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프로배구 대한항공을 16년째 지키고 있는 세터 한선수(38)는 에이징 커브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선수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참가한 2007~2008 신인 드래프트에 2라운드 2순위로 뽑히며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선수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20대 중반의 나이에 정상급 세터로 올라섰다. 데뷔 10년차였던 2017~2018시즌 대한항공의 V리그 첫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끈 한선수는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기량이 퇴보하기는커녕 한층 더 물오른 경기운영 능력으로 여전히 국내 최고의 세터로 군림하고 있다. 그 결과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시점인 2020~2021시즌부터 2022~2023시즌까지 대한항공의 통합우승 3연패를 진두지휘했다. 2022~2023시즌을 마치고는 남자부에선 세터 최초의 정규리그 MVP에 오르는 기염도 토했다.
현재 한선수는 2023 아시아 남자 클럽배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바레인에 있다. 무릎 통증을 참아가며 V리그를 치른 탓에 재활이 필요해 대회엔 출전하지 못하지만, 주장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로써 선수단과 동행하고 있다. 바레인 현지에서 ‘배구선수 한선수’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딸의 아빠인 ‘인간 한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선수가 지난 13일 바레인 마나마의 이사 스포츠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2023 아시아 남자 클럽배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가진 팀 훈련에서 볼보이를 자청하며 후배들을 돕고 있다. 남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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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의 감격은 잊었다. 통합우승 4연패를 향해 달린다”
대회 시작 전엔 후배들의 훈련을 볼보이로 돕고, 대회가 시작하고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한선수는 “같이 뛰고 싶은데, 뛰지 못해 아쉽다. 챔프전까지 버텨가며 뛰다보니 지난해 수술한 무릎이 좋지 않다”면서 “올해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뛸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재활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한선수지만, 국가가 부른다면 영광스럽게 언제나 달려간다는 마음이다. 그는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가고 싶어요. 남자배구의 인기가 다소 처져있는데, 국제대회에서 뭔가를 보여주면 도움이 될테니까요. 제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팬분들 앞에서 배구할 수 있었으면 해요”라고 답했다.
V리그 통합우승 3연패와 정규리그 MVP 수상도 한 달여가 지났다. 한선수의 시선은 벌써 전인미답의 고지인 V리그 통합우승 4연패로 향해 있다. 우승 당시엔 눈물도 흘렸던 한선수는 “시간이 꽤 지났기에 지난 우승의 감격은 이제 덤덤하다. 이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 챔프전 7연패를 달성한 삼성화재조차 통합우승 4연패를 해내지 못했으니, 제 배구인생, 그리고 대한항공이란 팀에 통합우승 4연패와 같은 최초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우승하고 42살까지 배구하고 싶다고 했죠. 3년은 더 코트 뒤가 아닌 주전으로,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싶다는 자신감과 바람을 드러낸거죠”라고 덧붙였다.
한선수는 데뷔 시즌 막판 당시 주전 세터였던 김영석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주전을 맡게 됐고, 이후로 대한항공에는 ‘한선수 시대’가 열렸다. 선수 개인으로는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챔프전 우승까지는 10년이 걸렸다. 그를 대기만성형 세터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한선수는 “제가 혼자 기량이 성장했다고 해서 우승을 할 수는 없죠. 10년간 챔프전에서 4전 전패로 패하기도 하면서 대한항공이란 팀과 저도 성장했고, 10년째에 세터인 저와 동료선수들의 기량도 팀워크도 다 갖춰져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그 탄탄함이 계속 이어지면서 연속 우승을 할 수 있는거고요”라고 설명했다.
◆ “세터에겐 고집도 필요해. 스스로 생각하는 세터가 되어야 한다”
이젠 개인 기량과 팀 성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면서 사라지긴 했다. 챔프전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실패하던 시절엔 ‘한선수는 고집이 너무 세다’라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한선수는 “세터는 고집이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터가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고, 자기만의 플레이를 펼쳐나가기 위해선 고집도 필요하다. 그 고집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있다”면서 “어린 세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제 대답도 그 ‘고집’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해보라고, 우선은 자기 생각대로 해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세터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게 지도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설명했다.
