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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350 : 클래런스가 에미넴에게 미처 쏘지 못한 그 라임 - 배움의 기쁨
"래퍼와 깡패와 갈보들이 '진짜'의 대심문관으로서 지시를 내렸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종교요 아편이었으며 우리의 주인, 우리의 못되고 새로운 주인이었던 힙합 문화의 대사제들이었다."
영화 '8마일'을 아시나요? 에미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에미넴이 연기하는 주인공 래빗이 래퍼로서 본격적인 첫 걸음을 떼는 순간, 그가 동네 힙합 클럽에서 강력한 라이벌을 그야말로 '발라버리는' 랩배틀 장면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그 장면의 별 래빗(에미넴)이 아니라, 래빗에게 처참히 깨진 그 라이벌 흑인 청년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래빗이 파파독이란 이름으로 뒷골목에서 활동하던 이 청년의 기선을 제압한 한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너 실은 이름부터 클래런스잖아!" '클래런스'라는 이름에는 긴 시간 동안 교양을 쌓은 점잖은 사람, 말하자면, 이른바 '대대로 좋은 가문의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너 여기 뒷골목 클럽에 와서, 힙합씬에 와서, 무진장 '흑인'인 척, 이 곳에 잘 어울리는 쿨한 사람인 척 하지만, 너 사실 '클래런스'잖아. 부모가 '클래런스' 같은 이름을 선호하는, 돈 많고, 부족한 것 없고, 주류 세상에서 잘 나갈 수 있는 자원을 모두 갖춘 사립학교 도련님, 샌님이잖아!' 이 펀치라인 한 마디에 그전까지 힙합 클럽에 군림했던 뒷골목의 강자 파파독, 아니, 클래런스는 무너져 내립니다. '사립학교 도련님'이라는 '가짜 힙합'이 정곡을 찔리면서, '백인일지언정' 이토록 펄펄 끓는 진정성과 비트를 갖춘 주인공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8마일'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정말로 클래런스에겐 그 랩배틀에서 주인공을 이길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만약 클래런스가 청중들에게 대충 먹히는 센 단어나 조합하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라, 진짜 자기 영혼을 직면하고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고민과 진정성을 갖춘 래퍼였다면. 클래런스야말로 주인공보다 할 말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부모가 마련해 준 건전한 환경이 스스로가 속해 있는 자기 또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년 공동체에서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태생적 정체성의 문제. 사립학교에서도, 이른바 뒷골목 힙합씬에서도, 그 어디에도 실은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자의 자아분열감. 그런 정신적 분열감과 소외감이 이른바 백인 쓰레기 세상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고통보다 꼭 덜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클래런스가 "그래, 나 클래런스다! 그런데 너 '흑인 클래런스'로 살아간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알기나 하냐!"는 흐름으로 맞받아칠 수 있도록, 본인을 정면으로 고찰하는 인물이었다면 어땠을까.
오늘 낭독하는 책 [배움의 기쁨]을 읽으면서, '8마일'의 그 클래런스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난 2월에 출간된 [배움의 기쁨]은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라는 미국의 1981년생 흑백 혼혈 철학자가 썼습니다. 윌리엄스는 말하자면, '파파독'에서 인생을 끝내지 않고 각성한 클래런스입니다. 스스로와 스스로가 속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를 용기있게 성찰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클래런스입니다.
"연애할 때 상대방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대하느냐, 얼마나 존중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우리 중에 그런 연애를 지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어떻게 후리느냐, 얼마나 뜯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자친구를 향한 애정 따위는 낄 자리가 없었다.돈, 갈보, 옷. 흑인 소년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따먹고 삥 뜯자', '깡패는 위로, 갈보는 밑으로', '내가 갈보들에게 줄 건 단단한 자지와 풍선껌 뿐.' (주: 모두 유명 래퍼들의 노래 가사 일부입니다.) 이것이 우리 뇌리에 (문자 그대로) 현란하고 요란하게 박히던 말들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래퍼 제이 지(Jay-Z)는 우리에게 똑똑히 말했다. 우리는 갈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런 행동은 제이 지의 사전에서 멋대가리 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제이 지와 같은 부류의 말을 새겨들었다. 스테이시를 향한 내 마음이 그랬듯이 설령 여자친구에게 애정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혼자 가슴속에 묻어놔야 했다. 그런 감정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녔다간 아무에게도, 심지어 여자친구에게도 존중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이런 자기중심주의를 견지하며 그것을 '포주질'이라고 불렀다.
