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은 경상수지 용어도 몰랐지만 사람 끌어당기는데 탁월"
"김대중, 아는것 많고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김종필은 독한데 없고, 삼촌이나 작은아버지로 괜찮은 사람"
[※ 편집자 주= 박찬종 변호사의 인터뷰 기사는 두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두 번째 인터뷰 기사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주로 다루는 내용으로 다음 주중 송고될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박찬종(84) 변호사는 지난 1973년 이후 지금까지 50년 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80을 넘은 나이인데도 정치 현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역대 대통령 모두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만나려 했다"면서 "전두환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면서 평양방문을 강력히 희망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북한을 방문을 시도하는 것에는 통치 기반 구축에 유리하다는 계산과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했다.
그는 "재임 기간의 성과를 보면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것이 없다"면서 "5년 단임제로는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196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4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3년 9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10대,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권 특위 위원장, 1987년 통일민주당 정책위원장, 1996년 신한국당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 고문 등을 지냈다.
현재는 유튜브 '박찬종 TV'를 통해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출연해 정치 현안을 분석하고 있다.
--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 1939년 4월 19일 부산시 서구 남부민 2동에서 태어났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중졸 출신의 은행원이었는데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무렵에 그만뒀다. 그 이후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진주여고를 졸업한 어머니는 일본에서 초급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사가 됐다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전업 가정주부로 살았다. 어머니가 교사 생활을 한 것은 6년 정도다.
▲ 아버지는 은행을 그만두시고 지역의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돕는 일도 하셨다. 그러니 나는 보통의 가정에서 지극히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자식 교육에서는 엄격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내 공부방에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을 정도다.
-- 고등학생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면 생활 형편이 괜찮았던 것 아닌가.
▲ 부산의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하숙도 하고 친구들 3명과 자취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하숙비를 제때 주시지 못하니 걱정이 됐던지 한 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셨다.
▲ 아버지가 보낸 편지 중에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 학약불성사불환(學若不成死不還) 매골대기선묘지(埋骨豈期先墓地)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라는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남자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면, 학문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경우 죽어도 안 돌아온다. 어찌 나의 뼈를 선영에 묻을 것을 기약할까. 인간 가는 곳이 모두 청산인 것을'이라는 의미다.
-- 중학교 시절에 총학생회장이었다고 하던데.
▲ 나는 직선제 2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때 4명이 입후보했는데, 내가 과반수 표를 얻었다. 당시 경쟁자 중 1명이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광일(작고)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월요일 전교생이 참여하는 조회 시간에 교장 다음으로 훈화했다.
-- 그때부터 정치에 뜻을 뒀나.
▲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국회의원 선거 합동 연설회가 있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후보자들이 연설을 잘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여당 후보는 원고를 그냥 읽었고, 야당 후보는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나이 스물여섯이 되면 총각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만 33세였고, 그때 자녀들도 3명 두고 있었다.
-- 왜 상과대학에 진학했나.
▲ 나는 원래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계획이었으나 차질이 생겼다. 법과대학 입시시험 선택과목은 독일어, 불어, 세계사였기에 나는 세계사를 공부했는데, 시험 직전에 발표된 입시요강에서 세계사가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상업경제' 과목을 선택해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했는데, 왜 여러 시험에 도전했나.
▲ 창피한 이야기다. 지금 같으면 고시를 안 본다. 내 적성은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당시에 상경대학을 나와서 취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최고의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는데, 불과 25명을 뽑았다. 재벌기업이 몇 개 있었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국가가 주는 면허를 갖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기에 3학년 1학기 때 최연소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사시를 패스한 사람은 31명이었다. 1년 후인 4학년 때에는 행정고시에 붙었고, 공인회계사 시험은 군대에 가서 합격했다.
-- 군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나.
