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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그사람] 거칠고도 부드러운 사람…배우 강석우의 마음 속 응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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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래식 음악 전도사>
어머니의 꿈은 이 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목사는 못 되었지만 '전도사'는 되었다고 했다. 이 사람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접한 사람이 적지 않으니 그 말이 꼭 농담은 아니다. 연예계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어둡던 표정이 음악 이야기를 할 때 한결 밝아졌다. 대학 방송국에서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한 뒤로 이 사람 인생에서 음악이 떠난 적이 없었다. 일주일에 많을 때는 세 번, 적어도 한 번은 음악회에 간다. 일정표에 가장 많이 적혀 있는 것이 음악회 관련 메모다. 음악회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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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당신에게 진행 모습


클래식 음악 방송 진행은 오랜 꿈이었다. 지난 2015년 9월부터 올 초까지 CBS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했다. 이 사람과 그 프로그램은 썩 잘 어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골라주는 클래식 음악과 이 사람 목소리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주말 아침 이 사람 방송 들으면서 조간 신문을 천천히 읽을 때 평화, 여유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자기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말하곤 했는데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강석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프로그램이었고 그런 것을 좋게 듣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 청취율이 좋았다. 한 때는 전체 라디오 프로그램 중 2위까지 한 적도 있다. 방송 중에 온전히 자기의 목소리와 색깔을 내려는 고집 같은 것이 종종 느껴졌다. 자신이 설정해둔 선을 지키기 위해 제작진은 물론 청취자들과도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멘트는 귀에 잘 들어왔다. 목소리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음악이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귀한 보물을 청취자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래어가 대부분인 서양 클래식 음악을 소개할 때 발음이 매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듣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알기도 많이 알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40년을 준비했다고 말한 적이 있을 만큼 애정을 쏟은 프로그램이었다. 본인도 행복했고 성과도 좋았지만 올 초에 진행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눈과 귀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내왔고 코로나19 부스터 샷을 맞은 이후에 눈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문제들이 풀리지 않은 채 누적된 것도 하차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건강 문제였다. 실명 위기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은 꽤 심각한 위기를 느꼈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제는 잠시 내려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6년 넘게 했으니 할 만큼 했고 박수 칠 때 떠나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도 남산 걷다 만나는 분들,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도 너무 아쉽다는 분들이 많고 그런 분들에게 제가 상처를 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더 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시점에서는 끊는 게 맞았죠. 그때 이미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어요. 많을 때는 문자가 5천 개가 와요. 그걸 계속 보면서 두 시간 방송을 하면 눈이 약간 블랙 아웃이 와요. 그리고 집에 바로 와서 쉬면 좀 나은데 이어서 주말 방송까지 녹음하고 나면 기진맥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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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왜 좋은지, 음악을 어떻게 듣고 즐기면 되는지, 하다못해 음악회 갈 때 무엇을 입고 가면 좋을지 일반 청취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해줬다. 음악 전문가들이 자동차의 엔진 구조를 설명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은 자동차 시동을 켜는 법과 간단한 조작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음악회에 가보면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음악회를 즐기는 사람이 딱 양분 되잖아요. 음악회는 진지하게 보는 게 아니고 즐기는 거예요. 놀이잖아요. 그래서 검정 양복 입고 오지 말라는 거예요. 음악 들을 때 그렇게까지 경건할 필요 없어요. 즐겁게 놀자고 재밌자고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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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교수 방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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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통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한다. 예를 들면 왜 그때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로 가야 했는지, 당시 파리에서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진행 중이었는지, 그런 사건이 음악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침에 눈뜨면 이런 공부를 한다고 했다. 잘난 척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런 공부가 진정 즐거워 보였다. 취미를 뒷받침할 복 받은 귀를 가졌다. 지휘자에 따라 악기 별로 소리가 전달되는 시간의 차이까지 느낀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 뒤에서 조그맣게 나는 소리까지 다 들으니까요. 젊을 때 록 사운드 들을 때 보통 보컬이나 리드 기타 듣는데 저는 베이스 하고 드럼을 들었으니까요…저는 음악당 갔을 때가 제일 좋아요. 집에서 듣는 음악은 스피커를 통해 듣는 거잖아요. 아무리 커봐야 한계가 있는데 음악회에서는 모든 소리를 다 듣잖아요."

