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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
2019년 11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때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떠날 사람은 떠나지 않고 남아야 될 사람이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 앞날이 창창하던 정치인이 떠나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람이 남긴 불출마 선언문도 화제가 되었다. 한국의 보수 정당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민폐라며 해체만이 답이라고 했다. 본인 표현대로 정당 안에서 자폭 스위치를 눌렀지만 그 정당은 파괴되지 않고 5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해체만이 정답이라던 정당이 정권을 잡았으니 이 사람이 틀렸던 것일까.
새 정부 등장 이후 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한계에 이른 느낌이다. 정당 외부에서 벼락스타처럼 등장한 사람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이제는 누구도 기이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치 초보 대통령의 국정 운영 성적은 지지율이 보여주는 그대로다. 집권당 내 권력 투쟁은 정치권이 최소한의 자정, 자치 능력을 상실하고 법관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갈등을 지속하는 와중에도 정권을 주고받으며 산업화, 민주화, 디지털 시대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나름의 능력을 보여왔던 정치권은 이제 자기들 문제만으로도 쩔쩔맨다. 정치권이 권력 투쟁으로 낮과 밤을 이어왔던 일이야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고 그게 정치이기도 하다. 문제는 사람이 달라지고 여, 야가 달라져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렁에 빠졌는데 자력으로는 빠져나올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던 이 사람 주장을 좀 더 진지하게 들어보고 싶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세연을 만난 이유다.
자유한국당 의원 시절의 김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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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바른정당 시절 의원회관에서 차를 한 잔 나눈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은 그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번 만나자고 했더니 금요일 저녁이면 좋겠다고 했다. 낮에는 길게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 2일 저녁 여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캠퍼스디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동일고무벨트 물류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해서 사무실, 청년정치학교 강의실 등으로 쓴다. 5년 만에 만났는데 몸에 밴 겸손,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등은 변함이 없었다. 명함을 건네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명함이 없다고 했다. 대주주로 있는 동일고무벨트의 전략고문, '청년정치학교' 교감, 사단법인 '아젠다 2050' 대표지만 어떤 한 직함을 명함에 새기는 게 다소 애매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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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제의 근원은 당원들입니다
표정은 순한데 말은 격했다. 보수 정당의 해체를 주장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문제의 근원이 당원이라는 것이다.
"총선 불출마 선언 당시 이야기를 못한 게 의원 지도부와 의원도 문제지만 더 근저에 깔린 문제는 당원이란 거였습니다. 제가 그때도 그 마지막 한 조각 용기는 발휘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사람 표현이 참으로 신랄했다. 일부 당원들이 민주공화국 시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여전히 왕조시대 신민의 멘탈리티, 아니면 국가주의 부속품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민주정당이 어울리지 않으니 그들의 터전을 아예 없애자는 것이다.
"아주 자유롭게 발상하자면 몇 년 정도 정당을 없애는 것, 그래서 정당이라는 것이 다시 원형에서부터 새롭게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이 되는 그 기간을 좀 가지는 게 훨씬 더 시민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편입된 정치인들 역시 그 정당의 도구가 되고 노예가 되는 이유가 자기 재선을 위해서는 공천을 받아야 되니까 괴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순환되고 있는 재생산 구조를 (공천을 통해) 깨려고 제가 21대 공천관리위에 들어갔습니다만 이 재생산 구조 속에 들어가서 뭐를 바꿔보려고 하면은 이게 시스템이 돌고 있기 때문에 그 관성을 이기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헌법상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정도의 강한 단절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시발이자 근원은 대통령 탄핵이다. 국민 10명 가운데 9명이 찬성한 일에 대해 당원들 사이에서 배신자니 역적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이 사람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비로소 민주공화국으로, 이제 현대적 민주국가로 거듭나는 그 계기를 거쳤다면 적어도 이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될 건데 여기에 대해서 쓰는 용어들이 배신자라는 둥 뭐 이런 역적이라는 둥 이게 왕조시대의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과 이런 발언과 욕설들을 한다는 거는 저는 민주주의, 그러니까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과연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좀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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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이 사람에게 보수 정당의 뿌리가 효와 충에 있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마치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 날카롭고 상세하게 반박했다. 가장 뜨겁게 열변을 토한 대목이다.
