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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고 성장한다…요즘 ‘여성서사’는 뭐가 다를까

헤럴드경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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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고 성장한다…요즘 ‘여성서사’는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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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정년이’부터 뮤지컬 ‘레드북’까지

미투ㆍ페미니즘 화두로 떠오른 이후

여성서사 공연 콘텐츠 주류 장르 부상

 

여성끼리의 연대ㆍ편견 극복한 성장

2030 여성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
최근 등장하는 여성서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와 ‘성장’을 큰 줄기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두 요소가 한데 버무려지기도 하고, 어느 한쪽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정년이’는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서사’ 작품의 두 가지 특징을 완성한다. [국립극장 제공]

최근 등장하는 여성서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와 ‘성장’을 큰 줄기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두 요소가 한데 버무려지기도 하고, 어느 한쪽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정년이’는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서사’ 작품의 두 가지 특징을 완성한다.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구시대 로맨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설정이 아니다. 서로 뭉쳐서 사건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서로 성장한다.

몇 해 전부터 여성 캐릭터가 극을 주도하는 ‘여성서사’ 극이 변화하고 있다. 구태의연에서 벗어나 좀더 신선하고 다이내믹해졌다. 덕분에 ‘여성서사’ 극은 관객들의 중요 선택지가 되고 있다.

‘미투’ 사건 이후 남성 위주 서사에 의문26일 공연계에 따르면, 지난 몇 년 새 여성서사 물이 부쩍 늘었다. 현재 공연 중인 여류 작가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담은 뮤지컬 ‘실비아 살다’(4월 16일까지·대학로 TOM 2관)를 비롯해 ‘레드북’(3월 14일 개막·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창극 ‘정년이’(3월 17일 개막·국립극장 달오름) 등 내용은 물론, 장르까지 다양해졌다.

여성사사 작품이 두각을 드러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형 뮤지컬과 연극을 올리는 제작사 관계자는 “대다수 뮤지컬에서 여성은 남성 캐릭터가 모험을 헤쳐 나와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 사랑을 주고 받는 서브 캐릭터의 모습이 주를 이뤘다”고 말했다.

특히 대극장 뮤지컬에서 여성 캐릭터는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티켓 파워를 가진 남자 주인공을 부각하는 스토리가 주를 이뤘고, 관객들도 작품 속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테디셀러 뮤지컬인 ‘지킬 앤 하이드’, ‘드라큘라’가 대표적이다. 여주인공은 있지만, 이들의 서사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변화가 시작된 건, ‘미투(me too)’와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최근 몇 년새다. 지난해 연극 ‘지상의 여자들’에서 드라마터그를 맡았던 전강희는 “블랙리스트, 미투, 세월호 사건은 연극계에 중요한 변화를 몰고 온 세 가지 사건”이라며 “이 사건들이 창작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변화가 작품 안에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2018년에 발생한 ‘미투’ 운동은 창작자들의 각성을 불러온 결정적인 사건이다.


창작자들의 변화와 함께 공연계의 주요 관객층인 2030 여성들의 시선과 인식도 달라졌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며, 당연하게 받아들인 남성 중심의 시선과 서사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혜원 경희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공연 시장은 20~30대 여성 중심 시장인 만큼 멋진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뤘으나,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며 여성,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 등 다양한 시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최근 우리나라 공연 시장의 창작 트렌드 두 가지는 여성서사와 주인공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서사’ 극의 핵심은 ‘연대’와 ‘성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 [국립극장 제공]


최근 등장하는 여성서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와 ‘성장’을 큰 줄기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두 요소가 한데 버무려지기도 하고, 어느 한쪽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을 되살린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가 대표적이다. 지난 2019년 4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4년 간 연재, 평점 평균을 10점대를 유지한 화제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서사’ 작품의 두 가지 특징을 완성한다. 원작의 줄거리는 그대로 유지했고, 인물들이 만드는 여성국극을 극중극 형식으로 구성했다.

연출을 맡은 남인우는 “여성국극은 한국전쟁 때도 맥을 이어가며 여성 소리꾼들의 연대의 힘을 보여준 예술 장르”라며 “미디어에서 여성들 간 성장 서사는 주로 질투와 시기로 묘사된 반면, ‘정년이’에선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빌런이 없다. 작품 안에서 서로 연대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의 삶을 재구성한 ‘식스 더 뮤지컬’ [클립서비스 제공]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의 삶을 재구성한 ‘식스 더 뮤지컬’ [클립서비스 제공]


여성서사 물에선 주체적인 여성들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과 맞서며 성장하는 것이 큰 흐름이다. 여성들의 성장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장치는 ‘억울함의 극복’에 있다. 일명 ‘억울 서사’다.


지 교수는 “행복하고 잘 나가는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가 아닌 억울한 사연이나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여성들의 서사가 주를 이루며 2030 여성 관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억울함’이나 ‘편견’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갈등 요소가 된다.

레드북·실비아·식스…구색도 다양
‘여성서사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런던,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아떼오드 제공]

‘여성서사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런던,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아떼오드 제공]


개막을 앞둔 뮤지컬 ‘레드북’은 ‘여성서사의 끝판왕’으로 불린다. 배경은 19세기 런던.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시대가 요구하는 ‘조신한 숙녀’보단 ‘나’로 살고 싶은 안나가 세상의 비난과 편견을 이겨내고 작가로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옥주현·박진주가 주인공이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도 마찬가지다. 섬뜩하고 잔혹한 시를 통해 여성들의 삶을 풀어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재구성했다. 작가이자 엄마, 아내인 한 여성의 삶은 흔한 소재처럼 보이나,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희생을 강요받고, 그 과정에서 서른 한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성의 이야기는 메시지로서 강력하다.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의 삶을 재구성한 ‘식스 더 뮤지컬’(3월 10일 개막, 코엑스 아티움)도 흥미로운 여성서사 물이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와 역사에 가려져 잘 몰랐던 위대한 여성 6명의 삶을 조명한다. 무대는 여섯 왕비들이 모여 헨리 8세와의 결혼 생활로 가장 고통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가리며, ‘최후의 1인’이 리드보컬이 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제작사 클립서비스 관계자는 “결말에 이르면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한 명, 한 명이 주인공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며 “억압을 극복하고 함께 연대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말했다.

뮤지컬 ‘레드북’ [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레드북’ [아떼오드 제공]


여성 관객들에게 남성 중심의 서사가 ‘판타지’라면, 여성 중심 서사는 ‘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의 힘’이 크다. 실제로 한 공연계 관계자는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서서히 생겨났고,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여성끼리의 연대의식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혜원 교수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현재와 상관없는 시대와 지형을 향해 있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여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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