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훈센 “아들은 총리, 나는 입법부”
훈센 영향력 지속…언제든 교체 가능
18세…父 크메르루즈, 子는 미 육사
45세…父 유일 총리, 子는 총리 예약
# 코로나19 후폭풍과 미·중 갈등이 아시아를 감싸는 2023년, 45세의 훈마넷은 아버지 훈센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됐다. 8월엔 부자의 권력 이양과 분점의 이중주를 경험할 무대에 서게 된다. 권력쟁투 끝에 철권통치를 이어온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차분하게 다듬어진 일정에 따라 총리에 오르게 된다. 45세에 유일 총리가 된 아버지처럼, 훈마넷은 8월 45세 총리가 된다.
2009년 10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고 있는 훈센 총리(왼쪽)와 그의 아들 훈마넷의 모습. 프놈펜=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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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센, 후임 훈마넷 조정할 카드 쥐고 있어”
긴 기사이니, 훈센의 총리직 이양 이후 캄보디아 정치를 전망하는 마무리 성격의 글을 서두에 소개한다. 전문가인 소팔 이어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훈마넷의 총리 취임 이후에도 훈센의 영향력이 꽤 오래 강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교수는 미국 언론 등과 인터뷰에서 “훈센은 모든 카드를 쥐고 있다”고 규정했다. 이론적으로 차후 훈마넷 총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면 여당에서 축출하면 된다고도 했다.
다시 일반적 기사 흐름으로 돌아와서 훈센과 장남 훈마넷의 총리직 승계를 이야기해보자. 훈센은 아시아 최장수, 세계 2위의 최장기 최고권력자 지위를 이어왔다. 캄보디아의 38년 총리가 아들에게 권력 이양을 천명하면서 내놓은 일성은 이랬다.
“나는 8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훈마넷이 총리직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이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내부적으로는 확정해 놓았을 일정이 구체적으로 공개됐다는 점 빼고는 말이다. 훈센은 23일 5년 임기의 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집권 여당의 승리 사흘만인 26일 국영TV 특별방송을 통해 자신의 후계구도와 일정을 확인했다.
캄보디아 총리는 국왕이 의회 제1당의 추천을 받아 지명한다. 그의 복안대로 일정이 진행되면 훈센은 현존 세계 2위 장기 집권자라는 이름을 지우게 된다. 1985년 1월 취임해 2023년 8월 퇴임하게 돼 20세기 15년, 21세기 23년 통치의 흔치 않는 기록은 남기게 된다.
◆ 일정 차곡차곡…다음달에 아들 총리 승계
훈센이 ‘후계자는 훈마넷’이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때는 2021년이었다. 그해 12월 2일 훈센이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같은 달 24일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이 훈마넷을 ‘미래의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훈센은 총선을 사흘 앞둔 지난 23일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는 “총선 3~4주 후 훈마넷이 총리가 될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 장남 승계 작업을 위해 앞서 지난 2월 독립적 매체였던 ‘민주주의소리(VOD)’를 페간조치했으며, 5월엔 야당 지도자로 명성이 높은 삼랭시 전 캄보디아구국당(CNRP) 대표의 공직 출마를 제한하며 정적 제거를 이어왔다. 여당인 CPP는 총선에서 125석 중 120석을 차지했다. 나머지 5개 의석도 친정부 성향 정당(푼신펙)의 몫이었으며, 총리를 하려면 의원 신분이어야 규정 때문에 훈마넷은 프놈펜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캄보디아 차기 총리로 지명될 훈마넷이(왼쪽)이 7월 1일 프놈펜에서 펼쳐진 선거유세에서 아내(오른쪽)와 함께 지지자의 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웃고 있다. 프놈펜=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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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관심은 훈마넷이 펼칠 정치 여정이다. 총리직 도전과 초기 안착 단계에서는 훈센의 존재가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어느 순간엔 넘어서야 할 대상이 될 것이다. 사실상 당분간 상왕으로 군림할 아버지의 그림자도 짙을 것이다.
훈센은 새로운 정부의 정책엔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입법부는 행정부와 구분되는 역할이 있다고도 했다. 국민을 위한 봉사와 국가발전에 대한 기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분에 따라 훈마넷에게 총리직을 넘기더라도 집권당 대표와 의원 신분은 유지하고, 국왕 최고 자문위원장을 맡는다는 일정을 공개했다. 내년 2월 예정된 상원의원 선거 이후엔 상원의장도 맡을 것이라고 했다. 훈마넷이 제대로 못하면 언제든지 자신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입장도 천명했다.
◆ 18세 시절…훈센은 크메르 루즈 입대, 훈마넷은 미 육사 입교
당장 독립적 정치 일정을 선보이기는 힘들 것이지만, 차후 훈마넷이 보일 정치행로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성장과정과 역정이 힌트가 될 수 있다. 훈센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본다. 1977년생인 훈마넷은 프놈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51년생인 아버지 훈센은 메콩강 인근 캄봉참에서 태어난 농민의 아들이었다. 캄봉참은 캄보디아 남쪽에 치우친 프놈펜 동북쪽에 자리한 지역이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각기 18살 시절에서 찾아본다. 그 나이의 훈센은 크메르 루즈에 입대했다. 장교로 활동하던 1975년 공산군의 프놈펜 장악을 몇 주를 앞두고 시력을 잃기도 했으며, 1977년 베트남으로 도망쳤다. 최소 170만 명이 기아, 질병, 처형 등으로 사망한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 치하를 벗어나기 위한 도망이었다.
