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축구황제’ 펠레. 사진=AP PH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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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30일(한국시간) 향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축구황제’ 펠레는 별명 답게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소도시인 트리스 코라송이스에서 태어난 펠레의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다. ‘펠레’는 어릴적부터 불린 별명이다. 왜 그런 별명을 갖게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e)’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펠레는 1977년에 발간된 자서전에선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한참 뒤인 2010년 10월 경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직접 이같이 밝힌 바 있다.
펠레는 사람들이 그 별명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처음에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많이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까지 펠레라고 부르자 결국 그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수로 성공한 뒤 그는 펠레가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펠레는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다. 하지만 준프로 축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영향으로 일찌감치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었다. 아버지는 펠레를 축구선수로 카우기 위해 선수로 뛰면서 시간제 근무까지 해서 생활비를 보탰다.
펠레가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1950년에 있었다. 당시 브라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브라질이 우루과이와 마지막 경기에서 1-2 역전패를 당하면서 우승을 놓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마라카낭의 비극’이었다.
이 경기를 라디오 중계로 듣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어린 펠레는 아버지를 위해 우루과이에 설욕하고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겠다고 예수상 앞에서 다짐했다고 한다.
펠레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타고 났다. 아버지 소속팀이었던 바우루AC 유스팀을 거쳐 1956년에는 브라질 명문 산투스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만 15세에 펠레의 실력은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펠레는 만 16세인 1957년 7월에는 브라질 국가대표로 뽑혀 아르헨티나와 친선경기에 출전했다. 브라질은 그 경기에서 1-2로 패했는데 그 한 골을 펠레가 기록했다. 만 16년 259일 나이로 골을 터뜨린 기록은 브라질 최연소 A매치 득점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펠레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이다. 덩시 만 17세였던 펠레는 월드컵 최연소 득점·멀티골·해트트릭·우승 등 각종 월드컵 기록을 갈아치우며 세계 축구 역사를 다시 썼다.
당시 키가 168cm에 불과했던 펠레는 구 소련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등장하자마자 환상적인 개인기와 폭발적인 득점력을 뽐냈다. 웨일스와 8강전에서는 결승골을 터뜨려 브라질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어 프랑스와 준결승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해 5-2 승리를 견인했고 개최국 스웨덴과 결승에서도 두 골을 책임져 5-2 완승을 일궈냈다. 펠레의 원맨쇼에 힘입어 브라질은 ‘마라카냥의 비극’을 딛고 사상 첫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후 펠레가 월드컵 무대에서 달고 뛴 등번호 10번은 축구에서 에이스의 상징이 됐다.
펠레는 스웨덴 월드컵 이후 유럽 명문 클럽의 수많은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브라질 정부는 1961년 그를 ‘국보’로 정해 해외 진출을 막았다.
펠레는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2경기 밖에 뒤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질은 펠레 없이도 대회 2연패를 이뤘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선 상대 팀의 살인적인 태클에 또다시 부상을 당해 우승을 놓쳤다. 하지만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다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월드컵 역사상 세 차례나 우승을 경험한 처음이자 유일한 선수가 됐다,
축구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룬 펠레는 1971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 친선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펠레는 A매치 통산 92경기에 출전해 77골이다. 이는 브라질 국가대표 통산 최다 골 기록이다. ‘펠레 후계자’로 불리는 네이마르(파리 생제르맹)가 올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A매치 77번째 골을 넣어 펠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펠레가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67승 14무 11패를 기록했다.
클럽 무대에서 펠레는 1974년까지 줄곧 산투스에서만 활약했다. 공식전 기록은 660경기 출전, 643득점이다. 이 기록은 단일 클럽 최다 골 기록이었지만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바르셀로나(스페인) 소속이던 2020년 12월 이 기록을 뛰어넘었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만 공식전 778경기에 출전해 672골을 넣었다.
하지만 펠레와 그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는 메시의 최다 골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펠레는 자신이 산투스에서 기록한 통산 득점이 1283골(1364경기)이라고 주장했다. 산투스서도 1091골을 넣었다고 밝혔다.
줄곧 브라질 산투스를 떠나지 않았던 펠레는 선수로서 황혼기를 맞이한 1975년 처음으로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북미사커리그(NASL) 소속의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해 1977년까지 세 시즌을 더 뛰었다.
펠레는 산투스에서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콘티넨털컵과 남미 클럽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두 차례씩 우승했다. 브라질 1부리그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를 차지했다. 상파울루주 리그에서는 10회 우승 및 득점왕 11회를 달성했다.
펠레는 축구 밖으로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1960년대 후반 소속팀 산투스가 내전 중인 나이지리아 라고스를 방문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치렀을 때 펠레를 보기 위해 48시간동안 전쟁이 멈추기도 했다.
펠레는 은퇴 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부터 3년간 브라질 체육부 장관으로 맡아 브라질 축구의 개혁을 이끌었다.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없지만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뽑혔다.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축구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인 고(故)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함께 함께 2000년 FIFA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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