"공동체를 중요시한다는 차원에서 보수 정당 안에 충과 효의 코드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항상 앞선다는 생각이 보수 정당을 망가뜨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이후 보수가 완전히 분열됐습니다. 그런 성리학적 의식의 잔재가 어떻게 왕을 탄핵할 수 있느냐는 민주공화정에는 있을 수 없는 관점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그 충효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극복해야 될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력 잃은 좀비 정당이라고 비판했던 보수 정당이 집권에 성공했으니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집권했다는 것만으로 보수가 부활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출마 선언을 하셨을 때 썼던 표현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됩니다. 생명력을 잃은 좀비 정당이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역사의 민폐라고 했던 그 정당이 어쨌든 집권하지 않았습니까.
"집권이 가능했던 거는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이준석 당 대표가 연속으로 당을 이끌었기 때문에 그나마 교감 소통의 능력이 그때는 잠깐 정상 범위 안으로 들어왔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것도 간발의 차이로 겨우 이긴 거고요."
오히려 중병 환자가 연명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일 뿐 치유의 기회를 놓친 것일 수 있다며 2019년 보수 정당의 상태가 3기 정도의 중증이었다면 지금은 4기라고 했다.
"지금의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 말씀드린 거는 그 당시에는 야당이었기 때문에 그 국정의 직접적인 책임에서는 그래도 한 발 물러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상황 인지 능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으면 국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직접 안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런 영역 안에 지금 들어가 있기 때문에 더 위험도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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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그 미래에 대해서도 큰 희망을 두지 않았다. 대통령의 정치 경험 부족이 국정 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시스템 안에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리 위에 앉아서 다 파악할 수 있어야 되는데 이 부분이 아직 다 파악이 안 돼서 지금의 이런 시행착오들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권력의 작동 원리 같은 게 있다라고 이해를 해도 될까요.
"권력의 작동 원리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인 위원장님이 안철수 대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국회에 먼저 들어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국회와 정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추상적으로 학습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이 구조가 어떻게 서로 연결돼서 움직이고 있고,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생리로, 어떤 작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내면의 모습들을 관찰하고 들여다보실 시간이 있었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워낙 갑작스럽게 정치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럴 기회들이 없었고 지금 실무적으로 돌아가는 내용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서 문제들이 곳곳에서 불거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되고요."
지금 여당은 이준석 사태에서 보듯 만성적인 내전 상태로 빠지거나 아니면 가장 쪼그라든 보수 정당이었던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 자멸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 때문에 평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말이 간결하지 않았다. 전제와 단서가 많이 붙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고 곳곳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했다. 머릿속으로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말을 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3시간 남짓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한 뒤에 1시간 40분가량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웠다. 카메라기자가 철수한 뒤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자 신사였던 이 사람이 전사로 변했다. 말은 더 과격해지고 표현은 리얼해졌는데 알아듣기가 한결 쉬워졌다.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다. 이 사람과 약속한 바가 있어 들은 대로 옮겨 적지는 못하지만 모범생이나 금수저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신이 누구처럼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싸운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이 꽤 서운했을 것이다. 속으로 흘린 피가 적잖아 보였다. 싸울 줄 아는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잘 싸우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싸움을 통해 커온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3. 누구의 아들, 누구의 사위로 불리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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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 학창 시절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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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사위로 더 자주 불렸다. 할아버지가 세운 기업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해방되던 해에 조부 김도근이 설립한 동일고무벨트는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부산 금정구 일대에 부동산이 많아 이 사람 집안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수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버지 김진재는 38살에 국회에 등원한 이후 5선 의원을 지냈다. 부와 권력을 모두 갖춘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고 한승수 전 국무총리가 장인, 장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종사촌 언니다. 조금 넓게 잡으면 박태준, 정의선 등까지 혼맥으로 연결된다. 그런 이야기를 포함해 사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사람을 보면 정치적 이념은 학습되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 이미 누구의 손자라는 것 때문에 주목받는 소년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좀 나아지나 싶었지만 한 달도 안 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자수성가한 조부는 휴지 한 장도 아껴 쓰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를 통해서 기업에 대해 배웠고 아버지를 통해서 공인의 자세를 배웠다. 12년의 의원 생활 중 명절 연휴에도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내가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싶어 불안했단다. 할아버지에게 보수주의적 면모를 배웠다면 외할아버지에게서 자유주의자의 피를 물려받았다. 시대를 앞서가는 바람에 실패도 남들보다 먼저 겪었다는 외조부는 한중 수교 이전에 이백과 두보가 시를 읊었던 중국 명시의 현장을 유람 다닐 만큼 자유주의자의 기질이 농후했던 분이다. 외가 쪽으로 해방 전후해서 좌익 활동을 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교육된 것이라면 자유주의자의 면모는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1991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캠퍼스는 반정부 열기가 뜨거웠다. 이 사람은 학생운동에 거리를 두었고 그랬던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고 했다.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문화 속에서 개인의 사고와 행동이 제약되는 그 억압적인 분위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집권여당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기가 막히게 아꼈다. 자신은 택시를 타더라도 아들에게 차를 보내주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지금 와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 정해진 수순처럼 가업인 동일고무벨트에 입사했고 기업인이 되었다. 정치인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신문 정치면은 열심히 읽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005년 6개월의 간격을 두고 타계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그 전 해에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정치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불출마로 빈 지역구를 당시 MB 측근으로 불리던 인사가 차지했다. 공천 헌금 문제 등으로 온갖 잡음이 일었다. '당신 부친이 일군 이 지역구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안 된다, 선친의 유업이 기업만은 아니다, 정치 역시 아버지의 유업이다'라는 말을 외면하지 못했다.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65%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버지의 후광 덕이었다. 36살, 집권여당 최연소 당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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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던 소장 개혁파 의원
학생 시절 하지 못했던 저항을 국회 들어와서 시작했다. 야당일 때도 당내 비주류, 여당일 때도 당내 비주류였다. 민본21, 경제민주화실천모임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박근혜 비대위 시절 김종인과 만났는데 이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멘토로 대한다.
