로 들어오는 입고 물량은 포장과 분류를 다시해 쌓고, 팔려나갈 물건들을 골라 화물차에 실어보내는 일이다. 창고가 좁아 적재 팔레트 사이 간격도 좁고 쌓는 높이는 키를 훌쩍 넘긴다. 지게차 없이 인력으로 모든 짐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여름철이면 가장 아래층에 깔린 박스가 습기로 눅눅해져 버티는 힘을 잃고 넘어져 다시 쌓아야 한다. 하지만 조씨가 지친 이유는 일의 내용 때문은 아니었다.

조씨의 직장은 올해 초부터 일종의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창고에서 출고된 물건이 잘 팔리면 월급을 더 받고 덜 팔리면 덜 받는 식이다. 창고에 쌓인 의류는 최소 1~2년은 지난 재고물건이기 때문에 상당수는 이른바 ‘땡처리’ 행사물품으로 나가거나 때로는 대형마트의 단기행사용으로도 나간다. 회사는 단순히 성과급제만 도입한 것이 아니라 유통속도를 높인다며 입·출고량을 크게 늘렸고 그동안은 드물던 야근이 매일 반복됐다. 지난해까진 대략 하루에 200개 정도 나르던 박스의 수가 올해는 400개 정도로 늘었다. 한 박스당 30~40㎏까지 나간다. 몸으로 하는 일이어서 퇴근이 가까워 올 때면 허리를 펴기조차 힘들 정도로 피로가 쌓였다.

만성적 소진 증상이 사망률 높여

결국 10년 가까이 일한 조씨도 이번 여름엔 더 버티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졌다. ‘과사용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들었다. 조씨는 “팔리는 대로 돈을 준다는 방식에 토는 못달겠지만, 돈 몇 푼을 더 주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을 만큼 일을 시켜야지. 그리고 딱히 월급이 늘지도 않았어. 장사 안 되는 달엔 오히려 줄었지”라며 분해 했다.

김씨와 조씨 모두 과도한 업무량에 비해 한정된 인력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체력도 의욕도 고갈되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죽도록 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마 두 사람에게 ‘죽도록’ 일하면 실제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지난 6월 소개한 핀란드의 연구논문 ‘산업 노동자의 총 사망률 예측변수로서의 소진현상’은 10년 이상의 추적연구를 통해 일시적인 피로가 아닌 만성적인 소진 증상이 사망률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특히 소진 증상의 대표적인 지표인 ‘고갈’ 경험이 높을수록 사망률이 높게 나타난다. 장시간의 노동과 휴식의 부족은 건강뿐 아니라 생존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노동의 양뿐만 아니라 질적인 부분도 문제가 된다. 위 논문에 따르면 고갈 경험 다음으로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는 지표는 일과 관련된 냉소적 태도다. 유희문씨(가명·41)의 경우 반복되는 장기적인 실적 압박 때문에 “업무 보기가 지긋지긋하다”고 할 정도로 냉소적으로 변했다. 한 이동통신사의 지역지사에서 판매·영업 관리업무를 맡고 있는 유씨의 주된 업무는 담당 직영점·대리점의 판매원들을 관리하고 더 많은 실적을 내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매일 그날의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일의 특성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는 실적 압박을 부하직원과 판매원들에게 전하는 일과가 지겹도록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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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금융회사가 몰려 있는 서울 명동 거리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김문석 기자


이 업종에서만 13년째 일한 유씨는 계절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의 보조금 단속과 맞물린 본사 정책에 따라 판매량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업계의 생리를 몸으로 익혔다. 전날이면 나오는 판매정책을 보면 당장 내일 몇 대가 팔릴지 감이 올 정도다. “일의 내용은 뻔히 눈에 들어오지만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새로 판촉 기획안을 짜는 것도 작년에 하던대로 하고, 판매원들 닦달하는 레퍼토리도 입에 붙은 말만 되풀이한다. 위에서 쪼는 소리는 매일 수도 없이 듣지만 들어도 뭘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시간만 버티자’ 하는 생각으로 넘겨버린다.”

휴대전화 개통 전산이 마감되는 오후 8시부터 직원들과 그날 성과를 확인하고 다음날 영업을 위한 회의를 해야 하지만 유씨에겐 귀찮다는 생각뿐이다. 유씨는 사실 업무내용이 크게 힘든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하는 일 없이 지치고 아무리 의욕을 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다. “몇 년 전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한창 잘 나갈 때 회사에서 우수사원을 도요타 본사까지 보내 영업기법을 배워오라고 한 일이 있다. 지금은 그때 배운 내용도 기억 안 나지만 회사 분위기가 바뀐 것은 기억난다. 거창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지시사항을 위에서 내려보냈지만 실제 판매현장에서는 그저 판매원들을 더 세게 쪼도록 만든 것, 그게 전부다.” 이전까지 의욕이 넘쳐 좋은 실적을 내던 유씨의 태도가 바뀐 것도 그 무렵부터다.