▲ 어느 날 육군 헌병 중위와 경찰관이 우리 집을 찾아와 부모님이 놀란 일이 있었다. 내가 어디서 사고를 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들어보니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나에게 육군 법무관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육군으로 가기 싫어서 해군 법무관에 지원했다. 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할 때 담당할 사건이 없어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의 일부 과목이 헌법, 상법 등으로 행시 과목과 겹쳤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그 자격증 덕에 나는 1976년부터 4년간 공인회계사회 회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 관료가 될 생각은 없었나.
▲ 나는 경제학과 출신이어서 법조인보다는 재무직 관료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시 동기생들이 이미 재무부(현 재정경제부)에서 서기관이 돼 있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면 나의 3년 4개월의 군 경력은 인정되지 않아 초임 사무관으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검찰로 방향을 틀었다.
-- 행시 동기들은 어떻게 됐나.
▲ 행시 동기는 모두 60명 정도 되는데 장관 16명, 총리 1명이 나왔다. 고 건 총리가 행시 동기인데, 고등학교와 대학교 2년 선배다. 나는 행정관료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 어려울 때 백범일지를 자주 읽었다고 하던데.
▲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어렵게 임시정부를 유지했다. 미국 하와이에서 송금되는 돈을 한복 소맷자락에 넣은 뒤 꿰매고 다녔다. 특별할 때만 쓰기 위한 것이었다. 백범일지는 개인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줬기에 나는 자주 읽었다. 백범일지는 아들에게 주는 글의 형식인데도 솔직한 내용을 담았다.
-- 어떤 점에서 솔직하다는 것인가.
▲ 김구 선생은 중국 난징의 양쯔강 배에서 숨어 지낼 때 주애보라는 중국 여자 사공과 부부처럼 살았다. 그 여자와 헤어질 때는 서운한 마음에서 갖고 있던 돈을 줬다고 했다. 이런 여자관계는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김구 선생처럼 솔직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지독한 파벌 싸움이다.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글을 보면, 임정의 파벌이 얼마나 심각한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폭파하고 싶다고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어렵게 상하이 임정을 찾아갔더니 파벌들이 서로 끌어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파벌 싸움을 했나.
▲ 인간사회는 원래 그런 것이다. 지금은 안 그런가? 여야가 지금 그렇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 역대 남한 대통령들이 평양 가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한국에서는 대통령직에 도전하거나 대통령이 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북한 증후군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려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들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평양에 가서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고, 함께 사진을 찍어 공개하면 통일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평양방문을 자기의 지지기반과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도구로 생각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 거의 모든 대통령이 평양행을 희망했나.
▲ 전두환은 어마무시하게 김일성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장세동 안기부장을 평양에 보내서 뭐든지 줄 테니 만나자고 했다. 당시 김일성은 전두환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임사를 발표할 때 나는 바로 뒤에 앉아서 들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북한이 원하는 데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94년 8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김일성이 7월 말에 사망했다. 김영삼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했다. 만약 김영삼이 김일성을 만났다면 노벨평화상은 그에게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명박도 남북 정상회담을 모색하다 싱가포르 회의에서 펑크났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시절 평양방문을 추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실제로 평양에 가는 데 성공한 사람은.
▲ 김대중은 거액의 달러를 김정일에게 주고 정상회담을 했고, 노무현도 평양을 방문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되기 전인 2002년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문재인의 방북은 이미 국민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성과를 낸 사람은 누구인가.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 이 고립된 작은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그의 공로다. 집권 말기에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은 과오다.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의 공(功) 과(過) 비율이 9대 1이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이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는 것인가.
▲ 박정희는 우리나라 산업기반을 다졌다.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등이 한국의 산업 기반인데, 이는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전략 때문에 가능했다. 유신을 선포한 것은 잘못이다. 나는 박정희 공과가 역시 9대 1 정도로 생각한다.
