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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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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했던 남북, 3번째 회담 땐 사이다 건배…1970년대 남북대화 사료 공개[북한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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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TMI] “어려운 북한 소식, 알기 쉽게 풀고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1971년 8월. 미소로 대면한 남북적십자 파견원. 남측 파견원 이창렬 부장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에 긴장이 풀렸다. 경향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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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일한 조선민족(한민족)의 피를 이어가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서성철 북한 문화선전부 부부장)

1971년 8월3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3차 접촉에 참석한 남측 이창렬 서무부장과 윤여훈 섭외부 참사, 북측의 서성철 문화선전부 부부장과 염종련 적십자회 지도원이 술 대신 사이다로 건배를 했다.

서로 신임장만 교환한 채 “임무가 끝났다”며 3분 만에 돌아섰던 10일 전 첫 접촉과는 달랐다. 1945년 분단 이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마주 앉은 남북 대표단이 마음을 터놓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통일부가 4일 공개한 1970년 8월∼1972년 8월 사이의 남북대화 사료에는 남북 대표단 사이에 통하는 한민족의 정과 남북 체제 대결을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이 고스란히 담겼다.

분단 이후 남북 간 최초 당국 회담이었던 남북적십자 파견원 1차 접촉(1971년 8월20일) 때만 해도 긴장감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남측 이창렬 서무부장이 북측 대표단에 “안녕하십니까”란 첫인사를 건넸고, 북측이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답했다. 통성명을 한 양측 대표단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받아온 신임장을 서로 교환한 후 이내 헤어졌다.

일주일 후인 8월26일 진행된 2차 접촉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북측 서성철 부부장은 “이미 구면이고 ‘형제간’인데 확인할 필요가 있겠냐”면서 신임장 확인을 생략하자고 제안한다. 우호적인 분위기는 ‘사이다 건배’가 이뤄진 3차 접촉 때로 이어진다. “접촉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더운데 사이다나 한 잔 마시면서 하자”면서 북측이 미리 준비한 사이다로 건배 제의를 한 것도 서 부부장이었다.

양측 간 한민족의 정만 흐른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 체제 대결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였던 만큼 신경전도 이어졌다. 경제, 교육, 의료를 소재로 체제 우월성을 간접적으로 내세운 점은 흥미롭다.

3차 접촉 당시 서 부부장이 양강도 갑산군이 고향이라면서 “남북 왕래가 실현되면 우리도 오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남측 이창렬 부장이 “서울에 31층짜리 빌딩이 있다. 스카이 라운지에 초대하겠다”고 하자, 서 부부장은 “31층짜리 빌딩이야 원하겠냐. 소박한 가정집이 좋다면서 (이 부장) 선생님 댁으로 가겠다”고 받아친다. 31층짜리 빌딩은 1970년 건설 당시 한국에서 가장 높았던 삼일빌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 9월3일 파견원 4차 접촉 당시에도 적십자 활동을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창렬 부장은 남측 적십자 회원이 360만명이고 회원비가 4억2300만원이라면서 북측 적십자 회원수를 묻는다. 당시 북측 적십자 회원수는 154만명이었다. 이 부장이 “우리는 1968년부터 언챙이(언청이·구순구개열) 치료를 시작해 1년에 300~400명 치료한다”며 “72년이면 우리 남한에 언챙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하면서 북측 적십자 활동에 대해 재차 묻는다. 북측 염종련 지도원은 “우리는 언챙이 수술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서게 한다”고 받아칠 뿐 북측 적십자의 주요 사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식 교육을 얘기하면서 교육비를 둘러싸고도 신경전이 벌어진다. 1971년 9월16일 5차 접촉 때 남측 이창렬 부장이 “5번이나 만났으니 딴 얘기 좀 하자”면서 자녀 이야기를 꺼냈고, 서 부부장이 “아들 딸 3명인데 우리나라(북한) 교육제도, 사회제도가 좋으니까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염 지도원도 “자녀들이 국가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거들었다. 이 부장이 “딸이 셋인데 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시킨다”고 장학금을 내세우자 서 부부장이 북한은 무상교육인데 남측은 대학등록금이 인상된다는 말이 많더라고 받아친다. 그러자 남측 윤 참사는 “모든 일을 국가에서 지원한다는데 개인의 능력을 무능화 시키면 되겠냐”고 일갈했다. 서 부부장이 “소 웃다가 꾸레미 터진다”고 쏘아붙이고, 이 부장이 “소 웃는 것 평생 못봤다”고 맞받는 신경전이 이어진다. 그러자 염 지도원은 “일본에서 귀국선 타고 온 기자들이 동평양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돈 받는 창구를 못찾았다”면서 “우리는 치료비, 약값 다 안 받는다”고 한 발 더 나간다.

키로 기싸움하는 대화도 오갔다. 3차 접촉에서 남측 윤 참사가 서 부부장에게 신장을 묻고는 “나보다 적으면 어떻하냐”고 한다. 서 부부장 키는 165㎝, 윤 참사의 키는 167㎝. 그러자 북측 염 참사가 “키 작은 사람이 주는 사이다를 마셨으니 키가 더 커지겠다”고 했지만, 님측 이 부장이 “키가 작은 사람이 주는 사이다를 마셨으니 키가 더 적어질까 걱정”이라면서 키싸움을 한다.

이날 공개된 문서는 총 1652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분단 이후 남북이 적십자 회담을 통해 처음 대화의 문을 연 시점부터 25차례에 걸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까지의 진행 과정이 두루 담겨 있다.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다. 통일부는 첫 공개를 시작으로 1970년부터 1981년까지의 회담 문서를 올해 안에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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