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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18개 원전에 달린 안전장치 성능, '제조사 스펙' 절반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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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안위, 세라컴 PAR 조사 결과 보고
한수원 구매 기준에 성능 못 미쳐
연소 위험 생기는 '농도 4%' 기준은 충족
장치 보강 추진…조작 가능성도 조사
한국일보

태풍 마이삭이 부산에 상륙한 2020년 9월 3일 오전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 3호기와 4호기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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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2·3·4호기, 월성 2·3·4호기 등 국내 원자력발전소 18기에서 쓰이는 수소 폭발 방지용 안전장치가 '제작사 제시 성능'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전 안전 당국은 문제의 안전장치로도 사고 발생 시 수소 폭발을 막을 수는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안전성 강화를 위해 안전장치를 추가 설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23일 제173회 원안위 회의를 열고 '공익신고에 따른 피동형수소제거기(PAR) 수소제거율 실험 중간결과'를 보고했다. PAR은 원전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재난 상황에서 원전 격납건물 내 공기 중 수소 농도를 낮추는 안전장치다.

이날 보고에 따르면 원안위는 2월 22일부터 이달 10일까지 원자력연구원 실험장비를 활용해 기체 여과기 제조사 세라컴이 납품한 PAR의 수소제거율(성능)을 측정했다. 그 결과 세라컴 PAR의 수소제거율은 초당 0.131~0.137g(수소농도 4% 기준)에 그쳐, 한국수력원자력의 구매 규격(초당 0.2g)이나 세라컴이 제시했던 성능(초당 0.251g)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세라컴 PAR의 수소제거율은 상당수 원자력 규제기관에서 통용되는 미국 전력연구원(EPRI) 기준(수소농도 4% 시 수소제거율 초당 0.143g)보다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PAR은 전기가 없는 재난 상황에서도 원전 폭발을 막는 안전장치다. 원전 폭발은 대개 수소 때문에 발생한다. 자연재해나 각종 재난 상황에서 원자로 냉각이 불가능해지면, 물속에 있는 핵연료봉이 물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수소가 발생한다. 앞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의 원인도 수소였다. 국내에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인 2012~2015년 전기가 없어도 수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PAR 장비를 대대적으로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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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원안위는 세라컴 장비의 성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맞지만, 이 장비로써 수소 폭발을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세라컴 PAR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원안위는 새로 도출된 실제 세라컴 PAR의 수소제거율(초당 0.137g)을 토대로 설계기준 사고(원자로 설계 시 고려해야 하는 정전 등 사고) 발생 시 격납건물의 잔여 수소농도를 시뮬레이션했다. 그 결과 원전별 수소농도는 2.563~3.303%로, 공기 중에서 수소가 발화할 수 있는 물리적 최소 요건인 4%에 미치지 않았다.

원안위의 규제 기준도 수소농도 4%에 맞춰져 있다. 원안위가 개입해서 규제할 수 있는 조건도 시뮬레이션 결과 잔여 수소농도가 4%를 넘어설 때다. 이번 결과만으로 원안위가 강제적 규제에 나설 순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PAR 성능은 '한수원 기준'에는 미달하지만, 수소 폭발을 막을 수 있는 '과학적 조건'은 충족한 셈이다.

그러나 원안위는 인허가 당시 제조사가 제시했던 값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만큼 안전성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원안위 관계자는 "규제 요건은 충족해도 불확실성은 커졌다"며 "한수원에 조치를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한수원은 PAR 추가 설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추가 조사도 진행된다. 우선 세라컴이 제시한 성능값과 원안위가 측정한 성능값에 왜 차이가 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일단 다음 달부터 세라컴 측 실험장비로 수소제거율 실험을 다시 한다. 세라컴 실험장비로도 '스펙 미달' 상황에 나오면, 업체 측 고의성을 밝히는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안위 관계자는 "조사를 더 해봐야 하지만, 만약 속임수가 있었다면 고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수원은 "실험 조건 차이로 다른 값이 나온 것일 뿐, 비리나 은폐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세라컴도 "이번 원안위에 보고된 실험은 납품 당시 세라컴에서 진행했던 실험과는 다르다"며 "당시 한수원이 요구하는 구매요건을 모두 충족했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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