-- 성과가 있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가려지는 것 아닌가.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은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진행하면서 수천만 명을 죽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중국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모두 황폐화했다. 제자가 스승을 두들겨 패고, 아들이 아버지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이런 모택동에 대해 덩샤오핑은 7대 3으로 공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아들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난동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마오쩌둥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해준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잘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 그 이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 그다음의 대통령들은 공과를 평가할 정도가 못 된다. 국가의 장기 발전 계획이라는 것이 없었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에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기가 많이 올라갔지만,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식(김현철)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김대중과 노무현도 김정일을 만난 것 외에는 재임 중 이뤄낸 게 없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당시에는 청계천을 남겼지만, 대통령 시절에는 내놓은 게 없다. 탄핵당한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은 광주 문제를 일으켰고, 노태우도 군사정권이었다.
-- 박정희의 공(功)이 가장 크다는 것인가.
▲ 역대 대통령들이 박정희가 만든 기반을 철저하게 다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박정희가 워낙 견고하게 터를 만들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그때 이후 정권이 아닌 민간이 움직이는 나라다.
-- 본인이 대통령이어도 5년 임기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 내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패했을 것이다. 5년 임기 가운데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에 뭔가를 이뤄내기가 쉽지 않다. 박정희가 성과를 냈던 것은 장기 집권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박정희는 시간 외에 식견과 추진력도 갖췄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헬리콥터를 수십 번 타고 답사해 직접 노선을 그린 사람이다. 어떤 문중이 자기들 땅 앞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둘러보고는 방향을 수정하도록 했다.
-- 김영삼은 어떤 사람인가.
▲ 그는 김대중과 원내 대표 경쟁을 네 번 했는데 모두 이겼다. 사람을 끄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몰랐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같은 경제용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에 가입하려면 외환의 문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이 경상수지 악화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한테 직접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이 경제를 제대로 알았다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 경제관료들은 김영삼에게 아무 말도 안 했나.
▲ 나는 김영삼과 만만한 사이다. 부산에서 동반 출마해서 당선된 적이 있고, 민추협 시절에는 그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많이 했기에 그런 관계가 됐다. 나는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였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김영삼이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화를 내니 관료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 김영삼에게 인간적 매력은 있었나.
▲ 사람을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이 하니 사람을 끌었다. 밥을 먹으면서 상대방의 심기를 살필 줄 알았다.
-- 김대중은 어떠했나.
▲ 김영삼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드라이한(건조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 명이 식사하러 가면 김영삼은 다른 사람한테 돈을 줘서 계산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카운터에 걸어가서 "얼마요?" 하면서 돈을 직접 헤아려 줬다. 두 사람은 그런 차이가 있다.
-- 본인은 김대중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 총재였던 이민우 파동으로 신한민주당이 해체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김영삼이 총재, 김대중이 고문이었다. 당시 주요 당직자 인사안은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이 반반씩 나눠 가지는 내용이었는데,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당시 나는 김영삼 계열이었는데, 김대중이 김영삼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박찬종을 넣으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 덕분에 정책위 의장이 됐다.
-- 알려진 대로 김대중은 지적인 사람인가.
▲ 몇 차례 김대중과 단둘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김영삼과 다른 면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둘이 마주 앉았다. 김영삼이 "니는 말이다, 쉬운 걸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노?"라고 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거시기 말이여, 자네는 너무 쉽게 생각한당께"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외환 문제로 인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하자는 의견을 내면 김영삼은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역정을 내겠지만 김대중은 "다시 한번 이야기해봐"라고 한 뒤 들어보고는 "그것도 그럴 것 같네. 좀 생각해보자"라고 물러설 사람이다.
-- 김종필은 어떤 사람이었나.
▲ 그와는 중첩적인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룬 공의 절반은 김종필의 몫이다. 그는 박 정권 탄생의 주역이었다. 5·16쿠데타의 구체적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독한 데가 없는 사람으로 유연성을 갖췄다. 그가 나의 큰 형님이나 작은아버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1985년 9월 고려대 앞 시위 때문에 고생했는데.
