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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취재파일] 윤석열 정부의 '전략적 선명성'에 주어진 고차원의 외교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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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안보,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나토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과도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글로벌 리더 국가로서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 수호에 더욱 적극적으로 기여하고자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6월 30일, 스페인 동포 간담회)


A, B, C 세 명의 사람이 있다. A에게 B는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고,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아온 사람이다. A에게 C는 안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근래 여러 사업을 동업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B와 C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각자의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한때 '데탕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기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C의 살림살이가 급속도로 좋아지면서 B가 차지하고 있던 리더로서의 역할을 위협하고 있는 게 갈등의 직접적 배경이다.

복잡한 삼각 관계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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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A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범 답안은 'B, C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면서 양쪽과 사이좋게 지내고, 여건이 된다면 양측이 원만하게 지낼 수 있도록 중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범 답안일 뿐이다. 현실은 교과서 속에 있지 않다.

B와 C의 갈등은 많은 경우 A에게 양측 중 어느 한 곳에 설 것을 강요한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는 줄타기, 이른바 '전략적 모호성'은 양측 모두로부터 버림받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B와 C는 서로 직접 맞붙으면 큰 싸움이 날 것을 알고 있기에 상대에 대한 분풀이를 A에게 할 수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A가 B나 C 중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다른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는 격이다. B의 편을 들면 최근 C와 동업을 해온 여러 사업은 차질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B는 다른 마을에 사는 데 비해 C는 같은 마을에 살다 보니 이래저래 얼굴을 마주칠 일도 많다. 또, C는 집안의 골칫거리인 A의 동생 A'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C와 등을 돌릴 경우 C가 A'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손을 떼 A'가 집안의 더 큰 골치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C의 편을 들기도 마뜩잖다. 우선 C는 B에 비해 아직 못 미덥다. A가 사는 마을은 물론 A가 교류하는 다른 마을을 포함할 때 C보다 B의 편을 드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C 쪽에 서는 순간 B는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A와 B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돕자고 약속해놓은 것도 있고, 동생 A'는 항상 B와만 상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B와 척을 졌을 때 A'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기 어렵다.

삼각 관계에 더해진 다차원의 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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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으로도 A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D, E와의 관계도 있다. D는 B와 절친인데, A와는 껄끄러운 관계다. A와 D 사이에는 어두운 과거도 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사는 D는 C를 비판하며 B에 밀착하고 있다. A'와 사이가 좋지 않은 D는 A'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A가 B에 더 가깝게 다가서려면 D와의 관계도 풀어야 되는 상황인데, A 집안 사람들은 D에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D는 과거 A에 대한 악행에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그런데 A가 B에 다가서는 걸 주저한다면, B는 여러 문제에서 A보다 D의 편을 들 가능성이 높다.

A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E는 최근 급속도로 C와 가까워지고 있다. 사실 C와 E는 과거 같은 학교에서 동문수학하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이다. A가 C와 거리 두기를 하면 E와의 관계 역시 멀어질 수도 있다. E 역시 A의 동생 A'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것도 고려 사항이다. 그런데 B와 E는 최근 적대적 관계다. A가 C의 편을 들면 결과적으로 E의 편을 들게 되는 셈이라 A 입장에서는 B와 적대적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E가 도저히 용납 못 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C가 여전히 E의 편을 들고 있다면, A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A, A', B, C, D, E에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대입하면 위의 상황은 현재 국제 정세와 흡사하다. 3박 5일간의 나토정상회의 기간 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스페인 동포 간담회에서 한 서두의 이야기는 미중 대결 구도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 편에 확실히 서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는 신전략 개념을 통해 중국을 '체계적 도전' 세력, 즉 견제 세력으로 지목한 만큼, 우리의 뜻과 관계없이 나토의 가치에 대한 동조는 우리나라 역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정상회의 참석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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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나토정상회의 참석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나토정상회의 참석 자체가 미국과 중국 중 특정 입장에 서는 것으로 비칠 소지가 다분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른 국가들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참석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의 이 말은 이런 딜레마적 상황을 윤 대통령이 고민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토정상회의 참석을 결정한 건 "규칙에 입각한 국제 질서의 편에 서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생각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이 관계자는 말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즉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토정상회의 참석의 결정적 이유였다는 취지다. 한국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반대급부가 따를 수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러시아의 만행이 한국의 선택을 용이하게 했다는 취지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 질서의 많은 것을 바꿔 놨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고 대규모 군사작전이다. 또, 탈냉전의 21세기에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깨뜨려놨다. 전통적 안보, 즉 군사안보 협력에서 기후 변화, 테러리즘, 인간 안보 등 포괄 안보 협력으로 이동했던 나토가 다시 집단안보, 즉 군사안보 분야로 무게추로 이동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도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한국과 같이 중국 관계에서 딜레마적 상황에 있는 많은 나토 회원국이 나토의 향후 10년간 운영 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신전략 개념에서 중국을 사실상 적대적 세력으로 규정한 것도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만큼, 중국도 러시아와 함께 나토 회원국의 위협으로 규정하게 된 셈이다. 나토는 신전략 개념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강화와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양국 상호 간의 보강된 시도는 나토의 가치와 이익에 배치된다'고 적었는데, '국제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양국의 시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중국이 공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유럽 국가와 다른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 따르는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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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경제적 교류가 많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당장 중국의 반발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견제 세력으로 규정한 나토 회원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한국은 중국과 같은 지역 내에 있고, 한국의 최대 안보 이슈인 북한 문제에 중국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전략적 모호성', 나아가 '중국경사(중국에 치우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적 보복에 홍역을 치렀던 과거 정부의 경험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 등을 돌렸을 때는 더 큰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자연스레 제기되는 우려다.

