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생존자 크게 줄면서
남북 정서적 상호의존도 약해져
정전 70년 평화모색 사라지고
남북미 당국, 군사력·사용의지 과시
위기관리 나설 필요성 더 커져
최악의 시나리오 방지 위해
긴장 완화 최우선 의제 삼아
미·중관계 힌트 안전장치 구축 시급
2019년 5월 22일 취재진이 강원도 철원군 ‘DMZ 평화의 길’ 내 공작새 능선 조망대에 올라 철책선너머 비무장지대를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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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관계’ 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관계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 우선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제로 가 된 지 이미 오래이다 . 1971년에 시작된 남북대화는 2018년 12월, 1992년에 시작된 북미대화는 2019년 10월 이후 현재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이렇게 오랫동안 단절된 것은 처음이다. 그렇다고 남북미중 4자회담이나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를 포함한 6자회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남북한의 경제협력과 인적·물적 교류 역시 마찬가지이다. 2021년에는 1989년에 통계가 작성된 이래 처음으로 남북간 왕래 인원이 0명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차량 왕래 역시 2021년부터, 선박·항공기·철도 왕래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 제로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산가족 생존자가 크게 줄어들면서 남북한의 정서적 상호의존도 약해지고 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관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인도적 호소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 당국이 이산가족의 한이라도 살펴야 할 까닭이다.
씁쓸한 장면은 또 있다. 올해 정전 70년을 맞이해 국내외 시민사회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도 커지고 있지만, 정작 남북한 당국은 무관심하다. 윤석열 정부는 6월 초에 발간한 국가안보전략서에 평화협정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평화협정을 체결해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은 북한의 오랜 주장이자 요구였다. 하지만 2020년 이후 이런 요구는 더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정전 70년과 같이 ‘꺾어지는 해’ 인 올해에 이런 주장이 나올 법도 한데 현재까지 한마디도 없다. 남북한 모두 평화체제 구축에 관심을 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달라진 현실 속에서 우리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할까?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상호간의 적대감과 무력시위가 극에 달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당분간 다시 친해질 수 없다면 싸우지나 말자는 것이다.
전쟁은 여러 가지 역설을 품고 있다. 우선 전쟁은 가능성 자체는 매우 낮지만, 일단 전쟁이 터지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 전자의 가능성에 치중하면 나태해지고 쉽고, 후자의 위험성에 경도되어 전쟁 준비에만 매달리면 오히려 전쟁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전쟁은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기묘한 결합이다. 비관주의는 나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대방을 지금 손보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생각, 작은 충돌이 발생할 경우 제대로 손봐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더 대담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력 공격이나 과잉 대응을 선택하려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반면 낙관주의는 전쟁을 통해 전쟁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관적 확신을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전쟁사를 통해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 할 걸’ 이라는 후회를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극심해지는 군비경쟁과 무력시위 공방전을 보면서 ‘이러다가 전쟁이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남북미 당국은 힘만이 살길이라며 군사력과 사용 의지를 더더욱 과시하고 있다. 남북미 정부는 너나할 것 없이 비현실적인 가정과 극단적인 피해망상을 얼버무려 군사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는데, 이럴수록 전쟁을 걱정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다. 한미동맹과 북한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역대 최강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안보 환경은 최악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하여 한반도 남북미 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과연 평화를 지킬 수 있는가? 혹시 전쟁을 막으려는 언행이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미가 “정상화” 라는 이름으로 강화하고 있는 연합훈련과 군비증강은 한반도의 안보를 ‘안정화’ 시키고 있는가? 상대방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의 오판이나 기계의 오작동 가능성은 생각해봤는가? 북한은 한미의 비핵 공격 시에도 전술핵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알고 있는가? 한미는 북한이 전술핵을 써도 김정은 정권을 끝장낼 수 있는 “압도적 대응” 에 나서겠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겪게 될 한반도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는가? 전쟁 발발 시 무고한 사람들이 입게 될 가공할 피해는 누가, 어떻게 책임지고 보상해줄 수 있는가? 남북미는 이 위기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싸우지 않는 남북관계를 만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미중관계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두 나라는 치열한 전략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경쟁이 무력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가드레일(안전장치)’ 를 설치해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을 이루고 있다. 5년 만에 이뤄진 미국 국무장관의 6월 방중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토니 블링컨은 친강 외교부장,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시진핑 주석 등과 잇달아 만나고는 충돌 방지를 위해 양국 관계를 “안정화”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기실 남북한에도 거대한 가드레일이 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양쪽으로 155마일에 걸쳐 2km 씩 설정된 비무장지대 (DMZ)가 바로 그것이다. 디엠제트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북 접경 지역을 비무장 완충지대를 만들어 무력충돌 방지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디엠제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무장 지대로 바뀌었고 여러 차례 무력충돌도 발생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완충지대를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대하자고 나온 것이 바로 9.19 군사합의이다.