나는 스테이시와의 관계에서 항상 포주질에 최선을 다했다. 스테이시는 수많은 소문을 몰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매리언이라는 동급생과 잤다는 말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스테이시는 부인했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았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자신을 바람둥이 포주와 날라리 색정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배움의 기쁨]은 지난해 [북적북적]에서 낭독하기도 했던 [배움의 발견](타라 웨스트오버 著)을 의식한 제목으로 보입니다. 이 두 책의 저자들이 털어놓고 있는 경험에는 실제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별나게 반지성적인 분위기를 헤쳐 나왔습니다. 자신의 공동체를 지배하는 악습의 알을 깨고 나와서 배움의 길을 걸음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스스로와의 화해를 이룬 사람들의 자서전입니다. [북적북적]에서 역시 지난해에 낭독했던 [언오소독스](데브라 펠드먼 著)까지, 세 권의 책이 모두 그런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발견]이나 [언오소독스]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구습, 폭력, 억압 속에 태어나서 그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 저자들의 정신적 고통과 승리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오늘의 책 [배움의 기쁨]은 좀더 논쟁적입니다.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가 깨고 나온 알은 [배움의 발견]이나 [언오소독스]처럼 과거에 형성돼서 현재를 옭아매는 구습이 아니라, 아주 동시대적인 봉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놨을 때 윌리엄스는 자신이 속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서는 야유나 비난을 꽤나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흑인 사회가 형성해 온 힙합 문화가 현 시점에서는 사실상 흑인 청년들을 가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고 한계이다, 라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도 정확히는, 최근에 아프리카에서 이민으로 건너온 사람들 말고, 미국 노예제 후손 흑인들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노예제의 후손들이 빈곤과 차별에 대항해 싸우면서 미국 주류에 대한 저항으로 형성한 그 힙합 문화가 스스로들을 가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갱스터들과 연관이 있었던 래퍼들이 그냥 스타 정도가 아니라 무슨 교주처럼 떠받들어지면서 정신세계의 사실상 전부를 형성하는 문화가 공동체에 지배적으로 깔려있고, 그 문화는 배금주의와 반지성주의, 여성혐오로 점철돼 흑인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스스로들이 미래로 나아가며 발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둘만 남았을 때 나는 스테이시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꺼내기 전에 보건실까지 보내버릴 기세로 매섭게 따귀를 갈겼다. "착"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무들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퍼피(래퍼 퍼프 대디)가 쓰는 드럼머신에서 하이햇(드럼의 심벌즈) 소리만 따로 떼어내면 딱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 책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저자의 학창시절 경험담이 여럿 나옵니다. 데이트폭력, 그룹섹스, 뒷골목 다툼. 단순히 가난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윌리엄스가 적나라하게 기술하는 (노예제 후손)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는 빈부를 막론하고 이른바 '힙합정신'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클래런스'들도 가난한 흑인 청년들 못지않게 '포주질'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 사회에서 잘 나가고 세련되고 멋진 사람은 범죄의 세계를 살짝살짝 넘나들고 거침없이 사랑 없는 그룹섹스를 즐기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여자친구를 때리는 것쯤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래퍼들이 읊는 '센 가사'를 그대로 실천하며 사는 청춘들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Losing my cool'입니다. 스스로 멋진 사람이기를 포기하기,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찌질한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기'라고 풀이할 수 있는 제목입니다. 크게 돈이 안 되는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게 현재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서는 찌질한 사람이 되는 길이며, 스스로는 바로 그 길을 선택해 그 사회를 빠져나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는 직관적으로도 수입차나 금목걸이보다 시간, 독립, 자유 같은 개념이 더 값비싸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독서나 사유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불끈 솟는 한편으로 겸손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절대 손목에 내걸 수 없는 종류의 성공이었다. 지적 노동의 열매가 아무리 달콤하다고 한들 흑인 동네에서는 큼지막한 휠을 단 레인지로버처럼 '뻐길'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의 이런 분위기가 한국 독자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시대적인 봉건이 꽤 있지 않나,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현재 다수로부터 세련되거나 올바른 방향이라고 칭송받는, '이런 건 좀 문제 아니야?' 반론을 내놓았다가는 그 세련된 인구에서 이탈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분명히 처음엔 어떤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억압이 되어버린 문화적 코드들이 우리에게도 존재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이렇게 변질돼 한동안 영향을 미치는 코드들이 존재할 겁니다. 바로 그것들을 동시대에 인식하고, 용감하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성의 힘에 대해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의 지나친 배금주의 분위기 역시 놀랄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점이 있습니다.
