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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러 ‘다극체제’ 의지 실린 침공…미 ‘일극체제’ 수호역량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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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는 세계, 재편되는 질서

미, 부상하는 중국과 대결 위해

인도·태평양 역량 집중하는 사이

러, 에너지 무기로 도발한 전쟁

서구, 전례 없는 제재 나섰지만…

세계화로 러·중에 경제의존 커져

인도·중남미 등 이탈 제재망 균열

미, 쿼드·IPEF 통한 동맹 등 결집은

중·러+터키·이란 등 ‘연대’ 초래해

반미 지역 블록 형성하게 할 수도

우크라 전쟁 끝나도 공급망 재편

세계 경제 분절화 피하긴 힘들 듯


한겨레

지난달 5일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네츠크주 마리우폴에 포격으로 부서진 아파트 앞 길거리에서 주민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마리우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최대 격전지였으나, 러시아군은 지난달 20일 마리우폴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마리우폴/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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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이 100일 넘게 이어지면서 세계는 미국에 도전하는 두 ‘권위주의’ 대국인 중국·러시아가 고립될지, 이들이 중심이 된 하나의 블록이 형성될지 결판나는 시험대에 서게 됐다.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를 유지하려는 관성과 중·러가 하나가 돼 ‘다극체제’로 나아가려는 원심력 사이의 격렬한 각축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부상하는 중국’과 대결하기 위해 대외정책 역량을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는 틈을 타 러시아가 도발한 전쟁이다. 미-중이 대치하는 주전장인 대만해협이 아닌 유럽 전선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패권에 기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려는 미국의 의지와 역량을 미리 시험해보는 무대이다.

이런 상황은 지난달 20~24일에 이뤄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일 순방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은 이 방문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의 각론과 총론을 각각 진전시키는 다급한 행보를 했다. 각론에서는 한·일 두 나라와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총론에선 중국 포위를 위한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인도 네 나라의 협력 틀인 ‘쿼드’(Quad) 정상회의와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출범식을 열었다. 인도·태평양을 방문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18일 기자회견에서 “담대하고 확신에 찬 지도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 ‘결정적 시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내세우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은 미국의 패권이 위협받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맹을 규합해 중·러 등 ‘수정주의 세력’을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이 전략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12월과 2018년 1월 각각 내놓은 ‘국가안보전략’(NSS)과 ‘국가방위전략’(NDS)이었다. 이들 문서에서 미국은 중·러를 ‘미국의 도전자인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자신들의 권위주의적 모델과 부합하는 세계를 형성하고 다른 나라들의 경제적·외교적 및 안보 결정들에 대한 거부권을 얻으려 하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해법으로 미국은 “인도·태평양, 유럽, 중동, 서반구에서 우호적인 지역 세력 균형을 유지”하겠다며, ‘세력권’ 다툼을 펼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2021년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때 흐트러진 동-서 양쪽의 동맹 재규합을 하는 한편, 인도·태평양 전략 강화에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한달 뒤인 2월19일 뮌헨 안보회의에 참가해 현재 인류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변곡점’ 위에 있다며 “로마부터 리가(라트비아)까지 유럽연합(EU)의 파트너들과 함께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달인 3월엔 인도·태평양으로 눈을 돌려 쿼드의 첫 화상 정상회의를 열었고, 9월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의 동맹체인 오커스(AUKUS)를 발족시켰다. 경제에선 취임 직후인 2월부터 △반도체 △대용량 배터리 △핵심 광물 △의약품 등 4개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을 점검하는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공급망 재편’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북유럽의 중립국이던 스웨덴·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신청했고, 전후 70여년간 평화주의 노선을 지켜온 독일도 군비 강화를 결의했다. 러시아의 ‘오판’으로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뤄졌다. 미·일은 지난달 23일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의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에서 2%대로 대폭 늘리고, 일본이 직접 상대의 영토를 타격할 수 있는 ‘적기지 공격 능력’을 확보하는 길을 터줬다. 재군비에 나선 일본이 중국의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게 한 것이다. 미국은 나아가 한·미·일 3각 군사협력을 통해 핵을 가진 북한과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려 시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은 세계 지정학 질서의 3대 축인 러시아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을 총동원해 전례 없는 제재를 주도했다. 하지만 미국 패권의 한계와 균열 역시 분명히 드러났다.