▲ 당시 대학생 연합조직인 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가 고대에서 개헌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하니 참여하라는 문서를 민정당과 신민당에 보냈다. 내가 당시 신민당 개헌특위 간사인 데다 인권위원장이어서 당시 성북구를 지역구로 둔 조순형 의원과 함께 고대 앞으로 갔다. 당원 50명도 동행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차단돼 그곳에서 비를 맞으며 4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 장면을 대통령 전두환이 TV로 봤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나를 미워했기에 나를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됐고, 고등법원에 가서야 무죄판결을 받았다.
-- 왜 전두환으로부터 평소에 미움을 받았나.
▲ 장영자 사건으로 11개 부처 장관을 바꿀 때 전두환은 입각을 제안했다. 외무와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고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시위 학생들을 변론하러 다녔다. 고대 시위사건 전인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삼민투의 학생들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 미문화원 근방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사무실이 있었는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 나는 미문화원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에 창문을 통해 학생들과 대화했다. 그때 한 신문사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학생 선동하는 박찬종'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 학생들은 농성을 언제 풀었나.
▲ 김대중은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그는 "사흘 후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북측 대표가 내려오는데, 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전에 농성을 풀어야 한다"면서 그 메시지를 학생들한테 전하라고 했다. 학생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진해서 농성장을 나왔다. 나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변론을 맡았다.
-- 삶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 국회의원 될 무렵부터 '강한 데는 강하고, 약한 데는 약하게'라는 원칙을 갖고 있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나는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잘하는 편이다. 단점으로는 내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사소한 일로 손해 보는 일이 적지 않다.
-- 본인은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나.
▲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용기가 있고 결단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손해 볼 일도 할 일은 한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택시를 타면 나를 알아보는 운전기사가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요금을 받지 않으려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과거의 정치인을 기억해주시는 시민에게 감사한다. '박찬종 TV'를 열심히 보면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도 고맙게 생각한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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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변호사 |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박찬종(84) 변호사는 지난 1973년 이후 지금까지 50년 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80을 넘은 나이인데도 정치 현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역대 대통령 모두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만나려 했다"면서 "전두환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면서 평양방문을 강력히 희망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북한을 방문을 시도하는 것에는 통치 기반 구축에 유리하다는 계산과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김영삼은 경제를 잘 몰랐기에 외환위기를 맞은 측면이 있으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탁월했다"면서 "김대중은 아는 것이 많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재임 기간의 성과를 보면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것이 없다"면서 "5년 단임제로는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196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4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3년 9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10대,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권 특위 위원장, 1987년 통일민주당 정책위원장, 1996년 신한국당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 고문 등을 지냈다.
현재는 유튜브 '박찬종 TV'를 통해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출연해 정치 현안을 분석하고 있다.
2019년 대한민국 위기 극복 대토론회 참석한 박찬종 변호사(오른쪽 검은테 안경 쓴 사람) |
--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 1939년 4월 19일 부산시 서구 남부민 2동에서 태어났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중졸 출신의 은행원이었는데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무렵에 그만뒀다. 그 이후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진주여고를 졸업한 어머니는 일본에서 초급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사가 됐다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전업 가정주부로 살았다. 어머니가 교사 생활을 한 것은 6년 정도다.
-- 집안 형편이 어려웠나.
▲ 아버지는 은행을 그만두시고 지역의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돕는 일도 하셨다. 그러니 나는 보통의 가정에서 지극히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자식 교육에서는 엄격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내 공부방에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을 정도다.
-- 고등학생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면 생활 형편이 괜찮았던 것 아닌가.
▲ 부산의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하숙도 하고 친구들 3명과 자취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하숙비를 제때 주시지 못하니 걱정이 됐던지 한 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셨다.
-- 편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 아버지가 보낸 편지 중에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 학약불성사불환(學若不成死不還) 매골대기선묘지(埋骨豈期先墓地)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라는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남자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면, 학문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경우 죽어도 안 돌아온다. 어찌 나의 뼈를 선영에 묻을 것을 기약할까. 인간 가는 곳이 모두 청산인 것을'이라는 의미다.
