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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파괴자인가 구원자인가···놀런이 그린 ‘오펜하이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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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파괴자인가 구원자인가···놀런이 그린 ‘오펜하이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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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 투하 첫 핵무기 개발
미 물리학자, 전쟁 끝낸 ‘영웅’으로
그러나 함께 찾아온 ‘살상’ 죄책감
당시 미국 휩쓴 매카시즘 광풍에
업적도 사랑도 결국 ‘난도질’ 당해
15일 개봉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 를 이끈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린다.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15일 개봉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 를 이끈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린다.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1938년 독일의 물리학계에서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 우라늄의 원자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 상식을 뒤집는 발견에 전 세계 물리학자들은 전율한다. 동시에 이들의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연쇄적인 핵분열을 이용하면 전에 없던 위력의 무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때는 나치 독일에 의한 전운이 감돌던 시기. 미국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를 중심으로 핵무기 개발에 돌입한다.

15일 개봉하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그린 영화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06)를 원작으로 한다. 스타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으로 영화 팬들의 기대를 불러모은 이 작품은 평범한 전기 영화이기를 거부한다. 미국 현지에서는 지난달 21일 공개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 사회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영화는 1920년대 불행했던 오펜하이머의 영국 유학 시절부터 1930년대 미국의 핵무기 개발 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쳐 매카시즘의 광풍이 부는 1950년대까지를 그린다. <메멘토> <인셉션> 등에서 선보인 선형적 시간관을 거부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감독의 특기는 이번에도 발휘된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오펜하이머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뛰어난 과학자인 동시에 행정가의 면모를 보인다. 충돌하는 과학자들 간 갈등을 조율하고, 프로젝트의 두 축인 과학자와 군이라는 이질적 집단 사이 긴장을 낮춘다. 뉴멕시코주의 허허벌판에서 3년 동안 진행된 극비 프로젝트는 1945년 7월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킨다. 몇주 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라는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1950년대 미국 전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은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에 세운다. 종전 이후 수소 폭탄 개발을 비롯한 전후 군비 경쟁에 반대해 온 그는 좋은 타깃이 됐다. 맨해튼 프로젝트 전 오펜하이머가 참여한 교수 노조 조직 활동과 사회주의 모임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진 태드록(플로렌스 퓨)과의 사랑 역시 그의 애국심을 의심받게 한다. 수십 년 전 기혼의 연인과 나눈 밀회, 가족의 공산당 가입 이력,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 등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며 사회·정치적으로 ‘난도질’당한다.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죄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오펜하이머의 운명은 이렇게 겹쳐진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두 인물은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오른쪽)와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 장군이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두 인물은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오른쪽)와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 장군이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영화는 오펜하이머라는 논쟁적 인물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영화가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교차하며 보여주려는 것은 오펜하이머의 물리적 생애보다 그가 통과한 내적 여정에 가깝다. 오펜하이머의 몸과 마음은 내내 갈지자를 그린다. 나치가 자행하는 폭력을 막고자 핵무기 개발이라는 차악을 택했지만, 히틀러 사망 뒤에도 폭탄의 폭파력을 극대화하는 투하 방식을 공군에 조언한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 사망한) 히틀러에게 원폭을 날리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호쾌하게 외치다가도 군비 확장을 촉구하는 대통령에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호소한다.

놀런 감독은 미국 현지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나는 관객이 오펜하이머를 ‘판단’(judge)하기보다 ‘이해’(understand)하기 원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영화가 구원자이자 파괴자라는 모순적 평가를 받는 오펜하이머의 적극적 변호인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독 특유의 연출 기법 역시 오펜하이머의 내면 변화를 묘사하는 데 집중된다. 특정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사운드를 극도로 키우거나 줄이고, 배경을 일렁이게 만들며 그리고자 한 것은 원폭이 휩쓸고 지나간 ‘마음의 폐허’다. 러닝타임 180분 뒤 극장을 나설 관객들을 압도하는 것 역시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재래식 무기로 구현한 버섯 구름이 아니라 촘촘하게 쌓아올린 감정의 스펙터클이다.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품이 많은 이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사실에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품이 많은 이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사실에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미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오펜하이머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스트로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흑백으로 그려진다. 유니버셜 픽처스

미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오펜하이머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스트로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흑백으로 그려진다. 유니버셜 픽처스


아일랜드 출신 배우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 역을 맡았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 <덩케르크> 등 놀란의 대표작에 꾸준히 출연해 온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놀런 영화의 주연을 꿰찼다. 머피의 트레이드 마크인 신비로운 눈동자는 갈등하고 흔들리는 인간 오펜하이머를 재현한다. 실존 인물과 닮은 구석이 없어보이던 머피는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무는 순간 영락없는 오펜하이머가 된다.

맷 데이먼(그로브스 장군 역), 에밀리 블런트(아내 키티 역), 플로렌스 퓨(연인 진 역) 등 스타 배우들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군비 경쟁에 관한 입장차로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다 결국 그를 벼랑 끝으로 모는 스트로스 제독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오펜하이머>를 보러가는 관객은 몇 가지 기로에 놓일 것이다. ‘사전 예습이 필요한가’, ‘반드시 아이맥스(IMAX)로 봐야 하는가’다. 영화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관객은 두 질문 모두에 동그라미를 친 쪽일 듯하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중간중간 언급되며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인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이 여럿 등장한다. 기혼자이자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진 태드록(플로렌스 퓨)과의 만남은 훗날 오펜하이머가 소련 간첩 누명을 쓰는 데 일조한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이 여럿 등장한다. 기혼자이자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진 태드록(플로렌스 퓨)과의 만남은 훗날 오펜하이머가 소련 간첩 누명을 쓰는 데 일조한다. 유니버셜 픽처스 제공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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