나토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과거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미국 경사라는 '전략적 선명성'을 선택한 한국. 그래서 향후 해법으로 제시는 되는 게 중국에 대한 외교적 메시지 관리의 필요성이다. 한국이 미국의 편에 서지만, 한국이 굳이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단순히 미국의 편에 서는 것과 미국과 함께 혹은 한국이 앞장서서 중국을 비판하는 것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중국을 먼저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와 가치, 연대라는 수사를 강조하더라도 그 반대편에 있는 대상을 '중국'이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해 불필요한 자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나토 사무총장 역시 신전략 개념에 중국을 견제 세력으로 사실상 규정하면서도 "중국은 나토의 적은 아니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앞장서서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다만, 나토가 중국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할 때, '나토 가치는 정부 정책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나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기는 이전보다 분명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한미 관계가 좋았을 때 한중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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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에 대한 외교 메시지 관리의 필요성은 전제하면서도 미국 경사에 따른 중국의 반발 우려가 과장되어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과거 전례상 한미 관계가 좋았을 때 한중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미 관계가 좋았을 때 한중 관계가 좋았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한미 관계가 나빴을 때 한중 관계는 나빴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발언이다. 이유는 이렇다.

한미 관계가 좋지 않을 때 중국은 한중 관계에서 오롯이 한국만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한미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면, 중국을 한국을 상대할 때 한국 뒤에 있는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이 한국에 대한 유·무형의 보복을 가할 때, 미국이 반발하고 나선다면 중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한 조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한국의 입장에서 강력한 방어막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에 다가서려고 했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분명하게 다가서지는 못하고, 그 과정에서 한미 관계는 느슨해진 결과 중국으로부터 유·무형의 보복을 당한 과거 정부의 사례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반면교사로 소환된다.

과거와 다른 중국의 위상과 '연루'에 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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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과거의 경험칙이 현재도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 다르다. 명실공히 글로벌 톱2(G-2)로 거듭나고 있는 현재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에 비해 같은 마을에 사는 한국을 상대할 도구가 많아졌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요소수 사태'와 같이 결과적으로 한국을 힘들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수단의 사용 중에선 한국은 물론 한국의 뒷배인 미국이 마땅히 문제 제기하기 마땅치 않은 것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한미 관계가 나쁘지 않은 한중 관계를 낳는다'는 명제가 실현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우려는 동맹 이론이 제기하는 '연루'에 대한 우려다. 한국이 미국에 밀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중 간 충돌이 벌어진다면, 한국은 자연스레 미국의 편에 서서 미중 간 충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중국을 향한 일관되고 전략적 메시지의 발신이 자리할 공간 자체가 향후 미중 관계의 전개에 따라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외교는 '말'을 통해 하는 것인 만큼 해법을 다시 미중 양측 간 전략적 소통 강화가 제시된다. 미중 양측에 우리나라의 전략적 환경을 이해시키고, 양측 모두에서 우리나라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일관되게 주지시키면서 우리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전략적 자율성을 봉쇄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신냉전의 도래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중러의 대립 구도는 탈냉전을 넘어 다시 신냉전의 국제 정세를 야기하고 있다. 냉전기와 같이 신냉전 체제는 특정 편에 설 것은 개별 국가에게 강요한다. 중립을 지켜온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건 변화된 국제 정세의 상징적 단면이다. 문제는 한국은 유럽 국가와는 달리 미국, 중국은 물론 동북아라는 공간에서 북한, 일본, 러시아 등 국가들과 중첩적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전략적 자율성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신냉전 체제는 개별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을 봉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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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나토의 신전략 개념에서 냉전의 메아리가 들린다'는 기자의 질문에 나토 차원의 고충을 털어놨다. "나토는 (전쟁의 위협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서는 걸 방지할 책임이 있다"며,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만 분쟁의 일부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나아가 중국을 압박하기로 방향을 정했지만, 확전은 막아야 하는 나토 차원의 고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의 고민은 나토보다 더 깊고 복합적이다. 미국의 편에 서되 중국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고, 중국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되 중국이 북한에 대한 긍정적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강화하고, 또 그 과정에서 우리 국민과 일본을 설득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상황. 선명한 외교 기조를 내건 윤석열 정부에게 고차원의 외교 방정식이 숙제로 주어졌다.
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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