"정치에 들어와서 고분고분하게 내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민주당도 그렇지만 특히 국민의힘이나 그 전신인 정당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 용기를 내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그분들과 같이 하게 된 거죠. 그분들이 안 계시고 제가 역할을 맡았을 때 비겁해지면 안 되겠다, 용기를 내야 할 때 용기를 내야 되겠다 생각했죠. 인생 총량 법칙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 것에서도 저는 적절하게 총량을 맞췄다고 생각합니다."
네 편보다는 내 편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다. 같은 보수 진영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은 진보 진영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으면서 왜 내부를 향해 총질을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부잣집 도련님의 투정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가진 것이 많고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싸우기가 더 힘들었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을 가려가면서 했다.
"사실 그래서 MB 정부 초기에 민정수석이 감사원장으로 바로 가려고 할 때 '민본21'에서 연판장 돌리고 했던 적이 있는데 전화하면 다들 동의하는데 이름 올리자고 하면 다들 빠지더라고요. 이제 그 뒤에 어떤 일이 올지는 사실 짐작이 됐지만 제가 그 모임에서 연락하는 걸 담당하고 있는데 제 이름 빼는 짓은 못하겠더라구요. 이제 이름을 올리는데 사실 뒷목이 서늘하더라고요.
18대 국회에서 민본21 활동을 하며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 가운데 김성식이 있다. 김성식은 이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구요,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막 덤비기보다 과제의 무게에 대해 항상 고민했고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면의 깊이가 있다 보니 자주 나서지는 않았지만 김세연 의원이 나서거나 이야기를 하면 무게감이 실렸죠." 김성식/전 국회의원
탄핵에 찬성하고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정치적 열정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절이다. 지금도 바른정당 이야기를 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궤도를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궤도를 만들려고 노력한 시기였다. 정치를 하면서 행복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했지만 그 시절 순간순간 행복했을 것이다. 이상이 있고 동지가 있고 잠시였지만 가능성도 보였던 시기였다. "부와 지위가 대물림 되지 않고 개인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사다리를 세울 것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정강정책을 자기 손으로 썼다. 자신의 존재 기반을 부인할 수도 있을 만큼 그 당을 사랑했지만 궤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33명까지 불어났던 의원 동지들은 절대 흔들리지 말자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이 사람 역시 1년 만에 피눈물을 흘리며 투항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정당을 압살시키려 했던 당시 자유한국당의 행태에 대해 지금도 분노를 숨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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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미워해 본적 있으세요.
=뭐 인간인데요. 그러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왜 이 말씀을 제가 드리는가 하면 바른정당 이야기를 할 때 분노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거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제가 거쳐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렬한 적대감도 느껴지는군요.
=그거는 제가 스스로 만들어냈다기보다 그런 당사자로서 갈등 구조 속에 이제 들어있었던 사람으로서 너무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공격과 비난을 받음으로써 반사적으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싶습니다.
온몸을 던져 저항했지만 바위는 끄떡없고 자신들만 산산조각이 났다. 당분간 다시 대오를 추스를 힘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시간은 우리들 편이라고 믿는다.
"바른정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정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른정당의 DNA가 청년정치학교로 면면히 이어져 흐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짧으면 5년 길면 10년 후에는 우리 정치가 근본에서부터 판이 한 번은 흔들리는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구요, 그런 일을 시민들이 이루어낼 거라고 생각하고 제가 요즘 계속 열심히 함께 하고 있는 그 활동이 그 일들입니다."
