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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유럽연합과 나토

[취재파일] 나토, 평화의 보루인가 침공의 빌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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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 역사를 바꿨다."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장례식이 지난달 27일 워싱턴의 국립대성당에서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추모의 뜻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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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나토 동맹이 강력한 이유는 올브라이트 덕분이다…그녀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올브라이트는 1997년부터 미 국무부 장관에 재임하며 나토 확장 정책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 결과, 냉전시대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조약기구 가맹국이었던 옛 공산권 국가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1999년에 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에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까지도 나토에 가입했습니다. 이런 확장 정책에 힘입어 소련 몰락 이후에만 14개 국가가 나토에 추가 가입하면서 회원국 숫자가 지금은 30개에 이릅니다.

"역사적 실수" vs "치명적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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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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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며칠 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만약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 침공을 감행한다면 "역사적 실수(a Historic error)"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토 확장 정책이 오히려 러시아 침공의 배경이 됐단 지적도 나옵니다. 이런 지적의 근거가 되는 건, 공교롭게도 냉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캐넌이 1997년에 <뉴욕타임스>에 보낸 "치명적 실수(A Fateful Error)"란 제목의 기고문입니다.

조지 캐넌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문을 보내기 정확히 50년 전, 그는 'X'라는 필명을 사용해 'The Source of Soviet conduct'란 제목의 논문을 기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소련 봉쇄'를 바탕으로 한 냉전의 시초가 됩니다. 그렇기에 조지 캐넌은 냉전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소련 봉쇄란 아이디어로 냉전의 아버지가 불렸던 인물이 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나토 확장 정책을 두고는 "탈냉전 이후 미국 정책 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the most fateful error of American policy in the entire post-cold-war era)"가 될 것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일까요?

조지 캐넌은 자신의 기고문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이런 결정(나토 확장, 동진)은 러시아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서구적이며 군국주의적 경향을 더 부추길 것입니다. 러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걸로 예상됩니다. 냉전의 분위기를 되돌려놓고 러시아의 외교 정책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지도록 할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nytimes.com/1997/02/05/opinion/a-fateful-error.html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기꺼이 유럽의 일원, 더 나아가서는 나토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러시아는 서방 세계와 함께 힘을 합쳐 냉전을 끝낸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원했습니다만, 서방 세계는 공산권 국가들을 하나 둘씩 포섭하며 러시아를 고립시켰습니다. 이는 나토가 더 이상 동진하지 않을 것이란 '구두 약속'을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러시아가 냉전이라는 총성 없는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통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러시아는 혼란에 빠졌고 이를 기회 삼아 정권을 잡은 푸틴에 의해서 러시아는 조지 캐넌이 경고한 그대로 변해갔습니다.

신냉전 시대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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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토의 확장 정책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된 것이라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토의 확장 정책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유리하게 악용하며 끝내는 주변 국가를 침공한 건 푸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지 캐넌이 살아 돌아와 작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렇게 비판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스크바가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반세기 만에 찾아온 기회를 나토의 확장 정책으로 제대로 망쳤다."


기회를 상실한 우리는 이제 신냉전 시대의 그늘 아래 있습니다. 파트너가 되기를 바랐던 러시아는 다시금 적이 됐고, 조지 캐넌이 구상한 봉쇄전략처럼 서방 세계는 러시아에 온갖 제재를 쏟아내며 고사 작전 중입니다. 과거 냉전 시대에 유럽은 냉전으로 인한 갈등 및 분쟁 위험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소련과 에너지 교역을 확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원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하며 버티고 있는 건데 지금은 이마저도 끊어내 완전한 고립을 추구하고 있기에 과거보다 더 냉혹한 신냉전 시대라고 할 만합니다.

그 대가는 처참합니다. 두 달 넘게 진행되는 전쟁은 어떠한 접점도 찾지 못한 채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터인 우크라이나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지켜보는 주변국들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에너지, 자원, 식재료 등의 가격 상승으로 경제 기반이 약한 국가들은 디폴트를, 좀 산다는 나라들은 50년 만에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평화의 보루가 될 것인가, 침공의 빌미가 될 것인가



올브라이트는 뉴욕타임스에 보낸 마지막 기고문에서 오늘날에는 강대국일지라도 과거 열강이 식민지를 만들고 착취하듯 다른 주권 국가를 침공하고 짓밟을 권리는 없다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올브라이트가 추구했던 나토의 확장은 소련 붕괴로 생겨난 갑작스런 힘의 공백 속에서 주권 침탈과 혼돈의 역사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나토는 배 이상으로 덩치를 키웠을지 모르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걸 막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나토는 가입국에게는 평화의 보루, 비가입국에게는 침공의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둘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하는 게 정확해 보입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 집중하면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든 것처럼 나토 확장 정책 역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한 뒤 폴란드로 이동해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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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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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ant to see Russia weakened to the degree that it can't do the kinds of things that it has done in invading Ukraine. So it has already lost a lot of military capability and a lot of, a lot of its troops, quite frankly."


러시아가 이번 전쟁으로 군사 작전 능력을 상당히 상실했는데 우크라이나가 더 효과적으로 반격해 러시아가 다시는 주변국을 침공할 수 없도록 더 약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이제는 나토를 대신해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시각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듯 오스틴 장관은 다음날에는 독일로 이동해 침공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중화기를 지원하기로 한 독일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330억 달러, 우리 돈 42조 원 규모의 '역대급'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을 의회에 요청했습니다.

이제,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물론 나토의 운명도 결정될 걸로 보입니다. 나토는 이번에야 말로 평화의 보루로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침공의 확실한 빌미로 남을까요?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안상우 기자(as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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