한선수의 ‘세터론’을 듣고 문득 궁금해져서 가상의 상황를 제시했다. 감독이 타임아웃을 불러서 세터에게 ‘들어가서 무조건 오른쪽 측면으로 공을 올려라’라고 지시한다. 경기가 재개됐다. 리시브가 기가 막히게 올라왔고, 세터가 상대 블로커들의 움직임을 보니 속공을 써도 통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일까.
한선수는 “우선 그런 지시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서 “설령 세터가 속공을 올려서 막혔다 해도, 스스로 생각해서 한 플레이로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세터가 스스로 고심해서 결단을 내리고, 이런 저런 상황을 경험하면서 위기를 뚫어갈 능력이 생기는 건데, 주입식으로 하게 되면 세터는 발전할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이어 “저는 욕을 먹더라도 제가 생각한대로 했어요. 나쁘게 보면 고집이지만, 좋게 말하면 소신인거죠. 제 플레이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고, 그게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거죠”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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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생활 이후는 아직 막연하다. 공부를 하고 싶다”
현재 V리그에는 IBK기업은행의 김호철 감독을 비롯해 우리카드 신영철 감독,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 한국전력 권영민 감독 등 명세터 출신의 감독이 많다. 42살까지 혹은 그 이상 현역시절을 이어가더라도 언젠가 한선수도 선수로서는 코트에서 떠날 날이 올 것이다. 코치 한선수, 감독 한선수의 모습도 그려보게 된다.
한선수는 “아직 현역 이후의 진로에 대해선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아요. 현역에 있을 땐 선수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이거든요”라면서 “선수 생활을 끝내면 가족들과 좀 쉬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그리고 제 공부를 위해 외국을 가볼 생각 정도만 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이어 “배구에 대한 공부도 있고, 외국어에도 좀 능통해지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 “좋은 아빠는 아냐. 좋은 남편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배구에 대한 긴 대화를 마치고, ‘인간 한선수’로 화제를 돌렸다. 지난 2012년 결혼한 한선수는 효주와 수연이, 소현이까지 세 딸의 아빠로도 유명하다. 세 자매는 아빠의 경기장을 찾아 한선수의 경기를 지켜보기도 한다. 한선수에게 아빠 그리고 남편으로서 스스로 평가하면 어떻냐고 묻자 “좋은 아빠는 아니죠. 많이 챙겨주지 못하고, 오래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아빠니까요. ‘지금은’은 좋은 아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라면서 “좋은 남편은 되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이어 “지금은 ‘배구선수 한선수’에 집중하고, 배구를 그만두게 되면 가족들을 위해 살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오는 10월 결혼을 앞둔 본 기자에게 결혼 선배로서 조언을 구하자 한선수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그냥 아내분의 말을 들으세요. 남자는 뭘 하려고 하면 안되요. 항상 뭘 하더라도 아내분에게 물어보고 같이 상의하세요”라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잖아요. 남자는 자기 혼자 생각대로 하다가 욕을 먹어요. 그게 반복되니까요. 그걸 최소한으로 하려면 아내 말을 무조건 듣고, 상의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배구할 때는 코트에서 누구보다도 소신을 관철시키는 한선수 아니냐’고 되묻자 “부부 관계, 가정에서는 그러면 안되요. 그건 싸우는 길로 가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아빠 한선수는 딸들에겐 자신이 겪어온 힘든길인 운동선수를 딱히 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딸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시키고 싶다. 셋째가 운동신경이나 이런 것은 제일 좋긴 한 것 같긴한데,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팀 동료들을 제외하면 한선수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인 박철우다. 한선수는 “아이들과 부부 동반으로 해서 자주 만나죠. 애들이 많으니 주로 집에서 만나죠. 집밖에 나오면 정신이 없거든요”라면서 “제가 기혼자고 아이 아빠다 보니 기혼자 선수들과 주로 어울리게 돼요”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다가올 시즌에 대한 각오를 물어봤다. 한선수는 “통합우승 4연패를 꼭 달성하고 싶다. 지난 시즌 중반엔 팀이 다소 흔들리는 모습이 나왔는데,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게, 나오더라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해야겠죠”라면서 “팬분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아주시니 선수들이 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팬분들과 더 함께 할 수 있는 경기나 이벤트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몸을 만들겠습니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마나마(바레인)=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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