꾸준히 자선 기부를 하는데 너무 부담되면 지속 가능하지 않으니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선을 지키려고 한다. 가끔은 그 선을 살짝 넘어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 선을 꽤 넘을 때도 있다고 했다. 정치를 통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기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바른정당 시절이 아마도 선을 대담하게 넘어본 시절이었을 것이다.
바른정당 시절 주최한 정책간담회에서 유승민 당시 대표와 악수하는 김세연(왼쪽)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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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정체성은 정치권에 파견된 시민
정치인들은 사진 찍히는 곳이면 어디든 얼굴 내밀고, 가운데 자리 못 앉으면 병이 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은 이름 알려지고 얼굴 알려지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다. 초선 의원 시절부터 자신은 중앙정치 무대에서 입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제가 타고난 리더, 자신이 어떤 무리에서 반드시 중심이 되고 내 말과 권위가 그 집단에 속한 모두에게 영향을 강하게 미치기를 원하지 않고 그런 카리스마를 제가 강하게 갖고 있지도 않고 그거를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권으로 파견 나온 시민으로 규정했다. 파견 나온 사람이니 여기에 뿌리내릴 생각이 없다.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욕심도 없고 어떤 자리를 내가 차지해야 된다는 생각,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저의 역할은 정치라는 무대의 제일 앞에서, 제일 중심에서 조명을 받는 게 아니라 옆에서 뒤에서 이 무대가 잘 돌아갈 수 있게 하는데 그런 일에는 정성을 다해서 꾸준하게 하려는 노력은 계속 해왔다고 자부는 합니다."
부산 금정구에서 아버지가 5번, 이 사람이 3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사람 부자가 30여 년 지역구 의원이었으니 이 사람 부자의 영지 같은 곳이다. 파견이 아니라 가업이라는 말이 더 사실에 부합하겠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재벌과 관료가 정치인과 유착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권에 파견되었던 존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3선 의원에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여의도연구원장을 지냈지만 존재감이 강한 정치인은 아니다. 비중 있는 당직을 맡은 적이 없고 '이 자리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먼저 손들고 나선 적도 거의 없다. 정치인들이 한번쯤은 하고 싶어하는 대변인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대변인에 필요한 재능이 없단다. 방송 활동이 별로 없다고 했더니 그러기에는 언변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기 보다 자신을 알리는 데 관심이 많지 않았다.
"제가 정치인들의 행태 중에 제일 비판적이었던 게 문자 공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해놓고 문자를 통해 알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국정감사 같은 거 할 때 자기 이름 알리겠다고 일단 먼저 터뜨리고 보는 것도 저와는 맞지 않더라구요. 그런 무책임한 폭로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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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격한 비판주의자
자신이 속한 정당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고 한국 정치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앞날에 대해서도 비관적이다. 비관적인 이야기를 과격하게 말한다.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간다, 붕괴의 시대다, 공동체가 길고 비참한 소멸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절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표현을 한 적도 있는데 왜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십니까.
"제가 그렇게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저의 보수적인 성향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후위기 문제는 파리기후협약에서 규정한 산업혁명 시점 대비 1.5℃ 이내로 막는다는 것은 이미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요. 이미 상당수의 기후학자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하더라고요. 2℃, 3℃도 막기가 쉽지 않고. 좀 더 상황이 안 좋아질 거라고 가정을 세워놓고 5℃까지 간다, 그러면 앞으로 강수량은? 해수면은? 태풍의 강도와 빈도는? 등등 많은 질문들이 떠오를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비해서 국가적 R&D를 어디에 집중을 해야 그래도 국가 또는 인류 공동체가 생존할 수 있는 데 더 도움이 되는가를 보면은 더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채택하는 게 저는 인간의 생존율을 더 높인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비관적인 표현을 쓰는 게 일단 듣기 싫으니까 안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막연한 낙관주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인간의 지속 가능성에 엄청난 위협을 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는 것 같다고 말할 때 이 사람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와 비슷한 비관적인 이야기를 곳곳에서 했다. 별로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데 어디에서 이 사람의 비관주의가 비롯된 것일까.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비관적인 말 때문인지 어딘가 우울한 기색도 있었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 억눌려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보다 앞서 절망하고 그 앞선 절망으로 희망을 찾고 그 희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다.