1985년 2월 두건에 상복 차림으로 연설하는 국회의원 후보자 |
-- 중학교 시절에 총학생회장이었다고 하던데.
▲ 나는 직선제 2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때 4명이 입후보했는데, 내가 과반수 표를 얻었다. 당시 경쟁자 중 1명이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광일(작고)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월요일 전교생이 참여하는 조회 시간에 교장 다음으로 훈화했다.
-- 그때부터 정치에 뜻을 뒀나.
▲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국회의원 선거 합동 연설회가 있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후보자들이 연설을 잘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여당 후보는 원고를 그냥 읽었고, 야당 후보는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나이 스물여섯이 되면 총각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만 33세였고, 그때 자녀들도 3명 두고 있었다.
-- 왜 상과대학에 진학했나.
▲ 나는 원래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계획이었으나 차질이 생겼다. 법과대학 입시시험 선택과목은 독일어, 불어, 세계사였기에 나는 세계사를 공부했는데, 시험 직전에 발표된 입시요강에서 세계사가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상업경제' 과목을 선택해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변호사 |
--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했는데, 왜 여러 시험에 도전했나.
▲ 창피한 이야기다. 지금 같으면 고시를 안 본다. 내 적성은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당시에 상경대학을 나와서 취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최고의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는데, 불과 25명을 뽑았다. 재벌기업이 몇 개 있었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국가가 주는 면허를 갖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기에 3학년 1학기 때 최연소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사시를 패스한 사람은 31명이었다. 1년 후인 4학년 때에는 행정고시에 붙었고, 공인회계사 시험은 군대에 가서 합격했다.
-- 군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나.
▲ 어느 날 육군 헌병 중위와 경찰관이 우리 집을 찾아와 부모님이 놀란 일이 있었다. 내가 어디서 사고를 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들어보니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나에게 육군 법무관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육군으로 가기 싫어서 해군 법무관에 지원했다. 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할 때 담당할 사건이 없어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의 일부 과목이 헌법, 상법 등으로 행시 과목과 겹쳤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그 자격증 덕에 나는 1976년부터 4년간 공인회계사회 회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 관료가 될 생각은 없었나.
▲ 나는 경제학과 출신이어서 법조인보다는 재무직 관료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시 동기생들이 이미 재무부(현 재정경제부)에서 서기관이 돼 있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면 나의 3년 4개월의 군 경력은 인정되지 않아 초임 사무관으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검찰로 방향을 틀었다.
-- 행시 동기들은 어떻게 됐나.
▲ 행시 동기는 모두 60명 정도 되는데 장관 16명, 총리 1명이 나왔다. 고 건 총리가 행시 동기인데, 고등학교와 대학교 2년 선배다. 나는 행정관료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승만(왼쪽)과 김구(오른쪽) |
-- 어려울 때 백범일지를 자주 읽었다고 하던데.
▲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어렵게 임시정부를 유지했다. 미국 하와이에서 송금되는 돈을 한복 소맷자락에 넣은 뒤 꿰매고 다녔다. 특별할 때만 쓰기 위한 것이었다. 백범일지는 개인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줬기에 나는 자주 읽었다. 백범일지는 아들에게 주는 글의 형식인데도 솔직한 내용을 담았다.
-- 어떤 점에서 솔직하다는 것인가.
▲ 김구 선생은 중국 난징의 양쯔강 배에서 숨어 지낼 때 주애보라는 중국 여자 사공과 부부처럼 살았다. 그 여자와 헤어질 때는 서운한 마음에서 갖고 있던 돈을 줬다고 했다. 이런 여자관계는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김구 선생처럼 솔직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지독한 파벌 싸움이다.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글을 보면, 임정의 파벌이 얼마나 심각한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폭파하고 싶다고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어렵게 상하이 임정을 찾아갔더니 파벌들이 서로 끌어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파벌 싸움을 했나.
