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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브라질에 남은 '마지막 반공 포로' 임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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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장교로 참전 후 포로생활…인도 거쳐서 브라질 정착

"악착같이 살아 남았다…죽기 전 고향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

연합뉴스

'반공 포로' 임관택 옹
[촬영 이재림 특파원]



(상파울루=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임관택(95) 옹은 1928년 충남 서천 죽산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중국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해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임평(1911∼1942) 애국지사다.

유년 시절 똑똑했다는 임 옹은 광복 후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한때 부친과 함께 활동했다는 이의 손에 이끌려서다.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그는 4년 뒤 6·25 전쟁 발발 이후 군에 차출돼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 단기 훈련을 거쳐 북한군 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여단장으로서 낙동강 인근까지 진군했다가 유엔군과 국군에 쫓기던 중 경기 여주 부근에서 포로로 붙잡혔고, 서울 영등포와 인천을 거쳐 거제도 수용소에서 2년여를 지냈다.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이른바 '반공 포로' 석방 때 그가 행선지로 선택한 곳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이었다. 인도에서 2년여를 머문 뒤 최종적으로 리우데자네이루를 통해 브라질에 왔다. 1956년 2월의 일이다.

임관택 옹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중립국을 택한 반공 포로 76명(총 88명 중 중국군 12명 제외) 중 1명이다. 반공 포로는 '제3국가 선택 포로'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브라질행 반공 포로는 임 옹을 비롯해 51명이었다. 나중에 포-한 사전을 편찬한 주영복 등과 함께 남미 땅을 밟은 그는 동료들과 비행기에서 연습한 브라질 국가를 공항에서 불러 브라질 사회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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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아닌 제3국행 택한 '반공 포로' 임관택 옹
[촬영 김지윤 통신원]



그로부터 67년이 흐른 지난 2일(현지시간) 주상파울루 대한민국 총영사관 회의실에서 마주한 임 옹은 "(브라질에서) 나는 수십 년간 무국적자였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포드 자동차 회사에 들어가 생계를 꾸린 임 옹은 브라질에 정착한 지 20년이 지난 1976년에서야 '국민'이 됐다. 브라질 국적을 취득하면서다.

임 옹은 "그즈음 캄피나스 대학교에 다니던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는) 1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민 온 일본계 2세였다"고 소개한 뒤 "아버지와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독립운동가 자녀이자 반공 포로로서 이국땅에서 일본 출신 여성과 결혼하게 된 인생의 굴곡을 뭐라 표현하기 힘들어 보였다.

함께 브라질에 온 다른 이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부두 노동자가 되거나, 걸인으로 살다 죽거나, 먹거리 해결을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가거나, 종교계에 투신했다"고 회고한 그는 "아마존에 갔다가 풍토병으로 죽은 이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악착같이 살았다"는 임 옹은 남·북미에 생존한 중립국행 반공 포로 연락책이자 관련 단체 회장을 맡는 등 열정적으로 지내다 국적회복 절차를 통해 2017년 한국 국적을 받았다.

지금은 자녀와 손자, 증손자 모두 한국인이자 브라질인(이중 국적)이다.

주상파울루 총영사관에 따르면 임 옹은 현재 브라질에 있는 마지막 한국인 반공 포로다.

내내 힘찬 어조로 과거를 떠올리던 임 옹은 말미에 "죽기 전 고향, 바닷가에 가보고 싶지만…"이라며 또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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