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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 (금)

이슈 양승태와 '사법농단'

1191명 누명 푼 4·3 판사 “몬 울엉 혼디 모영 고치 가게 마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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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ㅣ4·3재심 전담재판부 장찬수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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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찬수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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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잊을 법도 했지만 잊을 수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오거나, 자녀들의 부축을 받아 오기도 했다. 백발이 성성한, 깊게 주름이 팬 노인들이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양복 차림으로 온 이들이 있었다.

4·3 당시 수형 생활을 했던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 재판이 열리는 날에는 제주지방법원 203호 법정은 제주도 곳곳에서 온 이들로 가득 찬다. 법정은 기억투쟁 무대였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입을 통해 그날의 진실을 꺼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어린 자녀들은 노인이 돼 증언석에 앉아 연좌제에 시달려온 지난했던 인생사를 쏟아냈다.

그 재판의 한 가운데에 제주지방법원 4·3 전담재판부 장찬수(54) 부장판사가 있었다. 장 판사는 4·3 재판을 할 때마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오는 20일 광주지방법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법정에 나온 노인들은 재판장의 말이 들리지 않아 음성증폭기 헤드셋을 쓴 채 재판장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10분 남짓 짧은 시간에 70여년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려고 증언석을 왔다 갔다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판 전날 밤새워 글을 쓰고 와서는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오열하는 유족도 있었다.

장 판사를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은 제주도민만 1191명에 이른다. 모두 4·3 당시 일반재판과 군사재판을 통해 유죄를 받고 육지(제주에서는 다른 지방을 이렇게 부른다)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한 이들이다. 대부분은 한국전쟁 뒤 행방불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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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새로운 과제도 많습니다.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은 우리가 추구하는 두 가지 가치입니다. 4·3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고,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의 정신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달 31일 제주지법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서 장 판사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보름여 만인 17일 그를 만나 재판에서 언급한 ‘연대’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4·3특별법 제정과 개정 자체가 연대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제주도민들이 4·3 직권재심 재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서로 뭉쳐서 이뤄낸 연대의 결과물입니다. 저는 그 성과 위에서 재판해 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하므로 4·3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강조했습니다.”

2003년 검사 생활을 시작해 5년 남짓 근무한 뒤 2007년 12월 판사로 임관한 그는 2020년 2월 제주에 와 4·3 재판을 전담했다. 2021년 4·3 수형인에 대한 특별재심과 직권재심 조항이 담긴 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된 뒤에는 제주지법에 신설된 4·3전담재판부의 첫 재판장을 맡았다.

그에게 어떤 유족이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분 한 분 모두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감내하기 힘든 아픔을 겪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자신 때문에 오빠들은 물론 가족들 모두가 희생당한 한 할머니의 기구한 삶과 형님이 행여 살아오실까 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에 물을 떠놓고 비셨다는 장정언 전 도의회 의장의 사연이 마음에 닿는다”고 말했다.

무죄를 선고하는 재판은 어려웠다. 그는 “당시 재판 기록이 보전되지 않아 재심 절차에서 문제가 되는 쟁점을 판단하기 어려웠고, 4·3을 이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판단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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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3월16일 4·3 수형인 335명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린 뒤 4·3 유족들이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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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재심 절차는 서로 다른 이념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절차가 아니라,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재심 사유가 있는지, 그리고 4·3특별법에 따라 희생자 결정이 이뤄지면 재심 개시 결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대로 판단하는 절차”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가슴 속 꾹꾹 눌렀던 세월을 이야기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제야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고 했다. 이런 그들에게 법정은 ‘해원’의 무대였다. 무죄 선고를 받은 유족들은 판결문을 들고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이나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아 제를 지내고, 제사상에 판결문을 올려놓았다.

장 판사는 4·3 희생자인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유족에게 재판이 끝난 뒤 “이제는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겠느냐. 자식들한테 말씀하실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유족의 답변은 의외였다. 그 유족은 “아직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면서 “내가 왜 아픈 기억을 자식들한테까지 물려줘야 하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장 판사는 “그런 유족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지법에 전보되기 전에는 4·3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4·3 재심 사건을 맡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4·3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거든요. 300명이 넘는 군사재판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청구서가 접수됐을 때는 너무 막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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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수용소였던 제주주정공장 4·3역사관 앞에 세워진 조각상. 주정공장 수용소에 수감됐던 이들은 4·3 당시 불법적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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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4·3을 알아야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2003년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비롯해 여러 가지 4·3 관련 연구서와 진실규명을 다룬 책들을 보게 됐다”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법정에서 유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면서 재판의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4·3 재판을 할 때마다 희생자들의 배우자나 유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했다. 귀가 어두운 연로자들에게는 직접 다가가 묻기도 한다. 사연을 전하는 이들의 말은 법정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재판은 2021년 3월16일 군사재판 수형 행방불명인(형을 받고 수감돼 있다가 한국전쟁 기간에 행방불명된 이들) 335명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이라고 했다. 이날의 재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3~21명 단위로 나눠 18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는 그날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그는 “국가가 완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을 때 목숨마저 빼앗겼고, 자녀들은 연좌제에 갇혔다. 지금까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냈는지, 과연 국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몇번을 곱씹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없는 희생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저승에서라도 오른쪽 왼쪽을 따지지 않고, 낭푼(양푼)에 담은 지실밥(감자밥)에 마농지(마늘장아찌)뿐인 밥상이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죄가 선고되면 유족들은 재판부를 향해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며 인사를 한다. 그때마다 그는 말한다. “감사하다는 말은 상대방이 호의를 베풀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피해에 대한 명예회복을 너무 늦게 회복시켜준 데 대해 국가가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4·3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그가 익숙하지 않은 제주말로 떠듬떠듬 말했다.

“곧 봄철 낭에 봉지가 지고 보롬은 노물고장 흥걸 것 아니우꽈. 부디 어떵해서라도 고튼 일 허멍 가르각석인고 하는 말 듣지 않도록 느영 나영 몬 울엉 혼디 모영 고치 가게 마씸.”(금방 봄철 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바람은 유채꽃을 흔들 것 아닌가요. 부디 어떻게 해서라도 같은 일 하면서 제각각이냐는 말 듣지 않도록 너와 나, 모두를 위하여 함께 모여 같이 갑시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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