2. <연예계 왕따?>
이렇게 깊은 상처와 아픔이 이 사람에게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부와 명예, 화목한 가정, 외모 등등. 남들의 부러움을 넘어 질시를 부를 만큼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입에서 고독, 상처라는 단어가 거듭해서 나왔다. 이 사람이 쓴 책을 보면 동료 연기자들 가운데 누구와 친하다는 말이 없고 훈훈한 연예계 에피소드도 거의 없다. 오히려 불화와 갈등을 암시하는 이야기만 나온다. 어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비슷한 또래 연예인 가운데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송승환 한 명이라고 했다.

"우리 때는 TV연기자가 되는 것은 공채였어요. 공채로 들어가면 기수가 있어서 릴레이션쉽이 강하죠. 저는 영화배우로 연예계에 입문해서 KBS, MBC, SBS 모두 특채로 가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동기 개념이 없죠.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요. 굉장히 잘 모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도 모일 사람이 없어요. 후에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친해진 선후배는 몇 명 있지만 또래 친구는 딱 한 명 있죠. 송승환 밖에 없죠."

연예계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것인데 이 사람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으로 들렸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장에 연기자들이 몇 명 올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릴레이션쉽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분들은 자기들끼리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그룹이 없구나…물론 다른 사회에 그런 그룹이 있지만 연기자 쪽에서는 제가 완전히 독립군이라…저 빼고 자기들끼리 서로 연락하고 어울려 다니고 그러는 거 제가 다 알죠. 일부러 저 들으라고 큰소리로 그러는 사람도 있구요."

영화배우 출신과 TV연기자 출신들이 서로를 배척하는 문화가 강했던 때였고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사람이니 술을 매개로 이어지는 자리가 힘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패에 끼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자신을 따돌리는 거 단 한 번도 서운하지 않았고 안 불러준 것을 오히려 고마워했다지만 그때의 소외감과 섭섭함은 여전히 뼈 아픈 기억이자 상처다. 고개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구는 이 사람을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말라며 손을 봐줘야겠다고 벼르던 선배들도 있었고 면전에서 건방진 놈, 재수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는 너희들과 가는 길이 다르다는 자존심, 교만, 오기 같은 것으로 버텼고 내가 승자라는 생각으로 이겨냈다. 외로운 늑대 같은 이 사람을 이정길, 유인촌, 송재호, 이덕화 김용건 같은 선배들이 옹호하고 위로해줬다. 그 선배들이 지금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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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스타 시절


1년에 다른 사람들과 저녁 약속은 많아야 대여섯 번이다. 지금도 일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온다. 집이 제일 좋고 아내가 제일 편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말투, 행동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니 아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이 사람에게는 대단히 힘든 일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스스로 감정의 기복이 극히 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때로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게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람들 많은 데 가지 않고, 사람 안 만나는 게 득이라고 생각한다. 슬프긴 하지만 고독한 상태가 아예 편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은 데 갔다 오거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들어오면 악몽을 꿀만큼 혼란스러워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내가 왜 했을까 이런 후회가 늘 있기 때문에…거기서 내가 그냥 입을 닫고 있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 사람을 노려봤을까 하는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혼란스럽고 지금도 힘든 거죠"

1957년생, 만으로 65살이다. 살아온 인생을 가끔 돌이켜 볼 나이가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후회가 된다고 했다. 피해자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해자인 순간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을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사람도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그래서 시간이 흘렀지만 이건 좀 치명적일 수 있겠다 싶은 것은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사과를 합니다. '그때 그 일은 내가 잘못한 거 같은데 기억하고 있냐'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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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억압받고 때로는 억압하기도 했던 악몽 같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다. 이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그런 기억들이 지워지거나 흐릿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생각하기도 전에 표현하는 일도 적지 않다.

-경우 없다, 부당하다, 옳지 않다 그런 상황이 있으면 안 참으셨군요?
"지금도 안 참아요. 금연인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거 보면 피우지 말라고 그래요. 사람들 지나가는 공원에서 피우시면 안 된다고…그래서 내가 이러다 맞아 죽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친절하고 양순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만나 보니 거칠고 뜨거운 감수성이 느껴졌다. 자기 표현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도 기싸움에서는 밀릴 거 같지 않았다. 동국대 후배인 이경규가 학생 시절 이 사람에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었는데 실제 만나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보수적인, 너무도 보수적인>
얼마 전에 음식 기행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 사람을 봤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는 맛있게 먹고,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보여주는 게 불문율이다. 이 사람은 그런 '연기'를 하지 않았다. 맞장구를 쳐주길 원하며 던지는 진행자의 질문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가요?' 또는 '글쎄요' 라고 반문했다. 묻는 진행자가 당황했을 테고 제작진은 난감했을 것이다. 국물 한 술 떠 입에 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맛있네요' 라고 말하는 게 가장 격한(?) 공감 표시였다. 모든 음식이 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 프로그램에 나갔다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도 예절이 있거든요. 상투적으로 거기 나오면 그냥 와구와구 먹어야 되고. 저는 텔레비전 음식 프로그램들이 그런 풍조를 더 조장하고 있다고 봐요. 그 프로그램이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세 끼를 먹어요. 중간에 소화제를 먹긴 하지만 마지막에 먹는 것까지 어떻게 맛있게 먹어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만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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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에도 예의와 범절이 있는 거라고 말하는 이 사람이야 말로 오갈 데 없는 보수주의자다. 경우를 따지고 원칙을 중요시하고 규칙은 지켜야 되고 체면이 중요한 사람이다.

