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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글로벌 호라이즌] 新 워싱턴 컨센서스?파르테논 신전 vs 프랭크 게리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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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 글로벌 호라이즌] 新 워싱턴 컨센서스?파르테논 신전 vs 프랭크 게리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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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이 미술관은 빌바오를 부흥시켜 ''빌바오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1999년 프랭크 게리가 프리츠커상을 받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이 미술관은 빌바오를 부흥시켜 ''빌바오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1999년 프랭크 게리가 프리츠커상을 받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글로벌화 시대의 ‘워싱턴 컨센서스’와 파르테논 신전

글로벌화 시대의 ‘워싱턴 컨센서스’와 파르테논 신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글로벌화가 본격화되던 1989년, 워싱턴의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존 윌리엄슨은 당시 외채위기를 겪던 남미국가들의 경제개혁을 위한 10가지 처방을 제안하며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명명한다. 이후 무역자유화, 외국인 투자 촉진, 민영화, 규제 완화, 재정 건전성 등 ‘워싱턴 컨센서스’의 핵심 요소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과 글로벌화를 대변하는 ‘평평한 세계’의 시대적 사조로 자리 잡게 된다. 개별경제 주체가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이윤과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다 보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를 위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애덤 스미스의 아이디어가 그 근간을 형성함은 물론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전후 세계 경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이 미국 뉴햄프셔의 아름다운 휴양지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20세기 들어 전 세계를 2차례나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았던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역자유화를 통해 국가 간 상호의존성을 높이는 것이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루는 길이라는 전후의 시대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같은 승전국이었던 소련 공산 체제와의 대결구도하에서 미국은 브레턴우즈 체제하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및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기반으로 하고, 마셜플랜을 통해 유럽 재건에 적극 나서면서 지금의 글로벌 경제의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어 왔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기하학적 황금비율에 따라 잘 짜인 직각의 구조물과 이를 지탱하는 기둥들로 만들어진 명확한 건축물을 연상케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로벌화의 후퇴

이렇게 지난 수십년간 세계 경제를 견인해왔던 글로벌화의 성공방정식에 대해 크레디트스위스의 한 애널리스트는 아래와 같이 재치 있게 묘사한다. “중국은 값싼 물건을 만들며 돈을 벌고, 러시아는 값싼 가스를 유럽에 팔며 돈을 벌며, 독일은 값싼 가스로 비싼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벌고, 미국은 값싼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도 값싼 중국산 제품과 러시아산 가스 덕분에 글로벌화, 세계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 억제를 동시에 달성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정교하게 돌아가던 글로벌화의 성공방정식이 앞으로도 작동을 할 것인가?

그 답은 부정적이다. 돌이켜보면 글로벌화 반전의 중요한 변곡점이 몇 번 있었다. 먼저, 2001년 많은 사람이 그해 9월 11일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싸이며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충격적인 장면을 기억하겠지만 글로벌 경제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그해 있었다. 중국의 글로벌 경제 편입은 중국의 번영과 민주화를 가속시켜 공존공영의 세계를 가져올 것이라는 서구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에는 채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도 불평등, 글로벌화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2020년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노매드랜드’는 금융위기로 직장도, 집도 잃은 중년 여인이 SUV를 개조해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미 서부의 광활한 대자연을 떠돌며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리 서서히 분출되기 시작한 글로벌화에 대한 반발이 2016년에 임계점에 달하면서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폭발한 것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개막한 5월 19일 일본 히로시마에 G7 정상들이 둘러앉아 있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 등에 대항해 중요 광물과 물자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 강압에 대항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창설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이사회) 상임의장,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AP]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개막한 5월 19일 일본 히로시마에 G7 정상들이 둘러앉아 있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 등에 대항해 중요 광물과 물자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 강압에 대항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창설하기로 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이사회) 상임의장,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AP]


‘新 워싱턴 컨센서스’?와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


지난 4월 워싱턴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에서는 백악관의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의 중요한 연설이 있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그리는 새로운 글로벌 경제질서의 큰 그림을 이때까지의 그 어느 연설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한 것으로 평가됐다.

연설은 전후의 신자유주의적 철학에 기초했던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를 받치고 있었던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글로벌화의 가속화에 따라 미국 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며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의 실패가 나타났고, 지정학적 안보 여건 변화에 따라 경제적·기술적·군사적으로 중국과의 패권경쟁이 심화돼 경제와 안보 이슈가 얽히면서 그간의 상호의존성이 공급망 취약성 등으로 노출됐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위기도 심화되면서 에너지안보 및 에너지전환이 급선무로 대두됐고, 특히 급속한 글로벌화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 중산층의 몰락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확산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같은 미 정부의 적극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내 제조업 기반을 재건하고, 민감한 최첨단 기술이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우려 국가들로 유출되지 않도록 ‘좁은 마당에 높은 장벽(a small yard with high fence)’을 세워 철저히 기술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디지털, 그린 분야 신흥 기술들은 경제와 국가안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 기술이므로 이 초기의 경쟁에서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에 뒤처지면 산업패권은 물론 국가안보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고 정부가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미다. 또한 통상정책도 그간 관세를 내려 시장을 자유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기후변화와 에너지전환을 촉진하며,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전환을 하겠다고 강조한다.


결국 미국의 국익을 반영하기 위해 만들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질서가 더는 미국의 국익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판단하에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의 판을 짜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트럼프와 바이든, 공화당과 민주당은 너무나도 다른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이지만 이 부분에서만은 인식을 같이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향후에도 백악관, 미 의회에 어떤 세력이 주류를 차지하든 이러한 거대한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에 관한 아이디어를 ‘신(新)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르며, 이를 파르테논 신전과는 달리 분열되고 해체되며 부서진 듯한, 구조가 있는 듯 무정형하고, 질서가 있는 듯 혼돈스러운 아방가르드의 대표적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현대적 건축물에 비유한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 미국 LA의 월트디즈니콘서트홀, 서울의 루이비통메종이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신(新)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직 주류로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의 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답은 ‘탈위험(de-risking)’이다


최근 G7 정상들은 히로시마에서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원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제시했던 전략을 미국이 받아들이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투자로 따지면 ‘디커플링’은 보유 주식을 모두 내다 팔며 손절하는 것이고 ‘디리스킹’은 보유 주식들을 분산 투자하며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닥뜨리는 숙명이라, 역사적으로 그 균형관계에 따라 한민족은 융성하기도 고초를 겪기도 해왔다. 새롭게 세계 경제질서의 판이 짜이는 지금과 같은 격변기에 이 대륙과 해양세력 간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사가 걸린 중요한 과제다.

과거 ‘파르테논’의 ‘워싱턴 컨센서스’ 시대는 ‘경제’와 ‘안보’가 분리되고,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심화는 안보와 평화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우리는 그 길로 들어서 대륙세력의 급속한 성장세를 타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실체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처럼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하에서 그 공식은 더는 작용하지 않는다.

무역 상대국과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면 산업 및 공급망의 취약성을 떠나 주권 국가로서의 협상력 약화, 안보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못 먹고 살 수는 있어도, 맞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국내총생산(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즉 무역의존도가 세계 최상위권인 나라에서 수출의 4분의 1 이상(수요)과 요소수 같은 원자재 수천품목(공급)을 한 국가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세계 경제의 새로운 판이 형성되고 있는 전략적 큰 그림에서 본다면 최근의 대중 수출 감소와 무역수지 악화는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위기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다. ‘프랭크 게리’형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하에서 대한민국이 또 한 번의 큰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탈위협(de-risking)과 다변화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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