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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브라질의 ‘작은 우크라이나’…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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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지구

1년 넘긴 우크라 전쟁


한겨레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브라질의 한 침례교회에서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해 서로를 안아주고 있다. D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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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덴토폴리스는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에 있는 도시다. 면적 2300㎢, 서울 4배 크기의 땅에 5만2천명이 산다. 주민 75%가 우크라이나계인 이 도시의 가게 간판들에는 포르투갈어와 함께 우크라이나어가 적혀 있다. 2021년 시 의회는 만장일치로 우크라이나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지난해 이맘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유엔난민기구 공식 통계를 보면 전쟁 1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떠나 외국으로 간 난민은 800만명이 넘고, 우크라이나 안에서 피란길에 오른 이들도 800만명에 이른다. 4100만 인구 중 1600만명이 집을 떠난 것이다. 국외로 떠난 난민의 90%는 여성과 아동들이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등 접경국으로 빠져나간 뒤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이동한 이들이 많다. 유럽이 아닌 지역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캐나다는 70만명의 난민 신청을 받아 40만명 이상을 승인했다. 이스라엘, 이집트, 튀르키예(터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로 간 이들도 있다.

우크라인에게 곁을 내준 나라들


지구 반대편 브라질로도 우크라이나 난민 900여명이 이동해 갔고, 그중 50여명이 프루덴토폴리스에 둥지를 틀었다. 폭탄이 터지는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를 떠난 8살 소녀 아리나 하실로바는 브라질 내륙 소도시의 학교에서 매일 체조를 연습하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남편을 남겨둔 채 두 아이만 데리고 떠나온 엄마 마리나는 밤에도 몇번씩 사이렌이 울리면 지하실로 뛰어들어가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곤 한다.

라리사 모스크비초바는 하르키우의 집 지하실에서 러시아군의 폭탄을 피해 일주일 동안 세 딸을 끌어안고 지냈다. 마침내 주어진 탈출의 시간, 30분 만에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챙겨 딸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교전이 끝나지 않은 이웃 도시 폴타바로 옮겨가서 피란민들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국제기구와 접촉했다. 처음 생각한 곳은 가까운 독일이나 폴란드였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머나먼 바다 건너 브라질에서 왔다. 라리사는 가족과 함께 프루덴토폴리스에 정착해 우크라이나식 쿠키와 파이를 만들어 팔며 살아가고 있다.

이 도시가 브라질의 ‘작은 우크라이나’가 된 데에는 연원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도로를 지으려고 당국이 노동자들을 이주시켰다. 1895년께 우크라이나인 8천명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프루덴토폴리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인 갈리시아 지역에서 2만명의 빈농이 ‘검은 흙이 있는 풍족한 땅’ 브라질로 이주했다. 이민자들이 도착한 곳은 문명과는 동떨어진 미개척지였다. 이민자들은 질병에 시달리며 낯선 기후 속에서 길을 닦고 농지를 개간했다. 세기가 바뀌자 브라질 정부는 상파울루에서 파라나를 거쳐 가는 철도를 깔기 위해 다시 2만명 가까운 우크라이나인들을 데려왔다. 이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숫자에 9천명을 더했다.

우크라이나는 1917년 잠시 독립 공화국을 세웠지만 1922년 소련에 편입됐다. 소련에 저항했던 7천여명이 1950년대 초반까지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 이전의 이민자들과 비교해 교육 수준도 높았고 숙련 기술자들도 많았지만 그들 상당수는 캐나다와 미국으로 재이주했다.

우크라이나계가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본국을 제외하면 러시아다. 러시아 330만명, 캐나다 140만명, 폴란드 120만명, 미국 100만명 순이다. 그다음이 브라질이다. 60만명에 이르는 브라질의 우크라이나계 인구 가운데 35만명이 파라나주에 산다.

브라질 우크라이나인들의 70%는 지금도 ‘콜로니’라고 불리는 외딴 농촌 마을들에 거주한다. 빈농 출신 이주민들의 후손인 까닭에 지금도 현대화된 브라질 대도시인들과는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덕에 고향의 종교와 언어와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가 침공을 당하자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유럽국들보다도 앞서 난민들에게 인도주의 비자를 내주겠다고 발표했다. 5월 첫 난민들이 프루덴토폴리스에 도착하자 보우소나루는 직접 이 도시를 방문해 환영했다.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먼저 1997년 난민법을 제정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브라질에서 난민으로 등록돼 있거나 어떤 형태로든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은 60만명에 이른다. 그중 45만명이 베네수엘라인이다. 난민이나 망명자로 등록돼 있지는 않지만 베네수엘라에서 넘어와 살고 있는 사람 수는 더 많다.

최근 몇년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정치 혼란이 가중되고 미국의 제재로 경제난이 심해지자 대규모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을 기꺼이 받은 남미 국가는 브라질뿐이었다. 브라질은 난민 지위를 인정해주고 보호를 해줬으며, 당국의 지원을 포기하는 대신 ‘이주민’ 지위를 택한 사람들에게는 장기 거주 허가를 내줬다. 일시적 보호가 아니라 메르코수르 거주협정(MRA)에 따라 브라질 국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주고 사실상 영구 체류자로 만드는 ‘정규화’ 정책을 폈다.

정부들은 난민과 노동이주자를 엄격히 구분하려 하지만 그런 이분법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이민자를 천대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따라쟁이로 유명했던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였지만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난민 정책을 펼쳤다는 칭찬을 받았다. 가장 높이 평가받은 것은 2019년 난민 심사 ‘인터뷰’를 없앤 것이었다. 범죄 기록이 없는 난민 신청자에게는 인터뷰를 요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심사 기간이 크게 단축됐다. 서류를 갖추지 못한 난민들이 인터뷰를 피하기 위해 불법 입국하거나 그 과정에서 위험에 빠지는 일도 줄었다.

전쟁 피해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나라를 떠난 우크라이나인들의 고통에도 시한이 없다. 유럽연합(EU) 국가들 가운데 우크라이나 접경국들은 대부분 일단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불가리아, 체코, 리투아니아는 국경 문을 닫았다. 유럽연합은 난민들이 1년 동안 머물며 취업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임시보호지침을 발동했으나 그 1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웨일스의 우크라이나 난민센터들이 폐쇄됐다는 영국 <비비시>(BBC) 보도에서 보듯, 전쟁이 길어지면서 난민들을 대하는 서유럽의 분위기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에서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난민 이동을 불렀다. 이번 세기 들어 시리아와 예멘의 대탈출을 비롯해 여러번의 난민 엑소더스가 있었지만 한 나라에서 탈출한 사람의 비율로 보면 우크라이나가 가장 높다고 한다. 튀르키예 해안에서 주검이 된 시리아 아이의 사진이 여전히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번엔 전쟁의 피해자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각국이 찾아낼 수 있을까. 브라질식 난민 제도가 해법의 실마리가 돼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이나마 난민 이슈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이다.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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