"보수적이죠. 아주 보수적이죠. 그런데 보수가 뭐죠? 보수 아닌 사람도 있나요?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거를 지키려고 하는 게 보수 아닌가요?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나요?"

몇 번 정치 입문 권유를 받은 적이 있고 유력 정치인이 집까지 찾아온 적도 있다.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동서에 걸쳐 있고 좌우에 모두 있는데 어느 한쪽 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관심은 있지만 직접 할 생각은 없다. 정치를 해서 이득 될 게 없다고 말할 때 보면 실용주의자의 면모도 있다. 방송하면서 딱 한번 정치적 구설에 휘말린 적이 있다. 2015년 MBC <여성시대>를 8년 넘게 진행하다가 하차했다. 세월호 사고 관련해 당시 집권자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타의에 의해 하차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타의로 방송을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1주기를 맞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방문에 나서는 것을 두고 쓴소리를 한 것은 맞다.

"제가 방송 중에 이런 와중에 어딜 가냐고 했죠. '희생자 가족 위로하고 그래야지 아무리 국제 행사가 중요하다고 해도 지금 출국하면 되겠느냐. 정 나가야 된다면 하루 정도 일정 미룰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그 말을 정치적으로 본 건데 저는 그 아이들 부모 입장에서 한 말이었어요.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당시 배 안에 있던 학생과 통화를 했어요."

-방송 중에요?
"네. 배 안에 있던 학생과 전화 연결을 했어요. 아이들이 막 깔깔대고 웃고 그랬거든요. 제가 그 아이 이름을 알잖아요, 나중에 명단을 찾아보니 아쉽게도 그때 세상을 떠났어요. 그 일이 제게 강하게 남아 있었던 거죠. 미안하기도 하고…왜 우리 방송에서 그 아이와 연결을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런 마음 때문에 이야기를 한 거지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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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사람의 신앙고백>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실향민이었다. 남한 땅에 친가나 외가 쪽으로 피붙이 한 명 없다. 1남 4녀 집안의 장남이다.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여러 곳에서 이야기했고 연기자가 된 이후에는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지만 그 시절 가난은 이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어머님은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분이었다. 일요일 방송에서 거의 빠짐없이 '주일'이라는 말을 썼다. 그 표현은 이 사람의 신앙고백처럼 들렸다.

"맞아요. 신앙 고백이었어요 다른 방송사에서는 주일이라는 표현을 할 수 없죠. 제가 CBS에 온 것도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저를 보내신 이의 뜻이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제가 해야 될 일의 하나였다고 생각을 했어요."

학생 시절 일요일이면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교회 오빠'였고 자녀들에게 가정예배와 십일조를 지킬 것을 당부한다. 이 사람에게 신앙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가치다. 보수적인 성향의 대형 교회에 출석하는데 교회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만이고, 교회 세습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자료를 찾아봐도 드러난 것은 거의 없었다. 남에게 선한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더니 두 가지 선행 사실을 공개했다. 작년에는 노숙자를 위해 봉사하는 교회에, 그 전 해에는 불의의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공회 계열 장애인 공동체에 각각 수천 만원을 기부했다. 자신의 수입 가운데 10%를 교회가 아닌 사회 어려운 곳에 기부한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다.

"십일조를 교회가 아닌 다른 데 한다는 것에 갈등이 굉장히 많았죠. 아내하고 의논을 많이 했는데 교회는 우리가 아니어도 운영할 수 있을 만큼 헌금을 내는 분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정말 어려운 곳을 찾아서 매년 십일조를 내자 그렇게 된 거예요."

