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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대일 협상, 일본의 진정한 사과 거듭 요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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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대일 협상, 일본의 진정한 사과 거듭 요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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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외교와 국내 정치의 역학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문학을 하는 역사학자로서 사회과학과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이론에 관심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국제정치 이론의 하나인 ‘양면게임 이론(two level game theory)’은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와 국내 정치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틀이 될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국내 여론 뒷받침될 때 협상력 커져…때론 반대파 주장도 유용

1965년 한·일협정 거부 움직임에 일본 정부 “역사의 불행 반성”

‘과거사 문제’는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최고의 협상카드


이번에 “한국 지켜보겠다”는 일본, 되레 우리가 일본 지켜봐야

국제관계 분석 틀 ‘양면게임 이론’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양면게임 이론은 국제 외교나 협상이 단지 정부 간이 아니라 당사국의 국내 정치를 함께 이해할 때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협상의 한 면은 국가 간에 이뤄지지만, 다른 한쪽에는 사안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과의 협상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양 측면에서 모두 성공할 때 외교와 협상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가 간 협상을 하더라도 국내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 그 협상은 성공할 수 없다. 그 구성원은 시민 사회일 수도 있고, 입법부일 수도 있으며, 기업이나 사회단체일 수도 있다. 이들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등을 빚는다면, 그 협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합의에 성공하더라도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위안부 합의가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국내에서 협상안에 대해 견해차가 클 경우 국가의 협상력이 높아질 수도 있다. 상대 국가와의 협상 과정에서 국내의 반대 의견을 이유로 상대방의 양보를 요구할 수 있다.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협상이 실패하기도 하지만, 성공적 협상이 절실한 상황이라면 더 유리하게 협상 테이블을 이끌어갈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1950년대 실패한 관제 데모

민주화 이전의 한국 대통령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관제 데모의 추억이 그것이다. 국민을 동원해서 여론을 만들고, 이를 통해 협상 상대국의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다. 정부 수립 이후 대외 협상을 위한 첫 관제 데모는 정전협정 반대 시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이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동원된 시위였기 때문에 한·미 간 협상에 큰 힘이 되지 못했고, 미국은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1950년대 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 시 발생했던 관제 데모도 1953년의 경험과 비슷했다.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의 북송을 막기 위해 특공대를 파견하기도 했고,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북송을 막지 못했다.


1974년 문세광 사건의 충격파

대일 관계에서 관제 시위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 때에도 있었다. 다양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일본 경찰은 재일동포 문세광의 범행 배후에 대한 수사에 소극적이었고, 이에 항의하는 관제 데모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1970년대 전반기는 한국이 한·일관계에서 수세에 몰렸던 시기였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때문이었다. 도쿄 한복판에서 발생한 한국 야당 지도자의 납치사건은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재일동포들은 남한보다 북한에 더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문세광 사건으로 인한 반일 시위는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 관에서 동원하는 성격도 있었지만, 문세광 사건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연결되면서 국민적인 분노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일관계는 단교 직전까지 악화했다. 당시 미국은 양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결국 최악의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미국과 지재권 협정에 언론 동원

관제 시위는 아니지만, 언론을 동원하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시도는 전두환 정부 시기에 있었다. 1980년대 초 미국은 한국에 대해 지적소유권(현 지적재산권) 협정을 맺고자 했다. 레이건 행정부가 삼성전자·금성사·대우전자 등의 브라운관 컬러TV를 대상으로 15%의 반덤핑 관세를 부여했던 때(1984년)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신문에는 지적소유권 협정 추진에 대해 우려와 비판이 게재됐다. 1980년 언론사 통폐합으로 언론에 대한 통제가 이뤄지던 시기였다. 언론을 통해 지적소유권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 기사는 1986년 중반 이후 사라지고, 한국은 세계 최초로 미국과 지적소유권 협정을 맺는 국가가 됐다. 여론 동원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꼬리를 내린 것이다.

1964년 6·3사태와 한·일협정

국내의 여론을 통해 국제협상을 유리하게 이끈 경우도 있다. 다양한 이견이 있겠지만, 6·3사태로 불리는 1964년의 한·일협정 반대시위는 당시 상황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50년대부터 추진했던 대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고,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한국 정부에게도 경제적 성공을 위해 협정 체결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미국은 제2의 4·19 혁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했으며, 한·일협정을 추진한 박정희 정부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이동을 승인했고,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런데 국내의 반대 목소리는 박정희 정부에게 압력이 됐고, 정부의 협상력을 높여주었다.

1965년 일본 시이나 외무상이 방문할 때 한국 정부가 ‘민족적 감정을 고려한 발언을 하도록 종용’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도착 성명으로 발표할 수는 없지만, 기자회견 시 질문이 있으면 그와 같은 취지로 답변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실제로는 한국에 오자마자 “양국 간의 오랜 역사 중에는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라는 내용을 포함한 성명을 발표했다.

반대 여론의 덕을 본 한·일 정부

1953년 협상의 일본 대표 구보다가 식민지 기간에 일본이 한국을 발전시켰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 치하에서 더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시이나 외상이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시민사회의 거대한 목소리가 한·일협정 체결이 절실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를 움직인 셈이었다.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은 북한에 우호적인 사회당이 제1야당이었다. 당연히 한국 정부만을 대상으로 한 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자국 여론을 이유로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 대통령들은 국제무대에서 국내 여론이 협상력을 높여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렇다고 국내 여론이 협상력을 증대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하진 않았다. 특히 관제 데모의 경우 상대 국가는 한국 내의 여론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양면게임 이론이 민주 국가에서 잘 작동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한국과 상대 국가 사이의 비대칭적인 힘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상대국의 외교력이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클 경우 국내 이해관계로 상대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어렵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국내 여론은 고려 대상이 되겠지만, 비대칭적 안보동맹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여론으로 미국의 정책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2003년 2월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위한 정책이 미국의 안보정책 변화 때문이었음에도 한국 내 반미시위 때문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도 있다고 협박했던 럼즈펠드 전 미국방장관의 발언은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외교력 커져

민주화 이후 한국의 외교 협상력은 크게 상승했다. 힘의 불균형이 있다고 해서 외교 협상에서 강대국이 일방통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2007년 한·미 FTA 체결이 하나의 사례이다. 또한 무조건 밀어붙이는 스타일인 트럼프 전 대통령도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금을 자기 뜻대로 관철할 수 없었다. 정부의 협상력도 중요했지만, 시민들의 여론도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절대적인 협상카드를 갖고 있었다. 바로 과거사 문제다. 일본은 전범국가이고, 미국은 전범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국가이며, 우리는 피해자다. 일본의 전범들이 진정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이 카드를 버려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되지만, 과거사 카드는 모든 협상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이나 북한을 도와준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의 해법 직후 일본의 보수 언론은 한국 정부의 약속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우리도 일본 정부를 지켜보아야 한다. 1945년 패망을 ‘항복’이라고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종전’이라고 표현했던 일본의 극우세력이 언제까지 역사적 사실과 양심을 속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일본에게 큰 협상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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