개전 직후인 3월2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러시아군 철수 결의안에 대해 193개 회원국 중 찬성한 국가는 141개국, 반대는 5개국, 기권은 35개국이었다. 기권한 나라 가운데 중국·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주요국이 대거 포함됐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러시아를 제명하는 4월7일 투표에선 찬성 93개국, 반대 24개국, 기권 58개국으로 반러 분위기가 완화됐다. 브라질·인도네시아·사우디아라비아·멕시코 등 이른바 ‘미들파워’ 국가들이 기권 대열에 동참하며 ‘비미적인’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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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냉전 해체 이후 급속히 진행된 세계화로 인해 중·러와 경제 상호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는 에너지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로 인해 중국·인도·터키·브라질·남아공 등은 전쟁 뒤에도 러시아산 석유와 비료 등을 계속 수입하며 대러 제재망에 균열을 내고 있다.

남미의 친미 국가 브라질조차도 수출 농작물에 필수적인 러시아 비료를 의식해, 러시아와 교역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인도는 헐값이 된 러시아 석유 수입량을 3월 43만t에서 5월 336만t으로 늘리며 큰 경제적 이득을 보는 중이다. 유럽연합도 석탄·석유의 금수는 결단했지만 전체 수입량의 40%에 이르는 천연가스엔 손을 못 대고 있다.

현재 국제사회 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다. 중·러를 고립시키려는 서구의 시도가 성공해 러시아가 약화되고, 중국의 성장이 꺾이는 길이다. 이 경우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당분간 더 유지될 수 있다.

두번째는 중·러가 미국 등의 포위를 뚫어내고 블록으로 살아남는 길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3월30일 중국 안후이성 툰시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우리는 국제 관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를 지나고 있다. 나는 이 결과에 따라 국제 정세가 더 분명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중국 그리고 우리와 뜻이 같은 국민들과 함께 더 정의롭고, 민주적인 ‘다극체제’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중·러 연대에 터키·이란·인도 등이 한 발을 걸치는 유라시아 연대가 형성될 수 있다. 중·러 등 대륙 국가들이 이란 등 유라시아 대륙의 환형 지대에 위치한 국가들과 연대하는 것은 지정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해퍼드 매킨더(1861~1947)부터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2017)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이르는 서구 전략가들이 가장 경계해온 시나리오이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경제 블록화는 심화됐지만, 누가 승자인지 모호해지는 시나리오도 있다. 피터 마틴 우드매켄지 조사국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코로나19가 공급망 단축 필요성을 부각시켰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뢰할 만한 교역 상대를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웠다”며 “세계화가 끝나진 않겠지만 세계 교역은 2개나 그 이상의 명확한 블록으로 재조직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크리스티안 뢸로프스 컨테이너엑스체인지 최고경영자(CEO)도 “중국과 유럽, 중국과 미국 사이 거대한 동서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확실히 낮아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교역과 교역로의 변화는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국가들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두 전문가는 평가했다. 상호 교역이 줄어든 서방과 중국이 다른 지역 국가들을 상대로 교역과 시장을 확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터키, 인도 등 유라시아 대륙의 환형 지대 국가들이나, 중남미·아프리카의 미들파워 국가들이 비미적인 독립 행보를 추구하는 배경이다.

전쟁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중첩되면서, 공급망의 재편과 세계 경제의 분절화로 이미 치닫고 있다. 전쟁이 어떻게 끝나도, 러시아의 원자재, 중국의 생산력과 시장이 서방 경제와 통합도가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진영 간 안보·경제 위기가 되풀이되는 예전보다 불확실하고 위험해진 세계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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