지금보다 훨씬 큰 집에서 더 호사스럽게 살고 싶고, 지금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살자고 들면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거 같은 사람인데 그러면 안 될 거 같다고 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이 사람 집이 방송에 몇 번 공개가 되었다. 일반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호사스럽게 산다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이 사람 기준에서는 나름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제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다른 연예인들처럼 정말 입구부터 으리으리한 80평 90평 그런 빌라에 기사 두고 살면서 아침에 나와서 소박한 행복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 그게 말이 되겠어요. 최소한 내 방송을 보거나 듣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상실감이나 박탈감을 느끼거나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은 배우니까 저 정도는 살아야지 하는 그 정도면 되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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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들이 나중에 다 족쇄가 될 수 있다고 했더니 지금도 갈등을 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한다고 했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었다고 했다. 제안을 받은 광고 중 자신의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광고들은 거절했다는 것이다. 돈보다 자기 얼굴이 더 중요한 사람이고 그렇게 해도 살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가 술을 많이 먹거나 명품을 좋아한다거나 지금도 좋은 차 타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더 좋은 차 타려고 했으면 돈이 더 필요하고 더 벌어야 되겠지만 저는 지금 아주 충분합니다."

앞으로 재단을 만들려고 한다. 막연한 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추진 중이다. 재단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재단을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려는 것이다.

"딸과 아들에게도 약속을 받았어요. '너희들 마음껏 쓸 만큼 돈을 벌어서 쓰고 그다음에 남는 돈 아빠에게 주면 재단을 만들어서 그걸 세상에 돌리자. 그건 세상에 돌리는 게 맞는 거다. 돈은 그래서 버는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5. <연기자 강석우>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이던 스물두 살 때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한 신인 배우 선발 대회에서 1위로 입상하면서 배우가 되었다. 조연과 단역을 건너뛰고 화려하게 주인공 역할을 하는 연기자로 시작했다. 영화 <겨울 나그네>, KBS 일일 드라마 <보통 사람들>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수십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였고 1990년대부터 라디오 DJ로 주요 방송사를 섭렵했다. 화려한 출발과 초기에 거둔 성공, 높은 지명도에 비하면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적다. 연기자로서 욕심도 누구보다 많은 사람인데 명배우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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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통 사람들' 촬영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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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로서 아쉬움은 없으세요?
"그것도 제가 참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였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 다 털어놓은 거예요. 생활로 하는 연기가 있어요. 이거를 해야 금년도 먹고 산다 하는 드라마도 있고 이거는 진짜 내가 신나서 뭔가 하나 남겨야 되겠다 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조금 집중하지 않고 하는 드라마들이 있었어요. 생활로 하는 연기를 하면 시청자들이 알아요. (댓글에) '강석우 건성으로 한다' 딱 쓰더라구요. '야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건성으로 한 걸' 연속극은 사실 촬영을 하다 보면 똑같은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거든요. 일상적인 상황은 일상적으로 연기해야 하지만 그게 무성의하게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연속극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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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출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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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시 <겨울나그네>를 보니 청춘의 아이콘다운 마스크지만 거친 눈빛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눈빛을 살리는 연기를 했더라면 기억에 남을 작품을 더 남겼을 텐데 '피리 부는 소년'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순수한 청년, 순둥이, 찌질이, 범속한 아버지의 역할에 안주하고 만 느낌이다. 연기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온전히 살린 거 같지는 않다.
-앞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군요.

"우리 나이가 되면 이제 조연에서 단역 급까지 떨어질 위기가 되니까 그런 가운데 어떻게 잘할 수 있는가 좋은 작품을 찾는 거죠. 뭔가 힘을 줄 만한 드라마를 하긴 해야 돼요. 힘을 줘서는 안 되는 드라마를 계속하다 보니까 배우로서의 기는 좀 뺏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연기를 하면서도 항상 그런 것에 대한 불안, 만족하지 못하는 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염려가 늘 함께 있었어요."