▲ 인간사회는 원래 그런 것이다. 지금은 안 그런가? 여야가 지금 그렇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2002년 5월 평양에서 만찬장으로 향하는 박근혜와 김정일 |
-- 역대 남한 대통령들이 평양 가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한국에서는 대통령직에 도전하거나 대통령이 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북한 증후군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려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들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평양에 가서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고, 함께 사진을 찍어 공개하면 통일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평양방문을 자기의 지지기반과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도구로 생각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 거의 모든 대통령이 평양행을 희망했나.
▲ 전두환은 어마무시하게 김일성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장세동 안기부장을 평양에 보내서 뭐든지 줄 테니 만나자고 했다. 당시 김일성은 전두환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임사를 발표할 때 나는 바로 뒤에 앉아서 들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북한이 원하는 데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94년 8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김일성이 7월 말에 사망했다. 김영삼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했다. 만약 김영삼이 김일성을 만났다면 노벨평화상은 그에게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명박도 남북 정상회담을 모색하다 싱가포르 회의에서 펑크났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시절 평양방문을 추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실제로 평양에 가는 데 성공한 사람은.
▲ 김대중은 거액의 달러를 김정일에게 주고 정상회담을 했고, 노무현도 평양을 방문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되기 전인 2002년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문재인의 방북은 이미 국민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1979년 1월 농촌에서 박정희(오른쪽 모자 쓴 사람) |
--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성과를 낸 사람은 누구인가.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 이 고립된 작은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그의 공로다. 집권 말기에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은 과오다.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의 공(功) 과(過) 비율이 9대 1이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이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는 것인가.
▲ 박정희는 우리나라 산업기반을 다졌다.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등이 한국의 산업 기반인데, 이는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전략 때문에 가능했다. 유신을 선포한 것은 잘못이다. 나는 박정희 공과가 역시 9대 1 정도로 생각한다.
-- 성과가 있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가려지는 것 아닌가.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은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진행하면서 수천만 명을 죽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중국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모두 황폐화했다. 제자가 스승을 두들겨 패고, 아들이 아버지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이런 모택동에 대해 덩샤오핑은 7대 3으로 공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아들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난동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마오쩌둥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해준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잘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평양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
-- 그 이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 그다음의 대통령들은 공과를 평가할 정도가 못 된다. 국가의 장기 발전 계획이라는 것이 없었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에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기가 많이 올라갔지만,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식(김현철)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김대중과 노무현도 김정일을 만난 것 외에는 재임 중 이뤄낸 게 없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당시에는 청계천을 남겼지만, 대통령 시절에는 내놓은 게 없다. 탄핵당한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은 광주 문제를 일으켰고, 노태우도 군사정권이었다.
-- 박정희의 공(功)이 가장 크다는 것인가.
▲ 역대 대통령들이 박정희가 만든 기반을 철저하게 다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박정희가 워낙 견고하게 터를 만들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그때 이후 정권이 아닌 민간이 움직이는 나라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당시 IMF의 지원을 발표하는 당시 임창렬 부총리 |
-- 본인이 대통령이어도 5년 임기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 내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패했을 것이다. 5년 임기 가운데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에 뭔가를 이뤄내기가 쉽지 않다. 박정희가 성과를 냈던 것은 장기 집권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박정희는 시간 외에 식견과 추진력도 갖췄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헬리콥터를 수십 번 타고 답사해 직접 노선을 그린 사람이다. 어떤 문중이 자기들 땅 앞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둘러보고는 방향을 수정하도록 했다.
-- 김영삼은 어떤 사람인가.
▲ 그는 김대중과 원내 대표 경쟁을 네 번 했는데 모두 이겼다. 사람을 끄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몰랐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같은 경제용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에 가입하려면 외환의 문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이 경상수지 악화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한테 직접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이 경제를 제대로 알았다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 경제관료들은 김영삼에게 아무 말도 안 했나.
▲ 나는 김영삼과 만만한 사이다. 부산에서 동반 출마해서 당선된 적이 있고, 민추협 시절에는 그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많이 했기에 그런 관계가 됐다. 나는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였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김영삼이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화를 내니 관료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 김영삼에게 인간적 매력은 있었나.
