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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 책장에 꽂힌 고전들을 보자면, 공교롭게도 전쟁의 비극 이후 쓰인 작품이 많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과 죽음, 빈부 격차, 선과 악을 고민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단적 부조리를 마주하자면 사유의 결과물들이 더 깊고 짙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년여간 전 세계를 괴롭혔던 팬데믹도 그런 듯싶다. 유례없던 규모의 유행병이 정점을 지나고 접하는 영화에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질문과 묘사가 만만치 않다. 2023년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작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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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작으로 거론되는 <타르>(사진)가 그렇다. 주인공 타르는 2023년,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거의 완벽하다. 성적 정체성을 밝힌 후 가족을 이룬 동성애자이며, 생물학적 여성으로 세계 최고 수준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이성애자-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리를 차지한 동성애자-여성, 타르는 울타리를 부순 소수자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타르>는 눈물겨운 성공 과정이 아니라 추락의 여정을 좇는다. 3월8일이 세계 여성의날인지도 모르는 여성 타르는, 자신이 가진 지휘자의 권력을 활용해 젊은 신입 단원을 유혹하려 한다. 힘을 가진 타르가 정념을 불태우는 대상은 단지 더 젊은 여성뿐. 오케스트라 내 최고 권력자 타르가 하는 짓은 가부장제의 남성, 마초 권력자, 지휘자의 갑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온 가족이 한 무대에 등장하는 <더 웨일>은 얼핏 가족주의라는 환상의 복원처럼 보인다. 주인공 찰리는 뒤늦게 성적 정체성을 깨닫고 딸과 아내를 떠났다. 하지만 연인은 세상을 저버렸고, 찰리는 스스로 벌하듯 과식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찰리는 9년 만에 딸에게 연락을 한다. 272㎏에 달하는 고도비만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딸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웨일>이 말하는 화해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찰리가 내디디는 마지막 걸음은 허공을 향해 떠오른다. 빛을 향한 그 걸음은 영원한 구원이자 해방이기도 하다. 272㎏의 거구를 떠오르게 하는 해방은 사실 죽음밖에 없다. 평생을 괴롭힌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진정한 귀가라는 점에서 말이다. 영원한 안식, 해방, 귀가와 같은 비유는 돌발적인 죽음들이 창궐했던 지난 3년여의 시간이 준 상처에 대한 안타까운 보상처럼 여겨진다.
지루한 일상과 역사에 남길 이름이 대립하는 <이니셰린의 밴시>의 장르는 코미디이다. 당나귀 똥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드는 일상의 세계는 무의미하고 지루해보인다. 그것보다야 음악이나 시 같은 것을 지어서 작가나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는 편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생애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하지만 이름을 남기고 싶은데 재능은 없고 욕심만 가득한 바보들은 결국 전쟁을 일으킨다. 이름을 남기는 데 전쟁만 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당나귀 똥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들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건지 알 수 있다. 말을 걸면 손가락을 잘라 문 앞에 던지는 게 코미디인 세상, 그런 무시무시한 세계가 바로 2023년 아카데미 후보작들 사이에 펼쳐져 있다.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통하는 가장 소박한 의사소통의 방식일 테다. 그 사유와 구원이 무척 세속적일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 결정으로 이름을 빛내려는 바보 행정가나 정치인들보다야 훨씬 더 윗길임에 분명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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