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지난 24일 정전 70주년을 앞두고 이뤄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소련과 달리 한국전쟁을 통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도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원치 않는다”면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중국의 한반도 전략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남북이 주도권을 갖고 북한 문제가 한·미·일 3자 구도의 부속품처럼 인식되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 과학원 방문학자 등을 지내며 중국과 소련의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북·중, 중·소 관계 등을 연구해 왔다. 현재 베이징대에서 한국인 최초 종신교수로 재직하며 한반도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 본인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결정적 배경은 당시 스탈린의 안보 전략과 중·소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1950년 1월까지만해도 스탈린은 북한의 전쟁 계획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스탈린의 세계 안보 전략은 중국이 동남아시아의 공산 혁명을 지원하고 미국이 여기에 개입해 발이 묶이면, 그 사이 유럽의 공산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반면 마오쩌둥은 적어도 3∼5년 정도는 휴식기를 가지며 자국 경제 건설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마침 미국은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1950년 1월5일 대만에 무기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1월12일 극동방위선에 대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에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사실상 대만을 중국에 넘겨주겠다는 것으로, 스탈린은 미·중간 상호 접근 가능성을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미·중 접근을 차단하고 미국의 손발을 아시아에 묶어두는 안보 전략 차원에서 입장을 바꿔 북한의 공격을 허락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고, 중국을 개입시켜 싸우게하면 미국이 제3차 대전을 일으킬 여력이 없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 전체가 미국 영향력 아래 들어가더라도 안보 위험이 커진 중국이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종의 꽃놀이패였다.”
- 전쟁에 반대하던 중국이 결정적으로 참전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이 스탈린에게는 꽃놀이패고, 북한에는 무력 통일 기회라면, 사실 중국은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신중국의 경제 복구 계획을 수포로 돌릴 수 있으며, 한국에서 철수한 미군을 다시 불러들여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전쟁을 결정했기 때문에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군대를 보내겠다는 선에서 합의한 것이다. 이후 중국이 참전을 결정한 결정적인 계기는 1950년 10월13일 펑더화이(彭德懷·인민지원군 사령관)의 보고 때문이었다.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지만 그들의 점령 목표는 평양∼원산까지이며 그 이북 지역은 한국군만 진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미군이 평양~원산에서 멈춘다면, 그 이북지역을 점령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한국군의 진격을 손쉽게 막아냄으로써 해당 지역까지 국가방위선을 넓힐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사실상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평양을 점령한 유엔군은 중국과 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북진 한계선을 없애 버린다. 당시 중국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넌 상태였다. 결국 마오쩌둥은 원래의 방어중심적 계획을 포기하고 기동전을 벌여 적을 섬멸하는 것으로 작전 변경을 지시하게 된다. 그렇게해서 1950년 10월25일 중국이 말하는 ‘항미원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휴전 협상 시작 배경과 북·중·러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1951년 5월까지만해도 마오쩌둥은 휴전 의사가 없었다. 전황이 악화됐지만 마오쩌둥은 평양∼원산 라인을 지키면서 적을 최대한 북쪽으로 유인해 소규모 섬멸전을 이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고, 결국 마오쩌둥은 전면적인 패배를 피하기 위해 유엔의 휴전 협상 제안에 응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김일성과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하길 원했고, 마오쩌둥은 두 사람의 동의를 얻기 위해 ‘38선 군사분계선’과 ‘외국군 철군’을 휴전 협상 조건으로 내걸고 설득했다. 결국 모두가 동의했지만 휴전 협상에 임하는 목적은 달랐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는 것이 목표였고, 김일성은 38선 군사분계선 획정과 모든 외국군의 철군을 중요시했다. 스탈린은 다시 공세를 이어가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협상 과정에서 중국의 입장이 달라지고 타결이 지연된 이유는.
“협상을 통해 1951년 11월 이미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군사분계선까지 다 정해진 상태였다. 이때 중국은 정전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경제 회복을 위해 소련에 대폭적인 지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 정전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중국의 지원 요구에 묵묵부답이었다. 스탈린의 의도를 간파한 마오쩌둥은 돌연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스탈린으로부터 경제개발 지원 논의를 이끌어 낸다. 동시에 마오쩌둥은 휴전 협상에서 포로 교환 문제에 합의하지 말 것을 지시해 협상을 지연시킨다. 일반적으로 포로 교환 협상 때문에 휴전 협정이 늦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포로 교환 문제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스탈린의 바람에 따라 전쟁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의 사망 이후에야 전쟁이 끝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 전쟁으로 부른다.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무엇인가.
“중국은 한국전쟁을 두 단계로 나눠본다.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조선전쟁이라 부르는 내전의 시기다. 1950년 10월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시점부터는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본다. 미국이 먼저 전쟁에 개입했고, 자신들이 개입해 압록강까지 왔던 전선을 38선에서 멈추도록 했기 때문에 중국이 승리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다.”
- 정전 이후 북·중 관계는 어떻게 봐야할까.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참전하긴 했지만 원래 한국전쟁을 원치 않았고,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휴전 후 북한이 남한을 독자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없도록 인민지원군을 북에 주둔시키고 북한군이 공군이나 기계화부대를 갖지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요구로 1958년 결국 인민지원군을 철수시키게 된다. 전쟁 이후 역사적으로 보면 북·중 관계는 그리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김일성 때부터 지금까지 북한은 가급적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였다. 단적으로 과거 북한은 인민지원군 철수를 제2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은 계륵 같은 존재다. 그리 우호적이지 않지만 북한이 다른 세력권에 넘어가 1400㎞에 이르는 국경에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 국제사회는 북한 비핵화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요구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 방지, 즉 현상 유지가 전쟁 이후 일관되게 가져온 한반도 정책이다. 중국 역시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 다만 중국이 실질적으로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물리적 수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등을 통해 충분히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 비핵화를 원하지만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는 것이다. 설령 중국이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다고 해도 한·미·일이 결속을 강화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는 더욱이 쓰고 싶어하지 않는게 당연하지 않겠나.”
- 남북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추진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현 시점에서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평화가 정착돼 남북이 싸우지 않고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국의 한반도 전략인 현상 유지 정책에 부합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이 가장 주목 받을 때는 한반도 문제 있어 남북한이 주도권을 가질 때다. 남북이 한·미·일, 북·중·러의 하부 구조로 들어가는 순간 아무도 남북을 중시하지 않는다. 중국은 남북 화해에 반대하지 않고, 러시아도 자기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남북 화해가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미군 철수 요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이익에는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중국의 국력이 강하지 않고 미·중간 패권경쟁이 가속화되지 않았을 때는 북한에 대한 한·미간 전략적 이익이 일치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중국이 미국에 도전 가능한 힘을 갖게 되면서 한·미간 전략적 목표의 불일치가 시작됐는데, 이를 어떻게 잘 조율해 갈지가 중요하다. 남북 관계에 있어 우선 한국 정부가 화해 의지를 보여주면서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데, 현재는 주도권이 한·미·일 3자 구도 아래로 들어가면서 북한 문제가 3자 구도의 부속품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런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 무슨 옷 입고 일할까? 숨어 있는 ‘작업복을 찾아라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