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하향 안정세…내년 변수 많아 낙관 어려워
12월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민들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피해 방공호로 사용되는 지하철역에 대피해 있다. 유럽연합(EU)과 주요 7개국(G7), 호주 등은 이날 러시아의 전쟁 자금 조달을 어렵게 하기 위해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를 시행했다. 키이우 AP |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유럽연합(EU) 27개국과 미국·일본·영국 등 주요 7개국(G7), 호주 등이 합의해 12월 5일(현지시간)부터 시행한 러시아산 원유가격 상한제(유가 상한제)는 ‘배럴당 60달러(약 7만9000만원)’로 판매가격을 제한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러시아 우랄산 원유가격은 배럴당 70달러(약 9만2000원) 안팎이다. 상한 가격 이상으로 러시아산 원유를 수송하는 선박이나 해운사는 90일간 미국·유럽 보험사의 운송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G7 국가들은 전 세계 화물의 90%가량에 보험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실상 제도권 내에서 운송되는 거의 모든 화물이 대상이다. EU 회원국의 경우 자국 선박이 이를 위반할 경우 국내법에 따라 처벌한다. 참여국들은 내년 1월 중 상한 가격을 다시 평가하고 2개월 단위로 재검토할 예정이다. 시장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45일간(내년 1월 19일까지)의 이행기간을 부여했다. 디젤과 휘발유 등 석유제품에 대한 추가 가격상한제는 내년 2월 5일부터 시행된다.
서방국가들이 올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차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가했으나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제재를 시작하면서 서방국가들이 전망한 올해 러시아의 성장률은 마이너스(-) 12% 수준. 러시아의 올 1~9월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1.7% 축소되는 데 그쳤다. 이번 유가 상한제는 강력한 추가 제재가 필요하다는 공통된 인식에서 비롯됐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러시아는 세계 2위 원유 수출국이다. 러시아는 이번 조치가 국제원유시장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고 원자재 가격 상승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앞서 합의 소식이 전해진 12월 3일 “우리는 이 상한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상황 평가를 마치는 대로 어떻게 대응할지 알리겠다”고 했다. 러시아는 원유 생산량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의 조건에 맞춰 자국과 협력하는 국가에만 원유와 석유제품을 판매하겠다고 못 박았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이번 합의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2월 3일 “폴란드와 발트해 국가들의 주장처럼 상한선을 30달러로 하지 않고 60달러로 정함으로써 러시아는 연간 약 1000억달러(약 130조원)의 예산이 늘게 됐다. 기회를 놓치게 돼 유감”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0월 27일(현지시간)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러시아 전문가 모임 ‘발다이 클럽’ 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국가의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 합의를 앞둔 지난 11월 25일 “서방국가들의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 도입은 세계 에너지 시장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모스크바 AFP |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중국과 인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러시아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이다.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하루 217만배럴(올 4월 기준)의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하루 184만배럴을 수입하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규모가 크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12월 7일 “서방이 러시아산 원유에 가격 상한제를 설정하면서 중국이 더 많은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일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인도는 러시아에 수입해오는 비중이 우크라 전쟁 전 약 2%에서 지난 9월 23%로 치솟는 등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인도 외무장관은 12월 5일 “인도는 자국의 에너지 수요를 우선시하며 러시아로부터 석유를 계속 구매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산 원유를 대규모 수입하는 네덜란드 역시 EU의 러시아 제재 논의 당시 “유가 상한제에 결함이 있으며 에너지 안보와 금융시장 안정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네덜란드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은 2020년 기준 하루 약 54만9000배럴로, EU 회원국 중 가장 많다.