훈센의 20대 시절인 1970년대는 캄보디아 비극의 생생한 현대사이기도 하다. 1970년 발생한 론놀의 쿠데타는 베트남전쟁에서 중립노선을 고수하던 노로돔 시하누크의 국왕의 축출을 가져왔다. 미국은 론놀을 앞세워 베트남 공산주의자 소탕을 명분으로 캄보디아에 대규모 폭탄을 투하했다.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점령으로 1979년 크메르 루즈는 축출됐으며, 훈센은 26세의 나이에 외교장관으로 임명됐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1985년엔 총리가 돼 본격적인 훈센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권력쟁투와 분점, 야당 축출, 철권통치의 길을 걸어왔다.
3남2녀의 첫째인 훈마넷의 18살 시절은 아버지와 달랐다.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가 이뤄진 1989년 프놈펜에서 학교를 다녔던 훈마넷은 18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99년 졸업했다. 캄보디아인 최초로 알려져 있다. 미 육사 입학은 해마다 가능했던 10명의 외국인 특별전형에 캄보디아 정부 추천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미국에 남아 2002년 뉴욕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다음엔 영국으로 건너가 2008년 브리스톨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서는 총리경호부대장과 대테러사령관, 육군사령관, 육군 참모차장 등을 지냈다. 2008년부터 3년 동안 태국과 산발적 교전현장을 지휘했다. 군 부사령관이며, 올해 초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여당인 CPP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고 있다. 군의 장교 등을 거치면서 사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져지기도 했지만, 실전 경험은 풍부하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정통소식통은 “훈마넷의 직책은 앞으로 이어질 정치적 직무 등을 위한 과정으로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훈마넷이 1999년 5월 29일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캄보디아 국적 소지자로는 처음으로 졸업장을 받아든 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웨스트포인트=AP연합뉴스 |
◆ 훈마넷의 정치는…“친서방 행보 가능” vs “또 다른 훈센”
훈마넷의 호감을 키우는 활동을 펼쳐왔다. CPP 청년단 대표로서 당과 연계된 자선단체와 코로나19 백신 접종 사업 등을 이끌었으며, 군인이었지만 훈센을 대신해 외교 무대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등 각국 정상과 회동했다.
훈마넷은 정치적 색깔과 철학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미국 등의 서구 언론은 유명 정치인의 딸과 결혼해 자녀 셋을 두고 있는 그가 온화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라고 전하고 있다. 합리적이고, 개방적이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훈센에 비해 서구식 교육을 받은 훈마넷에 대한 기대감이 일정 부문 반영된 평가일 수도 있다. 그가 향후 국제외교에서 친서방파의 길을 보여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앞서 서구 언론은 훈센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곧잘 했다. 뉴욕타임스(NYT)의 1989년 기사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베트남군 철군 등으로 동구처럼 탈냉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에서인지 뉴욕타임스는 훈센 총리에 대해 “말이 통하지 않았던 20대의 전직 게릴라가 흠잡을 데 없는 38세의 총리로 거듭났다”는 요지의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 1996년 훈센 “내가 떠나면 네(훈마넷)가 이어받는다”
훈센이 장남에게 권력 이양을 생각했을 수 있다는 일화 한 대목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훈마넷의 미국 유학시절인 1996년 전화통화 내용을 소개했다. 훈센이 아들에게 “내가 떠나면 네가 이어받을 것”이라고 했다. 미 육사 재학생이어서인지 훈마넷은 “군대를 강화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훈마넷의 친서방 행보 전망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릴 수 있다. 과거 역정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자신과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롭게 변화를 추동할 만큼 주도력을 확보하기엔 내·외부 환경이 열악하다. 북한 김정은 총비서의 3대 세습 후계가 확정됐을 때 국제사회의 반응이 딱 그랬다. 스위스에서 공부해 유연한 접근법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게 당시 국제사회의 기대였다.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준 행보는 세계가 지켜봤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에 나서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핵무기 개발에도 나섰다.
총선에 출마한 캄보디아인민당의 훈마넷 후보가 21일 프놈펜에서 무게차에 올라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프놈펜=신화통신·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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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정을 대입해보면 친서방 정책 구현이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최근 베트남의 영향력에서마저 벗어나 중국에 정치·경제적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기는 힘들 것이다. 캄보디아는 중국의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인 일대일로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국에 중국 해군기지 건설을 사실상 승인했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 회원국 다수가 중국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남·동중국해 갈등에도 거리를 두는 등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북한이 아닌 현재 베트남의 길이 정답”
이 역시 반박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인근 베트남의 사례다. 베트남은 냉전종식과 이념의 퇴색, 동구의 몰락, 구소련 해체 등의 과정을 전후한 시기에 대외개방 속도를 높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베트남은 미·중 갈등 구조에서 중립외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중·베트남 전쟁, 미국과 겨룬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결국 훈마넷은 아버지 훈센이 그리는 구도에서 당분간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소팔 이어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의 전망을 다른 버전으로 언급한다. 그는 “(훈센은) 사실상 운전자 자리, 그게 아니라면 부조종사 자리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라며 “훈센이 의회 장악 등을 통해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가지 기대라면 베트남의 교훈 차용이 가능하냐는 점이다. 베트남은 1980년대 말 냉전체제 해체와 동구 몰락의 와중에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개방정책으로 미국에 이어 한국 등과 접촉면을 넓히면서 북한과는 다른 길을 찾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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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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