소진증후군의 주요 증상인 의욕 상실과 무력감에 대한 원인은 다양하다. 육체적인 피로가 누적되는 데서 소진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성과 중심의 조직 분위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나머지 심리적으로 탈진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유씨 역시 거듭되는 실적 압박과 ‘아무리 애써봐야 안 될 건 안 된다’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다.

성과중심 분위기에 심리적으로도 탈진

소진증후군의 결과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산성 저하와 같은 산업 전반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투입되는 노동시간 대비 낮은 생산성의 문제 역시 노동의 재생산에 필요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박상언 충북대 교수(경영학)는 “직무소진은 개인 차원에서 불안과 우울, 자존심의 저하 등은 물론 심할 경우 심장병과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을 초래하는 등 심리적·육체적으로 다양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며 “조직에도 사원들의 이직 및 근태율의 증가와 생산성의 감소, 직무 만족 및 조직 몰입의 저하 등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진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반영하듯 최근 3년간 국내 에너지음료 시장은 급성장해 왔다. 2011년 300억원 규모이던 시장은 지난해 1000억원이 넘는 규모로까지 커졌다. 고카페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는 올해 시장 규모도 지난해에 비해 2배 정도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수입산인 ‘레드불’을 비롯해 롯데칠성음료의 ‘핫식스’, 코카콜라의 ‘번 인텐스’ 등 한 캔에 60㎎ 안팎의 카페인을 함유한 에너지음료는 전체 기능성 음료 시장의 약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이러한 에너지음료 시장의 확대가 소진을 조장하는 사회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단순히 한국의 노동시간이 길다는 것뿐 아니라 조직과 일상생활에서 강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복잡한 대인관계 때문에 조직의 구성원은 더 피로해지고 감정적인 면에서 기력이 고갈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퇴근 후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문화와 개인의 여가 부족은 에너지 음료를 마시면서까지 직장에서 더 오래 버텨야 하는 조직문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했다.



“직무소진에 노출된 감정노동자 이직 희망 높아”



소진, 특히 직장에서의 근무환경과 관련한 직무소진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직무소진을 직무 스트레스와는 구분한다. 직무소진이 스트레스의 한 형태이지만, 스트레스는 단기적으로 업무 효율을 높이는 등 긍정적인 요소도 포함된 것인 데 비해 직무소진은 업무 수행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일컫는다. 직무소진은 크게 정서적 소진, 비인간화, 개인적 성취감 저하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된다. 정서적 소진이 긴장·불안·우울 등 만성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라면, 비인간화는 고객 또는 직장동료 등 업무상의 관계에서 사람들을 사물처럼 냉담하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 결과로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성취감이 떨어지고 이는 조직이나 산업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까지 이어진다.

직무소진에 관한 연구들의 대부분은 보건·복지·대인서비스 등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직종에 집중돼 있다. 이들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직무소진이 현재의 직장으로부터 이직하고자 하는 의사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업종은 간호사로, 인제대 성미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간호사의 이직 의사가 다른 보건분야 직종에 비해 높게 나타난 이유로 정서적인 소진과 함께 맡은 업무가 과다해 과부하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보육교사와 사회복지사, 호텔 노동자 등 감정노동을 주로 수행하고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직종에서 이와 유사한 경향이 드러났다.

그러나 감정노동자들의 이직 의사가 다른 직종에 비해 높게 나타난 데 비해 실제 이직률은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직종에서 오히려 낮게 나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이직률은 2009년 하반기 3.6%에 비해 3년 후인 지난해 하반기에 4.1%로 다소 높아졌지만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분야의 이직률은 같은 기간 2.9%에서 2.8%로 오히려 낮아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고용관계에 있어 약자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이직이 쉽지 않은 감정노동 일자리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이주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는 “전체 산업의 측면에서 보면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감정노동이 확산됐고, 소비자의 만족을 위해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직종에서 소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비중도 늘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직장 내 위계질서뿐 아니라 소비자를 상대로 한 서비스 내용까지 차후 계약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노동자들은 직무소진을 경험할 가능성은 높지만 경제적 사정 때문에 이직을 실행하기는 어려운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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