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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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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 알력 극심했다…실록이 밝힌 양녕대군 폐위, 세종 즉위의 전모[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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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양녕대군(이제·1394~1462)과 관련해서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두 동생(효령대군·충녕대군)과의 일화일 겁니다.

“옛날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이도·1397~1450)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했다. 어느날 야밤에 효령(이보·1396~1486)의 집을 찾아가 효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효령 역시 불가에 입문했다.”(<선조실록> 1603년 3월 9일)

야사모음집은 <연려실기술>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가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들겼다. 지금도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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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담양 몽한각 소장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양녕대군이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세종실록> 1446년 4월23일자)이라고 했다는 거죠.

왕위를 쿨하게 내던진 양녕대군의 호방한 기품을 알려주는 일화들이죠. 1789년(정조 13) 정조 임금이 양녕대군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가 못을 박습니다.

“세자(양녕대군)가 성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술과 기생 속에 보냈다”는 겁니다. 정조는 양녕대군의 ‘양보’를 ‘지극한(至) 덕(德)’이라고 치켜세우며 사당 이름도 ‘지덕사’라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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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서로 싫어했던 세자(양녕)와 충녕(세종)

과연 그럴까요. 정사인 <세종실록>을 토대로 한가지 한가지 짚어보려 합니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은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세자가 매형 이백강(1381~1451)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누이(정순공주·1385~1460)에게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忠寧非常人也)’라고 했다”(<태종실록> 1414년 10월26일)는 겁니다. 특히 1416년에 이르면 세자(23세)와 충녕(19세)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들이 등장하는데요. 1월9일 세자가 종묘에서 제사를 올리려고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뒤 시종들에게 “내 풍채가 어떠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충녕대군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란다”고 지적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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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정조 임금은 양녕대군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에서 “양녕대군은 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냈다”고 찬양했다. 정조는 양녕대군의 ‘양보의 미덕’을 ‘지극한(至) 덕(德)’이라고 치켜세우며 사당 이름을 ‘지덕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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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여 뒤인 3월 20일 상왕(정종)이 베푼 술자리가 끝난 뒤 세자(양녕대군)가 기생 칠점생을 데리고 돌아오려 했습니다. 칠점생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충녕대군이 “아니, 집안 식구들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느냐”고 정색합니다. <태종실록>은 “충녕대군이 두 번 세 번 만류하자 세자가 앙심을 품었다”면서 “이후 세자는 충녕대군과 가는 길이 달라 마음 속으로 매우 싫어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해 9월19일 세자가 할머니(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제삿날에 두 세명과 어울려 바둑을 두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충녕대군은 “세자가 간사한 소인배와 놀음놀이를 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데, 하물며 할머니의 제삿날이겠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세자는 충녕대군에게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쏟아붙였습니다.

충녕대군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성인 군자와 야만인의 그릇이 다른데, 저하(세자)께서는 어찌 소인배들과 잗단 오락을 즐길 수 있느냐”고 받아쳤습니다. <태종실록>은 “세자가 동생(충녕대군)을 무척 꺼려했다”고 특기했습니다.

2년 뒤(1418년) 5월 11일 폐세자의 뇌관을 당긴 ‘어리 사건’이 불거졌을 때 세자가 충녕대군에게 “네가 임금에게 고자질한 거냐”고 쏘아붙입니다. 양녕과 충녕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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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실록기록이 의외로 많다. 충녕대군은 세자인 양녕대군의 행실을 계속 지적해댔고, 세자는 그런 충녕대군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는 것이 역사적인 팩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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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충녕)과 비교당한 세자

형제간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실록에는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와 충녕대군을 비교하고, 세자가 충녕대군을 시기질투하는 대목이 심심찮게 보이는데요. 1416년 2월9일 태종이 “집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만나면 반드시 길 떠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할 것”이라 했는데요. 이때 충녕대군이 “<시경>에 ‘황새가 언덕에서 우니, 부인이 집에서 탄식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임금의 기습 질문에 충녕대군이 고전을 인용해가며 현명하게 응대하자 태종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자(양녕대군)가 (충녕을) 따를 바가 아니다”라고 칭찬했습니다. 대놓고 충녕대군의 편을 든 겁니다.

