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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건국대 경영관에서 기술경영의 창시자 윌리엄 밀러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가 정선양 건국대 교수와 함께 기술경영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기업이 우수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기술만 잘 개발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개발된 기술을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통하는 제품으로 만들어 수익으로 연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기술경영'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술경영의 중요성은 이제 대부분 기업 현장에서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기술경영을 잘하느냐다. 기술경영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경제 MBA팀은 '기술경영'이론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는 윌리엄 밀러 미 스탠퍼드대학 명예교수(86)를 만나 기술경영 이론에 대한 궁금증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건국대 밀러MOT스쿨 명예원장을 맡고 있는 밀러 교수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는 마케팅 직원이, 마케팅 과정에서는 제품개발 직원이 더 큰 목소리를 내게 하라"고 주장했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는 시장의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마케팅 직원의 의견을 중시하고 실제로 제품을 판매하는 단계에서는 제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제품 개발 부문 직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 기술경영학의 선도적 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정선양 건국대 밀러MOT스쿨 원장이 묻고 윌리엄 밀러 교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정선양 원장은 대담에 앞서 "많은 전문가가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의 기술경영 수준을 5세대로 보는 반면 우리나라의 기술경영 수준은 2.5세대로 평가한다"며 "한국의 경영자들이 기술의 중요성을 체감하면서도 기술을 매니지먼트로 잘 연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먼저 기술경영(MOTㆍmanagement of technology)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달라.
"기술은 조직의 경쟁우위 및 부의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기술경영은 이러한 기술의 창출, 획득, 활용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의미한다. 기술경영은 기술을 바탕으로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는 '전략적 경영'을 말한다."
-최근 기술경영에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기술능력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기술혁신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지만 충분한 효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혁신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세심한 경영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기술경영에 임할 필요가 있다."
-교수님께서는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휴렛패커드(HP)가 기술경영을 가장 잘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요즘 HP가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HP가 요즘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HP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임자는 기존의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사업화 하는 데에 기업의 역량을 집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HP의 강점이었던 PC 사업부를 매각하려고 해 정체성 문제를 야기했다. 이 때문에 한때 기술경영의 모범 사례였던 HP는 주가가 폭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베이 출신 멕 휘트먼 CEO는 기술경영을 잘 하는 경영자이기 때문에 HP의 상황은 곧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
-HP는 일종의 성공의 역설(paradox of success)에 빠졌던 것 같다.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성공의 역설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업이 성공의 역설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선 양손잡이 조직(ambidextrous organization)이 될 필요가 있다. 양손잡이 조직이란 기존 기술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효과적인 공격을 추진하는 조직을 말한다. 가령 RCA는 1950년대 진공관에 바탕을 둔 텔레비전 사업의 선도주자였지만 트랜지스터라는 새로운 기술을 적시에 수용하지 않아 경쟁에서 탈락했다. 기존 기술로 성공한 기업이 일종의 성공의 저주(curse of success)를 받은 것이다. 기업이 과거의 성공에 도취하면 새로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힘들다.
존슨앤드존슨, ABB 등이 양손잡이 조직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기업들로 꼽히는데, 이들 기업은 대규모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작고 독립적인 조직으로 나누어 기업을 운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들은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끊임없이 유익한 아이디어를 낸다. 이러한 상향적인(bottom-up)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조직은 성공의 역설에 잘 빠지지 않는다."
-HP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MOT 측면에서 CEO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다. 한국의 나이 많은 CEO들은 기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CEO가 기술을 잘 모르면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또한 최고경영자가 기술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기술혁신 관련 시너지 창출에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기업이 기술개발과 자금지원을 개별 사업부에 전적으로 위임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사적인 차원에서 비효율적이다. 사업부는 기업 전체보다는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배분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업무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사업부와의 기술 관련 중장기적 협력을 기피한다. 이 점에서 CEO는 기업 전체의 차원과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사업부들에 기술경영에 대한 지침과 주안점을 제시해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CEO는 직원들의 자율권을 존중하면서도 기술, 제품, 시장, 고객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야 한다."
-애플, 구글을 기술경영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두 기업은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구글은 '개방'이고 애플은 '폐쇄'다. 구글은 일단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을 공개하고 반응을 보지만 애플은 완성된 비즈니스모델을 시장에 내놓는다. 또한 시장 공략 방식도 다르다. 구글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시장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애플은 스스로 시장을 창출했다. 가령 아이팟의 경우 음악산업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했다. 두 기업은 이처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지만 지금까지 두 기업 모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기술경영 관점에서 스티브 잡스에게서는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나?
