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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15살 아들도 처형될 판…北외교관 아내가 '생이별' 택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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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북한 당국이 파견한 여종업원들을 관리하던 보위성 소속 부지배인이 지난해 말 명명을 시도했다 체포된 이후 폐쇄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북한 식당 고려관의 모습. 지난 4월 말 고려관이 운영되었던 점포에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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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외교관 가족의 실종 사건이 최근 드러난 현지 북한 식당 부지배인의 탈북 시도와 연관돼 있다는 전언이 나왔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최근 북한이 조만간 국경을 개방할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자 본국 송환 뒤 겪을 처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외교관 가족들이 생존을 위해 '생이별'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8일 복수의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 4일 실종된 외교관 가족은 '고려항공' 소속 무역대표부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영사관에 파견해 식당을 운영하며 외화벌이를 했던 박모 씨의 아내 김모(43)씨와 아들 박모(15)군이라고 전했다.

외교관 박모씨의 아내 김씨는 남편 박씨가 2019년 현지 식당 운영과 관련한 검열을 받기 위해 평양으로 귀환했다가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지 못하자 대리 지배인 자격으로 현지 북한 식당인 '고려관'의 운영 책임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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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북한 식당 '고려관'을 운영하던 자리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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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식당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됐다. 여기에 지난해 말 식당 종업원들을 관리하던 부지배인(보위지도원 김모씨·51)이 탈북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면서 총체적 위기에 빠졌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사실은 지난 3월 블라디보스토크 내 북한 식당인 고려관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북한 영사관이 폐쇄한 고려관 자리에는 지난달 리모델링을 마치고 들어선 중국 식당이 영업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소식통은 해당 사건 이후 파견 인력들의 이탈이 계속 이어질 것을 우려한 북한 영사관 측은 식당을 폐쇄했고 김씨 모자도 영사관에 연금했다고 전했다. 영사관 내부의 허드렛일을 하며 감시 속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일주일에 하루 외출이 허락된 시간을 틈타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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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내에서 북한 식당 '고려관'을 운영하던 자리에 들어선 중국 식당의 모습. 식당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성업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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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남편과의 이별을 감수하고 탈출을 택한 이유는 국경 개방 이후 본국에 송환된 이후 받게 될 지난 3년간의 북한 식당 운영에 대한 평가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외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실태를 연구하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김씨의 경우 상납금에 대한 부담과 자신이 관리하던 부지배인의 망명 시도에 대한 책임까지 자신이 지게 될 것이란 점이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어머니의 입장에서 15살에 불과한 아들 박군의 미래에 대한 처절한 고민도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리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지 소식통들은 지난해 말 망명을 시도했다가 러시아 현지에서 체포된 전 부지배인과 관련해선 "망명을 시도한 게 분명한 만큼 (북·러) 국경이 개방되면 북한으로 우선 송환돼 처형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자신이 관리하던 부지배인이 처형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관리 책임을 지고 있던 김씨에 대한 처벌도 가볍지 않을 거라는 게 소식통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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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내에서 북한 식당 '고려관'을 운영하던 자리에 들어선 중국 식당의 내부 모습. 식당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성업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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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원한 현지 활동가는 "해당 사건이 외신을 통해 알려진 만큼 북한 당국이 일벌백계 차원에서 강력한 처벌을 내릴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며 "김씨 입장에선 본국에 송환될 경우 일가족 모두가 최악의 경우 처형을 당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남편과 이별을 하더라도 아들이라도 살리기 위한 차선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 모자의 행방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당장 러시아 현지에서 북한 당국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더라도 완전한 안전을 담보 받기 위해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영사관은 러시아 수사 기관과 공조해 CCTV 영상 등을 확인하며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북·러 양국은 지난해 말 망명을 시도했던 고려관 부지배인의 경우에도 두 달간의 끈질긴 추격 끝에 부지배인이 러시아를 벗어나기 전에 체포한 전례가 있다. 북한 당국은 김씨 모자에 대해서도 끝까지 추적과 체포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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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0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북한 노동자 숙소에서 포착된 TV의 모습. 화면에선 조선중앙TV의 로고와 북한군의 시원으로 삼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 빨치산)관련 이야기를 담은 '주체혁명의 첫 기슭에서'라는 소개편집물의 제목이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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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난해 11월 한국에 입국한 블라디보스토크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러시아 모처의 안전이 확보된 가옥에서 신변을 보호받다가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UNHCR) 사무소에서 임시 보호제도의 적용을 받은 뒤에야 현지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탈북을 결심한 시점부터 한국 입국까지 1년 가까이 북한 당국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 했다.

노동자들과 외교관 가족들이 잇따라 탈북을 시도하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본국 송환을 꺼리는 분위기는 북한이 인력을 파견한 해외 각지에서 감지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해외 파견 인력들에게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영상물을 강제로 시청하게 하는 등 '사상 통제'에 주력하는 모습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태영호 국민의 힘 의원은 이날 "올해 1~5월 사이 서울에서 탈북 무역대표부 직원 2명을 만났다"며 비슷한 사례가 추가로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익명을 원한 정보라인 관계자는 "해외 생활을 경험한 주민의 경우 북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느낌일 것"이라며 "핵·미사일 고도화에 주력하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주민 통제까지 어려워진 상황에 빠진 김정은 정권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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