이 날짜 실록은 과거의 일화를 덧붙입니다. 즉 세자(양녕대군)가 임금 앞에서 문과 무를 논하는 도중이었는데요. 세자가 뜬금없이 “충녕은 용맹하지 못하다”고 ‘디스’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러나 큰 일을 두고 대의를 결단하는 데는 충녕대군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두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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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인 양녕대군의 폐위를 결정지은 ‘어리 사건’이 불거지자 세자는 “충녕대군, 네가 고자질 했느냐”고 힐난하는 기사가 <태종실록> 1418년 5월11일자에 실려있다. 이에 충녕대군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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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이 아닙니다. 그 해(1416년) 7월 18일 태종이 상왕(정종)을 모시고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요.

이때 태종은 여러 신하들이 바친 연구(聯句·몇 사람이 모여 구를 이어 가면서 짓는 시)를 즐겨 보았는데, 구가 ‘노성(老成·노련함)한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는데 이르렀답니다.

이때 충녕대군이 나서 “<서경>에 이르기를 ‘기수준(耆壽俊)이 궐복(厥服)에 있다’고 했다”고 거침없이 시구(詩句)를 이었는데요. ‘기수준이 궐복에 있다’는 말은 ‘늙고 경험많고 뛰어난 사람(기수준)이 그에 걸맞은 직책(궐복)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태종은 충녕대군의 학문이 이미 통달한 것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세자를 돌아보며 시쳇말로 ‘비교질’을 했답니다. “너는 학문이 어째서 이만 못하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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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걸핏하면 충녕대군의 학식과 식견을 칭찬하면서 세자(양녕대군)에게 “너는 왜 충녕보다 못하냐”고 자주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세자(양녕)는 임금 앞에서 문과 무를 논하다가 뜬금없이 “충녕은 용맹하지 못하다”고 ‘디스’했다. 태종은 “큰 일을 두고 대의를 결단하는 데는 충녕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두둔했다.(<태종실록> 1416년 2월9일·7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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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양녕)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뭐 세자가 숭례문과 경회루의 현판을 썼다는 말도 있는데요. <태종실록> 1412년 6월9일자는 “세자가 경회루 현판을 썼다”고 했으니까 맞겠죠. 그러나 숭례문 현판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달라서 헷갈립니다. 하지만 세자 양녕대군의 학문 또한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행실이 문제였습니다. 세자, 즉 양녕대군의 실덕과 폐행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태종이 폐세자를 결정하기 직전(1418년 6월1일) 세자를 책망하며 언급한 이유를 보십시요.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 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 너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이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요. ‘비행소년의 일탈기’를 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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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폐세자를 결정하기 직전(1418년 6월1일) 세자를 책망하며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 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고 질타한다.


세자는 선공감 부정(종 3품) 구종수·구종지·구종유 등 삼형제와, 악공 이오방·이법화 등과 사적으로 교유했습니다. 이들은 궁궐담을 넘어 세자궁에 잠입하는가 하면, 세자 역시 야음을 틈타 궁궐을 빠져나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특히 여자 문제에 관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봉지련(1410년)과 소앵(1413년) 등 기생들을 궁중에 들인 것은 물론이고 한때 상왕(정종)을 모셨던 초궁장이라는 여인과 사통(1414~15년)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죄없는 사람들이 세자 때문에 죽어나갔다는 것입니다. 1417년 4월23~24일 <태종실록>은 “세자의 외도를 도운 소친시(임금의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나이 어린 사내) 이귀수와 진포를 참형에 처했다”고 기록합니다.

세자 여성편력의 결정판은 어리(於里)와의 위험한 애정행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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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세자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어리’ 사건. 1417년 2월15일 세자가 전 중추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를 납치하여 궁중으로 데려오면서 파국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20여일 뒤 ‘어리 납치사건’을 모의한 구종수 형제와 악공 이오방 등이 모두 참형이라는 극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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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1417년 2월15일 세자의 총애를 받던 악공 이오방이 동궁에 들어가 “전 중추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의 자색과 재주가 뛰어나다”고 수근거림으로써 시작됩니다. 세자는 “남편(곽선)이 있는 몸”이라고 버티던 어리를 궁중으로 납치합니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이오방과 구종수·구종지·구종유 3형제 등을 참형에 처했구요. 어리는 쫓겨났는데요.(1417년 3월5일)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죠. 세자가 쫓겨난 어리를 다시 동궁으로 들인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리가 덜컥 세자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또 발각되어 어리가 다시 쫓겨납니다. 어리는 훗날(1419년 1월30일) 연금 중이던 양녕대군의 탈출사건 때문에 억울한 누명 때문에 목을 매어 죽고 말죠.