"그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비자들 자신도 모르는 니즈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만들어내 시장을 창출했다. 사실 기술 주도 혁신의 성공 여부는 다양한 신기술을 융합해서 만든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 뒤 어떻게 수요 창출로 연결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하이테크 마케팅'이라고 말하는데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하이테크 마케팅의 기본 정신에 충실한 CEO였다.
또한 그는 경영과 디자인을 모두 잘 아는 디자이너들을 중용했다. 이는 애플이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을 신속하게 개척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들은 학습능력이 뛰어나 페이스북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빠르게 학습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연결했다."
-기업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상당히 리스크(위험)가 큰 결단이다. 신사업 진출에 성공하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가령 페이스북을 예로 들어보자. 페이스북의 창립자인 저커버그는 소셜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가지고 놀다가 우연히 이 분야에 비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어떻게 소셜 네트워크를 비즈니스로 활용할 수 있는지 연구하기 시작해 사업화에 성공했다.
특히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을 구사하는 기업에 스피드는 생명과 같다. 최고 기술보다도 때로는 제품 출시 타이밍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가령 빠른 추종자 전략을 잘 활용하는 대표적인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주 훌륭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선도 기업에 뒤이어 내놓는 상품들의 품질은 오히려 선도 기업의 상품들을 뛰어넘는다. MS는 그런 방식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R&D 투자액 자체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R&D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R&D 투자에서 오는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많은 기업이 비즈니스에서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기업들은 매출액 10% 이상을 혁신을 위해 투자한다. 매우 높은 수치다.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매출액의 5~6% 이상을 R&D에 투자한다.
그러나 사실 절대적인 R&D 투자 금액보다 중요한 것은 R&D를 통해 개발된 기술을 어떻게 사업화하느냐다. MS에는 기술 이전(technology transfer) 전문가들이 아주 많다. MS 리서치센터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항상 주의 깊게 감지한다. MS 리서치센터에 소속된 기술 이전 전문가는 R&D를 사업화로 잘 연결한다. 기업이 커질수록 기술이전 전문가들이 많아야 한다. HP는 창립 초기 바니 올리버라는 유명한 R&D 책임가 기술이전을 책임지고 잘 수행했지만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지금 시점에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팀원으로 구성된 전문가 그룹이 필요하다."
-기술 부서와 마케팅 부서는 가치관의 차이가 커서 상호 이해나 협력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우선 CEO가 기술과 마케팅 모두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1970년대 후반 HP의 CEO가 된 존 영(John Young)은 기술과 마케팅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부서가 제품 개발에 참여하게 했다. 마케팅 직원이 제품 개발 과정에서, 제품 개발 직원이 마케팅 과정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게 했다."
-직원들 간 커뮤니케이션에는 기업 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나?
"맞다. 사실 CEO 리더십이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공통의 비전을 심어주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줘 자율적인 조직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모든 직원들이 기술과 마케팅 양쪽을 모두 잘 알아야 하나?
"직원 모두가 기술과 마케팅에 대해 잘 이해하면 가장 좋다. 그러나 자기 분야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잘 훈련시켜서 양쪽을 잘 알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원들에게 양쪽을 숙지하라는 신호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건국대처럼 학부에서 기술경영 학과를 개설한 곳도 있고, 기술경영전문대학원을 운영하는 대학들도 있다. 대학의 MOT 교육 프로그램이 이들 인재를 훈련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나?
"물론이다. MOT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은 기술을 어떻게 사업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교육받는다. 내가 젊었을 때 다니고 있던 기업의 CEO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내가 갑작스럽게 CEO를 맡았던 경험이 있다. 퍼듀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던 나는 CEO가 된 후 기술, 리서치가 어떻게 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다. 그때 MOT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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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is…
윌리엄 F 밀러 교수(86)는 기술, 경영, 정책을 아우르는 기술경영의 창시자이자 구루다.
1956년 미국 퍼듀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에는 벤처캐피털 업체인 메이필드펀드 창립 고문을, 1972년에는 아르곤 국립연구소 응용수학 부디렉터를 맡았다. 스탠퍼드대학 교수로 재임할 때에는 컴퓨터공학과 신설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엔지니어의 경영 마인드를 키우고 경영자의 기술 마인드를 깨우칠 목적으로 스탠퍼드대에 기술경영 관련 학과를 개설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지난 30년 동안 50번 이상 한국을 방문하면서 대덕연구단지와 전국의 많은 기업ㆍ대학들에 기술경영을 전파한 공로로 200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지역을 순회하며 기술경영에 대한 자문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현재 스탠퍼드대학 명예교수와 건국대학교 밀러MOT스쿨 명예원장을 맡고 있다.
[용환진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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