▲ 사람을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이 하니 사람을 끌었다. 밥을 먹으면서 상대방의 심기를 살필 줄 알았다.
민주화운동 시절의 김영삼(왼쪽)과 김대중(오른쪽) |
-- 김대중은 어떠했나.
▲ 김영삼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드라이한(건조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 명이 식사하러 가면 김영삼은 다른 사람한테 돈을 줘서 계산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카운터에 걸어가서 "얼마요?" 하면서 돈을 직접 헤아려 줬다. 두 사람은 그런 차이가 있다.
-- 본인은 김대중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 총재였던 이민우 파동으로 신한민주당이 해체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김영삼이 총재, 김대중이 고문이었다. 당시 주요 당직자 인사안은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이 반반씩 나눠 가지는 내용이었는데,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당시 나는 김영삼 계열이었는데, 김대중이 김영삼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박찬종을 넣으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 덕분에 정책위 의장이 됐다.
-- 알려진 대로 김대중은 지적인 사람인가.
▲ 몇 차례 김대중과 단둘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김영삼과 다른 면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둘이 마주 앉았다. 김영삼이 "니는 말이다, 쉬운 걸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노?"라고 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거시기 말이여, 자네는 너무 쉽게 생각한당께"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외환 문제로 인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하자는 의견을 내면 김영삼은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역정을 내겠지만 김대중은 "다시 한번 이야기해봐"라고 한 뒤 들어보고는 "그것도 그럴 것 같네. 좀 생각해보자"라고 물러설 사람이다.
-- 김종필은 어떤 사람이었나.
▲ 그와는 중첩적인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룬 공의 절반은 김종필의 몫이다. 그는 박 정권 탄생의 주역이었다. 5·16쿠데타의 구체적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독한 데가 없는 사람으로 유연성을 갖췄다. 그가 나의 큰 형님이나 작은아버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79년 11월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 |
-- 1985년 9월 고려대 앞 시위 때문에 고생했는데.
▲ 당시 대학생 연합조직인 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가 고대에서 개헌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하니 참여하라는 문서를 민정당과 신민당에 보냈다. 내가 당시 신민당 개헌특위 간사인 데다 인권위원장이어서 당시 성북구를 지역구로 둔 조순형 의원과 함께 고대 앞으로 갔다. 당원 50명도 동행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차단돼 그곳에서 비를 맞으며 4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 장면을 대통령 전두환이 TV로 봤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나를 미워했기에 나를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됐고, 고등법원에 가서야 무죄판결을 받았다.
-- 왜 전두환으로부터 평소에 미움을 받았나.
▲ 장영자 사건으로 11개 부처 장관을 바꿀 때 전두환은 입각을 제안했다. 외무와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고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시위 학생들을 변론하러 다녔다. 고대 시위사건 전인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삼민투의 학생들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 미문화원 근방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사무실이 있었는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 나는 미문화원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에 창문을 통해 학생들과 대화했다. 그때 한 신문사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학생 선동하는 박찬종'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 학생들은 농성을 언제 풀었나.
▲ 김대중은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그는 "사흘 후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북측 대표가 내려오는데, 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전에 농성을 풀어야 한다"면서 그 메시지를 학생들한테 전하라고 했다. 학생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진해서 농성장을 나왔다. 나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변론을 맡았다.
1985년 5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중인 대학생들 |
-- 삶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 국회의원 될 무렵부터 '강한 데는 강하고, 약한 데는 약하게'라는 원칙을 갖고 있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나는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잘하는 편이다. 단점으로는 내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사소한 일로 손해 보는 일이 적지 않다.
-- 본인은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나.
▲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용기가 있고 결단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손해 볼 일도 할 일은 한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택시를 타면 나를 알아보는 운전기사가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요금을 받지 않으려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과거의 정치인을 기억해주시는 시민에게 감사한다. '박찬종 TV'를 열심히 보면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도 고맙게 생각한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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