러시아는 우회로를 통한 수송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자국이 보유한 유조선인 ‘그림자 선단’을 최대한 활용해 원유를 내보내는 방안이다. 유가 상한제 합의 이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해 들어 100척 이상의 구형 유조선으로 꾸려진 그림자 선단을 만들고 있다. 그림자 선단은 국제사회의 주류 정유사·보험업계와 전혀 거래하지 않고, 국제 제재 대상국인 이란, 베네수엘라 등과 거래하는 유조선들이다. 애초 서방과 거래하지 않기 때문에 제재와 무관하게 러시아산 원유를 마음껏 운송할 수 있다. 보험을 이용하지 않아 각종 위험에도 노출돼 있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하면서 이윤을 남긴다. 최근 오래된 중고 유조선의 거래 가격 급등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례로 22년 된 그리스의 한 (쇄빙기능을 갖춘) 유조선의 경우 1년 전 1700만달러(221억원)에서 최근 3200만달러(416억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이렇게 판매되는 러시아산 원유는 시장 가격보다 낮게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2022년 11월 말 기준 일부 지역에서 거래된 러시아 우랄산 원유의 배럴당 판매가격은 52달러에 그쳤다. 서방국가들이 제시한 가격보다 낮게 거래될 경우 유가 상한제는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유가 상한제 시행으로 서방국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중국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정석 전문위원은 “그림자 선단이 활성화하면 러시아의 자금줄을 차단하려는 서방국가들의 목적 달성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제재를 피해 지속적인 원유 공급이 이뤄지면서 국제 유가의 하향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또 유가 상한제에 맞서 러시아산 원유가격에 고정 가격을 부여하거나 일정 비율 이상 할인하는 유가 하한제 카드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왼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2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기 전에 악수하고 있다. 사우디는 서방과 달리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 증산을 요청했을 때도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국제원유 시장은 유가 상한제 시행 이후에도 일단은 하향 안정세다. 올 8월 말 배럴당 100달러를 넘겼던 국제 유가는 최근 70~8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며 근 1년 새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경기 침체 우려와 금리 인상에 따른 공포가 그만큼 원유 수요를 억누르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의 추가 감산, 중국의 수요 증가, 내년 2월 러시아 석유제품 제재와 유가 상한제의 혼선 가중 등 원유시장 불확실성을 키우는 변수가 많다는 점이다. OPEC과 러시아 등이 참여한 OPEC+는 11월부터 하루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감산했다. OPEC+는 12월 4일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기조를 내년 말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현재 OPEC+ 산유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4185만배럴 수준이다. 다음 OPEC+ 정례 장관급 회의는 내년 6월 4일로 예정돼 있다.
미국의 재고 소진도 시장 불안을 키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 12월 2일로 끝난 한 주간 원유 재고는 전주 대비 518만6000배럴 줄어든 4억1389만8000배럴로 집계됐다. 원유재고는 직전 주에도 1258만배럴가량 줄어들었다. 4주 연속 감소세다.
러시아의 경고가 현실화할 가능성도 있다. 최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러시아가 공언한 대로 유가 상한제에 참여한 국가들에 원유 공급을 중단할 경우 러시아 수출은 기존 하루 350만배럴에서 100만배럴로 대폭 축소되고 유가와 석유제품 가격은 급등할 수 있다. 주요 IB(투자은행) 중 하나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12월 4일 “브렌트유가 배럴당 11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정부도 이러한 대외 변수들로 인해 연말을 거쳐 내년 상반기까지 국제 유가의 상방 압력이 커질 것으로 본다. 에너지경제연구원과 석유공사는 지난 10월 “올해 4분기(10~12월)와 내년 상반기(1~6월)까지 국제 유가(두바이유)가 배럴당 평균 89~98달러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 19일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과 한-미 재무장관회의를 연 후 공식만찬 행사에 앞서 관계자로부터 한국가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추 부총리는 당시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원유 가격 상한제 도입 취지에 공감하며 동참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기획재정부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정부는 유가 상한제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도입 취지에 공감하며 동참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내 수급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국내 정유업체의 국가별 원유 도입 비중은 사우디아라비아 34.8%, 미국 16.3%, 아랍에미리트(UAE) 9.0%, 이라크 8.6%, 쿠웨이트 7.5% 순이다. 반면 올 1월 5.53%에 달했던 러시아산 원유 비중은 전쟁 이후 줄어들면서 10월 0.96%에 그쳤다.
주요국들이 러시아산 원유 대신 대체지를 새롭게 모색하는 상황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이는 국내 경제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국책연구기관인 KDI는 12월 1일 ‘EU의 제6차 대러시아 제재와 원유시장 불안요인 점검’ 보고서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치솟은 유가가 최근 몇 달간 안정화되고 있지만 EU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발효로 국제원유시장이 다시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대희 실장은 “원유는 한정된 자원이다. 러시아 원유 수급을 제한하면 시장 어디에선가는 불균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러시아산 원유를 들여오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파급 영향을 받게 된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유가 상승은 국내 생산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3~6개월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된다. 통계청이 12월 2일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5.0% 상승했다. 석유류의 기여도는 지난 1월 0.66%포인트에서 6월 1.74%포인트까지 커졌다가 10월 0.42%포인트로 내려앉았다. 국제 유가가 내려가면서 국내 물가도 하향세를 보였다. 바꿔 말해 국제 유가가 불안해지면 물가도 다시 요동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웅 한국은행 조사국장도 11월 30일 한은 블로그에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면서 높은 에너지가격이 지속될 경우에는 성장에는 하방 압력이, 물가에는 상방 압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적었다.
시장의 불안감이 가장 우려스럽다. 당분간은 유가가 박스권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지만, 유가의 급격한 상하방 요인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수십달러씩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오정석 전문위원은 “유가가 단기간에 배럴당 30~40달러 수준의 변동을 보일 정도로 시장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다. 국가는 당장 내년 경제정책을 전망하고 대비하기 어려워지고, 기업들은 투자는커녕 사업계획도 짜기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걸음’ 여성들의 이야기 공간
▶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 10시간 동안의 타임라인 공개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