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 |
(서울=연합뉴스) 최현석 기자 = 북한 관영 매체가 17년 전 남한과 협력해 일본으로부터 환송받은 '북관대첩비'를 소개해 눈길을 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일 '역사유적 북관대첩비' 기사에서 북관대첩비의 유래를 최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북도 북평사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와 양강도 등 북방을 가리키는 북관(北關) 지역에서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기록한 전승비이다.
비문은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서문과 본문 총 1천500자가 새겨져 있다.
서문에서는 정문부 의병대의 투쟁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대첩, 이정암 장군의 연안성 전투에 못지않은 의의가 있다는 점과 의병대 조직, 주요 전투 등을 서술했다.
본문에서는 왜적들이 침략하자 의병들이 떨쳐 일어나 용감하게 싸움으로써 북관땅이 평정되고 백성들이 다시 편안히 농사짓게 됐다며 비를 세워 그 공적을 후손만대에 전한다고 밝히고 있다.
북관대첩비 고유제 |
북관대첩비는 1708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현 김책시 임명리)에 세워졌지만 러일 전쟁 당시인 1905년께 일본군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가져간 뒤 오랫동안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됐다.
이후 비석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글이 새겨진 1t짜리 거석 아래 깔린 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됐다가 1978년 재일동포 사학자 최서면 박사에 의해 발견됐다.
비석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남한 정부는 반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비석이 있던 곳이 북한이라서 남한으로 반환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한·일 불교복지협의회가 2005년 3월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접촉, 북관대첩비의 북한 반환에 관한 합의문을 채택해 일본에 반환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반환에 합의해 그해 10월 약탈 100여년만에 반환됐다.
북관대첩비 1백년만에 고국의 품으로 |
2006년 3월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인도된 북관대첩비는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북한은 2만여㎡ 면적의 보호구역을 조성해 비를 보존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북관대첩비가 왜적의 침입을 반대해 용감히 싸운 우리 선조들의 투쟁 역사를 연구하고 주민을 '조선 민족 제일주의 정신'으로 교양하는 데 큰 의의가 있는 나라의 귀중한 역사유적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남북한 협력 등 지난했던 복원 과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도 작년 5월 역사의 이끼 속에 묻혀있던 북관대첩비가 100년만에 다시 임명리에 원상대로 세워지게 됐다고 설명했지만, 남북 협력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남한에서는 2006년 4월 25일 북관대첩비의 복제비를 건립해 경복궁에 전시했다.
북관대첩비 시찰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
harris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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