9.19 군사합의를 산불에 비유해보면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온건조한 곳에선 작은 불씨로도 산불도 발생하고 산불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되며 진화에도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의 변화’ 에 따라 관계는 갈수록 무미건조해지고 있고 정치군사적 적대감과 군비경쟁은 뜨거워지고 있다. 이는 작은 충돌이 발생할 위험도, 그 충돌이 큰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가 9.19 군사 합의는 문재인 정부의 유산이라는 정파적 시각을 거둬내고, 남북한 모두 이 합의를 지키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변화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전쟁 예방 및 위기 관리에 나설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북관계는 대화 제로, 인적·물적 교류와 왕래 제로 시대에 접어든 상황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바로 ‘ 억제 일변도의 관계’이다. 상호 억제는 과거의 남북관계에도 있었지만, 대화·교류왕래·남북경협 등과 같이 있었다. 하지만 2020년 이후, 특히 윤석열 정부 등장 이후에는 억제만 나부끼고 있다. 이는 북미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억제 추구가 불가피하고 또 이게 대세가 되더라도, ‘억제 관계의 안정성’을 기하려는 노력 역시 매우 중요하다. 안정성이 결여된 억제 관계는 인간의 오판과 오인, 그리고 기계의 오작동에 의한 무력충돌의 위험을 높여 억제 본연의 취지를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제의 세 가지 요소는 능력(capability), 신뢰(credibility), 전달·소통(communication)이다. 적대적 억제 관계는 상대방보다 군사적 능력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군비경쟁, 네가 나를 건들면 가공할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믿게 만들려는 군사 전략과 준비태세, 그리고 이러한 능력과 의도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양상을 띠곤 한다. 이는 나의 안보를 강화하고자 하는 취지를 품고 있지만, 상대방의 반작용을 야기해 오히려 나의 안보도 위태롭게 만드는 안보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억제를 추구하더라도 불안정을 줄이고 안정성을 기할 수 있는 관계로의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과 북한이 군비경쟁보다는 군비통제를 통해 군사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접근이 요구된다. 또 보복 위협이 빈말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려는 적대적 신뢰보다는 서로가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우발적 충돌 발생시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우호적 신뢰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상대방에게 두려움 주기식의 전달을 지양하고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으려는 대화와 소통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
2018년 8월20일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남측의 이금섬 할머니가 아들 리상철씨를 단번에 알아보고 부둥켜안은 뒤 볼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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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사라지고 억제는 난무하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대화와 협상의 목표를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남북-북미대화를 포함한 각종 회담의 목표는 ‘ 선의 시나리오’ 에 맞춰져 왔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 실현, 남북한의 경제공동체 건설과 유라시아의 대륙으로의 진출, 북미관계 정상화와 대북 제재 해결, 교류협력의 확대와 평화적 통일 실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동기와 목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우선은 대화와 협상의 목표를 ‘최악의 시나리오’ 를 방지하는 데에 맞춰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남북미중 모두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대화 재구성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남북한 당국에서 유행하는 화법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을 피하지도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는 ‘전쟁을 원하지 않으면, 전쟁을 예방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 한미는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 를 말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라는,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수식어로 붙이고 있다. 반면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 건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의 철회” 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미동맹과 북한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미가 비핵화를 강조할수록 비핵화는 더 멀어지고 있고,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적대시정책 철회를 요구할수록 북한이 말하는 적대시정책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미가 ‘전쟁 방지와 긴장 완화’ 를 최우선적인 대화 의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발등에 떨어지려는 불부터 꺼야 멀고도 험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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