"저 혼자 계속 이런 훈련을 나름 해왔던 것 같습니다. 가장 비판적이고 가혹한 잣대를 가지고 저를 대상화해서 바라봐야 오만해지지 않고 어떤 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제가 비판적인 관찰,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게 몸에 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제 내면을 보던 그 필터를 끼고 바깥을 보니까 아 이게 지금대로 하면 나라가 망하겠다 지금대로 가면은 인류가 오래 존속 못 하겠다… 이런 생각까지 범위가 확장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요."
공무원 수를 줄이고 정부 조직을 대폭 줄여서 거기에서 확보되는 재원으로 기본소득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노동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지는 세상이 오면 그때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데이터 소유권, 기계세,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하자는 이야기를 할 때는 미래학자 같은 얼굴이다. 물론 이 사람은 그런 이야기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현재의 문제라고 말한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물권 보장 방안까지 이야기할 때 보면 이 사람이 어느 면에서 보수주의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코노미스트> 같은 외국 잡지 등을 정기적으로 보면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총론은 강해 보이는데 각론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는 몇 편의 언론 기고문만으로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20대 국회 당시 기본소득, 기후변동, 기계세, 메타버스 등을 공부하기 위해 만들었던 'Agenda 2050'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해서 계속 이끌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집요하다.
21대 국회의원 총선 불출마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은 없다. 대통령 선거 때도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국민의힘 당내 경선 과정에서 유승민을 도왔지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작년과 재작년 국민의힘 부산시장 유력 후보로 거론됐고 김종인이 40대 경제전문가가 나라를 이끌 때가 되었다고 해서 이 사람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최근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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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장 선거 출마 요청 있었잖아요. 지지율도 높았는데 결국 안 나갔습니다. 백지신탁에 대한 부담, 가업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결정이 부담이 돼 출마를 하지 않았다는 기사도 봤습니다만.
"그게 뭐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거고요. 이제 그 부분도 고려사항의 하나였는데 제가 직업 정치인으로 계속 갈 것 같았으면 또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정치권에 파견 나와 있던 입장에서 전업 정치인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 것 같았으면 그 결정을 할 수도 있었겠죠."
'한심하기 그지없는' 의원총회장이나 국회 상임위에 앉아있는 고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방감을 만끽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의원 배지를 달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끼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의원 시절부터 특권 같은 것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오늘 당장 한 끼의 식사, 하룻밤 잠자리를 고민해야 될 사람들, 의원 배지 한번 달기 위해 평생을 여의도 국회와 정당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두고 있다. 그런 사람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며 살기에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 조심스러워 한다. 돈과 권력을 다 가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했단다.
7. 시민이 정치인이고 정치인이 시민인 사회를 꿈꾸며
자신의 정체성을 기업인, 좀 더 정확히는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라고 규정했다.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지금 다가오고 있는 위기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해체, 당원들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주장 역시 정치인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일 테고 파괴적 혁신을 추진하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발상일 수 있겠다. 정치를 떠난 적도 없고 떠날 사람도 아니다. 현재로서는 선거에 나설 생각이 없지만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구상의 일부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변화는 파괴적 혁신을 추구하는 이 사람의 선택지 안에는 없는 듯하다.
"시민과 정치인 사이에 경계가 흐려져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지금은 그 불신의 골이 너무나 깊게 파여 있고 이제 그 장벽은 또 너무 높아서 시민과 정치인은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서로 거리가 멀어져 있지 않습니까. 시민이 정치인이고 정치인이 시민인 세상이 되어야 이게 가장 이상에 가까운 정치공동체로서 민주공화국이 구현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시민의 입장에 서서 정치인들을 견제 감시하면서 시민들이 훨씬 더 정치에 가까이 가도록 하는 체계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싶은 게 저의 소망입니다."
이 사람의 눈높이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지, 함께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남의 말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시대적 과제들의 해법을 말할 역량이 있는 사람인지 제대로 검증을 받아본 적도 없다. 시대의 변화를 읽는 촉수가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불편함을 못 참는 프로불편러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사람 고민의 크기가 한국 보수의 고민의 크기이자 한국 정치의 고민 크기라는 점이다.
아버지 명예를 지키고 선대의 유산을 온전히 이어가는 것이 이 사람의 오랜 숙제였다. 고 김진재 의원 10주기 행사에서 선친 타계 이후 인생은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생으로 살기로 했다고 말한 적도 있고 한국일보 김지은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삶을 말하다가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당신은 여전히 아버지로부터 미분화인 거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5시간이 넘는 대화를 마무리할 때쯤 요즘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버지에게서 분화, 독립이 완료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야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이제 쉰이다. 앞으로의 삶이 지나온 삶과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다.
※ 김세연 의원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10일) 밤 8시 20분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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