이해할 수 없는 세자의 언행은 또 있습니다. 태종은 1410년 세자의 외삼촌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처단한 뒤 남은 두 형제(민무회·민무휼)에게 칼 끝을 들이댔는데요. 그런데 임금이 참석한 연회에서 한껏 술에 취해 “종사를 위해 민무휼·무회 형제를 죽이라”(1416년 1월 10일)고 아뢰었습니다. 결국 세자의 남은 두 외삼촌은 3일 뒤 그들이 그토록 아꼈던 세자의 이해할 수 없는 취중발언 때문에 자결하고 맙니다. “임금와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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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어리를 다시 궁중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됐다. 어리는 다시 쫓겨났고, 세자도 알현금지라는 처벌을 받게 됐다. (<태종실록> 1418년 5월11일자) 이 사건으로 결국 세자는 폐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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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세자의 조짐들

그럼 태종은 언제부터 폐세자 후에 충녕대군을 세자위에 올릴 생각을 했을까요.

1413년 8월 13일자 <태종실록>에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즉 태종이 대전내관을 시켜 세자의 비위를 맞춘 두 내관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그런데 세자가 앞을 가로막고는 임금의 명을 전하는 대전내관에게 “네 이름이 무어냐. 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듣고 “대체 뭘 기억하겠다는 거냐. 세자 자리가 안전할 것 같으냐. 종실에 적당한 사람이 없겠느냐”(8월15일)고 펄펄 뛰었답니다.

1415년 1월 28일자 <태종실록>에도 그 조짐이 보입니다. 세자의 스승인 이래(1362~1416)는 기생에 푹 빠진 세자에게 “과실 때문에 주상께 문책 당하면 세자의 지위마저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줄 아십니까.”

1416년 12월 30일자 <태종실록>에도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의령부원군 남재(1351~1419)가 충녕대군와의 술자리에서 “군왕의 아들이 누구든 임금이 되지 못하겠느냐. 학문을 좋아하시는 대군이 보기좋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이런 남재의 언급이 태종의 귀에 들어갔는데, 태종이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라고 외치며 크게 웃었답니다.

1417년 10월6일 술자리에서 좌정승 박은(1370~1422)이 충녕대군의 장인인 심온(1375~1418)에게 “충녕대군이 어질어서 조정은 물론 민간에서도 마음이 쏠리니, 처신 잘하라고 전하라”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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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를 쫓아낸 것에 불만을 품은 세자는 1418년 5월30일 태종에게 손편지를 보내 정면으로 받아친다. 세자는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고 직격탄을 날린다. 세자는 이어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거냐”고 치받는다.


■부왕(아버지)에게 보낸 작심 편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자는 부왕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자를 폐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입니까. 태종은 끝까지 주저했던 것 같습니다.

1418년 3월6일 지신사 조말생(1370~1447)에게 “세자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한 둘이 아닌데 부끄럽기만 하다”면서 “세자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는데, 세자가 이 지경이니 어찌하겠느냐(奈何)”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5월30일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이 그토록 아꼈던 여인 어리(於里)를 내쫓자 세자는 부왕에게 큰 글씨로 두 장 분량의 친필 서한을 올리는데요.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작심 비판’으로 가득찬 편지였는데요.

한마디로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는 직격탄이었습니다.

세자는 한발 더나아가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을 구하지 않으시냐”고까지 치받았습니다. 천하의 지존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에게 해댈 수 없는 막말이었습니다. 폐위를 각오하지 않으면 올릴 수 없는 편지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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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나 잘하라’는 뜻의 편지를 받은 태종은 멘붕에 빠진다. 폐세자를 결정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결정하는데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다. 태종은 처음에는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내세워 폐세자(양녕대군)의 5살, 3살 아들을 낙점할 것”이라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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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집니다. 의정부와 개국·정사·좌명공신, 6조 대신, 3군 도총제부 등이 “불손한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문이 잇달아 올립니다.(6월2일)

이튿날(6월3일) 태종은 “이미 천명이 세자를 떠났다”면서 폐세자의 결단을 내립니다.

태종이 차기 세자를 정하는 찰나의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태종이 외외로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여준건데요.