6. <남보다 두 배의 열정으로 살았다>
외로운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은 고고(孤高)함이다. 외로울수록 높아지려 하고 외로우니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음악, 미술, 발레 등 어지간한 사람은 한 가지도 제대로 누리기 힘든 일을 프로 수준으로 즐긴다. 듣고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곡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부인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서른 번이 넘는 전시회를 했다. 5년째 일본어를 배우고 골프도 싱글이다. 프로에 버금가는 색소폰 연주 실력에 작곡에도 도전해 다음 달 가곡 발표회를 연다. 저녁에 술 마시지 않으면 두 배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연예계에서 교유는 적지만 음악, 미술계에서는 나름 마당발이다. 덕담 겸해서 당신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술의전당 이사장 같은 거 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관리직은 잘할 자신이 없다면서도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인터뷰하는 자리에 부인이 동행했고 답변을 하는 중간중간 아내를 바라보며 때로는 동의를, 때로는 공감을 구하곤 했다. 인터뷰는 물론이고 촬영장, 골프장, 거의 모든 모임에 부인을 동반한다. 아내를 전적으로 믿고 아내에게 헌신하고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아내가 없으면 이 사람은 금방 허물어질 거 같다. 광고도 같이 찍었고 공부도 같이 한다. 아내에 대해 다소 유난스러운 것 아니냐는 시선, 쇼윈도 부부 아니냐는 말 같은 것은 무시한다. 남편보다 덜 유난스러운 대신 여유는 더 있어 보이는 이 사람 아내에게 남편과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남편과의 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졌다고 짧게 대답했다.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내에게 음악을 알려준 이야기를 책에 적었다. 아내와 같은 취미를 가지려는 이 사람 노력도 대단하지만 그런 남편의 노력을 참아준 아내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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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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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연예인보다 연예인다운 사람이다. 연예계 스타들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기를 바라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가친척이 없는 실향민 집안 출신이라 그랬을까, 딸이 넷인 집안의 외아들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잘 생겼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컸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8백대 1의 경쟁을 뚫고 화려하게 데뷰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 어딘가 선민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좀처럼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 거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내가 제일이야' 라는 생각, '내가 강석우야'라는 자부심이 이 사람을 지켜준 것은 맞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교만 내지 독선으로 비쳤을 수 있다. 6년 전 한 일간지에 기명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편집자가 이 사람 글을 손봤다. 단호하게 내 글에 손대지 말라고, 고칠 게 있으면 내가 손보겠다고 했다. 어지간히 뻣뻣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겨울 나그네> 제작 당시 출연 배우 이름이 나오는 순서를 두고 자신이 주인공이니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고 안성기 이름을 먼저 내세우려 했던 영화사 제작진이 이 사람을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몸값이 높은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출연료는 곧 자부심이다.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7. <생각이 달라도 행복할 수 있다>
3시간 반이 넘는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혹시 묻지 않아하지 못한 말이 있느냐고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한 조직에서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있지만 그 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젊을 때 술 마시는 모임이라든가 자기들의 어떤 집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처럼 다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이제 독립적으로 정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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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들보다 잘 살았다는 말이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응어리가 남아 있다는 고백으로도 들렸다. 음악으로 위로받고 그림으로 치유받기도 했지만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이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 이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든 생각이다. 스캔들이 난 적도, 추문에 휩쓸린 적도 없다. 그런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기에는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하나를 받으면 둘로 갚으려고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휴대폰을 열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최근에 만든 가곡 <시간의 정원에서>를 쓰면서 나온 파지 뭉치를 찍은 사진이었다. 조사 하나, 어미 하나까지도 신경 쓰는 사람이고 가곡 <시간의 정원에서>는 가사를 쓰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혼자 하는 일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지 않았을까.

예술가의 천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이 다섯 개 정도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은 그 열 배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 말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열 배쯤 다양한 평가도 가능하다. 자신의 어느 한 면을 본 사람이 다른 면을 보면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인터뷰를 하는 재미가 있는 만남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고 무엇보다 진솔했다. 묻는 사람도 자세를 고쳐 잡고 긴장을 하며 질문을 던져야 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노련한 방송 진행자답게 말투는 세련되었는데 내용은 날 것 그대로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건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굳이 답을 기대하지 않고 던진 질문에도 꼬박꼬박 답을 했다.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이번 기회에 다 털어놓자고 작심하고 나온 듯했다. 적어도 세 시간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더니 뭘 그렇게 길게 하느냐고 했던 사람인데 정작 이야기가 시작되자 당초 예상했던 시간이 훨씬 지나도 할 말이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많은 것을 가졌고, 누릴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아는 사람인데 안과 밖의 균형이 잘 잡힌 느낌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은 과잉, 어느 한쪽은 결핍이다. 주관과 고집, 배려와 집착, 자부심과 교만이 뒤섞여 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사는 느낌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지난 3월, 이 사람이 방송을 그만두고 얼마 안 됐을 때 한번 만나자는 말을 넣었더니 새로운 진행자가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는데 자기가 바로 인터뷰하는 건 그 프로그램과 새 진행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답을 보내왔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거나 신경 거슬리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 배우 강석우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21일) 밤 9시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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