"파피는 표정을 바꾸고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면서 자신이 평생에 걸쳐 수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어떤 소설도, 아니 어떤 책도 즐거움을 느끼려고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파피는 오스카 와일드가 권할 법한 방법으로 소설을 감상하거나 단지 어떤 소설이 아름답게 쓰이거나 절묘하게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도 무조건 펜을 쥐고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아들아. 밑줄 긋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게 아냐. 뭐라도 지식을 건져서, 뭐라도 실용적인 지식을 건져서 내 인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거였지.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나한테 뭐라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그래서 나한테 필요한 지식은 모두 책 속에 있을 테니까 책만 열심히 읽으면 다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래, 책이란 걸 그냥 예술 작품으로 취급할 수가 없었지."
나중에 다시 그 말을 생각하자 원래는 재미있어야 할 경기에 죽기 살기로 임하면서 즐거움은 남의 이야기로 미뤄두었던 세인트앤서니의 선수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이 진짜든 허상이든 간에) 거기에 걸린 것이 워낙 크다 보니 다른 아이들에겐 신나서 하는 운동이 그들에겐 일종의 노동이 되어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파피가 내 나이 때 똑 같은 책을 즐겁게 읽지 못했기 때문임을. 그러자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시대를 잘 타고났을 뿐이란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파피에게 독서에 대한 칭찬을 받았을 때 느꼈던 뿌듯함이 돌연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에게 갚아야 할 큰 빚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내 친구나 동급생들이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전문가로서의 지위와 피상적이고 물질적인 부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부채감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배움의 기쁨]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에게는 [배움의 발견]의 타라 웨스트오버, [언오소독스]의 데브라 펠드먼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윌리엄스는 훨씬 운이 좋았다는 점입니다. 타라와 데브라가 순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을 키웠던 부조리에 눈을 떠 탈출에 이르러야 했던 반면에, 토머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전 세대에서, 지금보다 훨씬 명백한 인종차별 속에서 한 인간으로 대우받고 발전하고자 몸부림쳤던 아버지라는 기준이 이미 토머스에게는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배움의 기쁨]은 동시대 자기 또래를 압도한 힙합 문화에 경도됐다가 결국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들이 지적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지식과 독서를 감히 기쁨과 연결시켜 보지 못했습니다. 공부하고, 탐구하고, 고뇌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공부에 매진하던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이 마련한 터전 위에서 지적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순간의 감동이 굉장히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야말로 토마스 채터턴 윌리엄스 부자의 스토리와 일맥상통하는 경험을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대차가 극심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전쟁 직후의 세계 최빈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작 70년.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인생이 모두 극적으로 판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좀더 열린 마음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감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미국인이 쓴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새삼 들었던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는 배금주의에 대한 태도도 그렇습니다. 빠른 속도로 가난을 극복하면서 돈이나 성장에 경도된 점이 있었던 우리 부모 세대의 배금주의를 지금의 잣대로 비판하면서, 당신들이 그랬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조금 공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전 세대가 어떤 면에선 피할 수 없었던 배금주의 속을 지난하게 헤쳐오면서 만들어 준 기틀에서 시작한 우리가 이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배금주의와 천박한 부의 과시로 살 만 하지 않다면, 이른바 헬조선이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그런 분위기를 해체하는 데 일조할 방법은 없을까… 이제 막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학자가 스스로가 속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동시대에 대해 내놓은, 일종의 신랄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보고서를 읽으며 했던 생각입니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철학자 윌리엄스는 이 책 속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근대 러시아의 인물들에게 놀랄 정도의 공감을 느끼며 자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순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배움의 기쁨]의 배경만 보고 우리에겐 조금 낯선 문화, 먼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정작 이 책을 펴들었을 때, 문득 나와 내 부모의 어떤 순간들과 놀라울 정도로 겹치는 것을 발견하면서 나와 내 사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다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북적북적과 함께 기쁨 가득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산북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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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리 기자(ailee17@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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