이날(3일) 세자를 폐하면서 맨처음에는 “세자의 5살 짜리, 3살짜리 두 어린 아들 중에서 왕세손, 왕태손으로 삼고자 한다”면서 “신료들이 의론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자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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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새로운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여준다. 처음엔 적장자 계승에 따라 폐세자의 아들로 정하려 했다가, “점을 쳐서 결정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거북점 혹은 시초점으로 하겠다”고 번복한다. 태종은 이미 한양을 도성으로 정할 때 척전, 즉 동전던지기점(돈점)으로 결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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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가 “이제(폐세자·양녕대군)의 아들을 세우는게 옳다”고 주장했지만,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택현·擇賢)이 마땅하다”는 반론이 커져갑니다. 어떤 이는 “옛 사람들처럼 거북점(龜占)과 시초점(筮占)을 쳐서 결정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등장합니다. 태종은 여러 의론을 들어본 뒤 “나는 점을 쳐서 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내전으로 들어가 중전(원경왕후)에게 “여러 신하들이 ‘어진 사람(충녕을 지칭)을 택하자’고 하는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된다”고 반대합니다. 태종은 왕후의 말이 옳다고 여겼지만 한참만에 다른 결단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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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갈피를 잡지 못하던 태종은 고심 끝에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신료들에게 “여러분들이 추천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신료들은 “자식을 알고 신하를 아는 분은 오로지 군부(君父) 뿐”이라면서 “전하가 선택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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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쳐서 차기 임금을 뽑았다면…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태종은 “처음엔 제(양녕대군)의 아들을 세우려 했지만 여러분들이 불가하다고 하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러자 신료들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분은 임금 밖에 없다”면서 태종에게 “직접 고르시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해서 낙점된 분이 충녕대군 이도, 즉 세종대왕인데요. 태종은 왜 충녕대군을 뽑았는지 아주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일을 조목조목 처리하지 못한다. 언제나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다…반면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한다…또 정치를 알아서 국가대사에 합당한 의견을 낸다. 더러는 뜻밖의 의견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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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중 충녕대군을 선택한 이유를 두고 “충녕이 효령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치를 알아서 국가대사에 합당한 의견을 낼 뿐 아니라 더러는 뜻밖의 의견도 많았다”는 점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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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충녕대군을 꼽은 이유 중 하나는 생뚱맞게도 ‘세종이 술을 마실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무익하다. 그러나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면 어찌 중국 사신을 접대하겠는가. 효령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충녕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는 마신다.”

태종은 충녕대군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충녕대군의 아들 중에는 장대한 놈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종이라면 폐세자(양녕대군)를 절대 해치지 않고 평생 대접할 것”(6월6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자가 충녕대군으로 낙점되자 신료들은 “저희가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실은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라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충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지 두달여만인 1418년 8월11일 즉위하는데요.

양녕대군은 폐세자의 교서를 받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자위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것이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 즉 세종의 즉위 풀스토리입니다. 양녕대군은 폐위 후에도 갖가지 악행을 저질러서 여러차례 탄핵을 받았는데요. 폐세자 이후의 행각만 써도 기사 한편은 됩니다. 훗날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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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충녕을 낙점한 이유을 밝히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려면 술은 그래도 마실 줄 알아야 하는데, 효령은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지만 충녕은 마실줄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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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종은 “양녕이 그런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냐”고 덮어주었답니다. “충녕이라면 세자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태종의 예언이 맞았습니다. 양녕대군은 69세까지 살다가 1462년(세조 8) 세상을 떠났는데요.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 등 5명의 임금 아래서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살았던 겁니다. 동생인 세종(54세·1397~1450)은 물론 조카인 문종(39세·1414~1452), 조카의 아들인 단종(17세·1441~1457)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솔직히 말해 양녕대군이 임금 자리가 싫어 평생 미친 척 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혹은 정말로 엉망인 삶을 살아 폐세자가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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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충녕대군, 즉 세종이 즉위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 창제도 없었을 것이고, 야직까지도 한자를 공부하는 시대에 살았을 것이다.|간송미술관 소장


분명한 것은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양녕대군이 임금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세종이라는 성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한글창제로 없었을 거구요.

그러고보면 태종과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위대한 업적이 있네요. 세종대왕을 낳았고, 또 그분에게 왕위를 잇게 만든겁니다. 뭐 양녕대군의 업적도 있겠네요. 왕이 되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는 거네요.

양녕대군 때문에 비명에 간 분들의 사정은 딱하지만 뭐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시대를 위해 죽은 희생양으로 여겨야 겠습니다.

역사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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