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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감성'으로 변화무쌍한 인생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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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감성'으로 변화무쌍한 인생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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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Untitled, 1997년)’. 1997년 뉴욕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어지러운 화면 속에 형상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주는 브라운의 전형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무제(Untitled, 1997년)’. 1997년 뉴욕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어지러운 화면 속에 형상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주는 브라운의 전형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려고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는 화가들의 마음은 어떨까. 수백 년 넘게 사용해온 유화 물감과 캔버스라는 재료를 사용해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고자 하는 중압감은 얼마나 클까. 그 힘든 압박감을 이겨내고, 모든 화가들의 염원을 이룬 이가 여기 있다. 소용돌이 같은 복잡한 화면 속 곳곳에 숨겨진 비밀들을 찾느라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적인 그림으로 전 세계 컬렉터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국 출신 중견 화가,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1969년생)이다.

그녀가 런던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것은 1993년. 당시 런던 미술계는 데미언 허스트가 이끄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개념적이고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실험미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브라운 같은 전통 방식의 회화 작업은 여간해서는 주목받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그녀가 1994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의 결정은 옳았다. 런던을 떠나면서 동년배의 감성이나 유행에서 홀로 벗어나 있다는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 그녀는 물감이라는 재료의 속성과 브뤼헐, 루벤스, 고야 같은 대가들을 비롯해 회화 역사를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활력을 되찾았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특히 빌럼 데 쿠닝의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된 것 또한 뉴욕이 그녀에게 준 선물 중 하나였다. 유화 물감은 인간의 살을 그리기 위해 발명됐다는 데 쿠닝의 말에 브라운은 적극 동감했다. 그녀는 유화에 대해 “그것은 움직이고, 빛을 포착하고, 피부와 살, 고기 같은 것을 표현하기 매우 적합하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말처럼 초기에는 유화 물감 자체의 육감적인 힘을 드러내면서 직접적으로 성욕과 관련된 주제를 주로 다뤘다.

뉴욕 이주 후, 그녀의 예술적 성장을 보여준 것이 1997년에 열린 첫 개인전이다. 감각적 풍부함과 탁월한 기법으로 비평가와 컬렉터를 모두 만족시켰고, 대중에도 큰 화제가 됐다. 여기에는 선정적인 주제도 한몫했다.

일례로 이 전시에 출품됐던 작품 중 한 점인 ‘무제’를 보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무엇을 그린 건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하지만 어지럽게 혼돈된 형태 속에서 눈이 붓질 하나의 가장자리를 찾고, 또 그다음 붓질로 시선을 쫓다 보면, 어느새 여러 등장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낸 형상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선정적이다.


‘모든 것을 가진 소녀(The Girl Who Had Everything, 1998년)’. 동물 캐릭터에서 인체로 주제를 옮긴 첫 번째 작품 중 한 점. 2022년 3월 1일 크리스티 런던 이브닝 경매에서 약 440만영국파운드(약 70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모든 것을 가진 소녀(The Girl Who Had Everything, 1998년)’. 동물 캐릭터에서 인체로 주제를 옮긴 첫 번째 작품 중 한 점. 2022년 3월 1일 크리스티 런던 이브닝 경매에서 약 440만영국파운드(약 70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처음에 토끼 머리가 눈에 들어올 때는 으레 귀여운 이미지일 거라고 예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관객 예상은 바로 뒤집힌다. 발기된 큰 성기를 드러낸 근육질의 거대 토끼 두 마리가 같은 종의 작은 생명체를 마치 사람 같은 손으로 장난감이나 먹이처럼 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을 보든, 그것을 자기가 알아볼 수 있는 형상에 끼워 맞추기를 원한다. 불을 피워놓은 동굴 속 이미지 같은 이 작품에서 나머지 형상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돌아가듯이 어지럽게 표현돼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기 어렵고, 관객은 시간을 들이더라도 이미지를 해석하려 한다. 만지고 싶을 정도로 촉각적이고 육감적인 느낌의 물감칠로 때로는 형태를 가리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는 이런 유혹적인 회화의 덫에 넘어가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빠른 예술적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모든 것을 가진 소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토끼나 다른 동물 캐릭터에서 인간의 몸으로 옮겨 간 최초의 작품 중 한 점이다.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추상과 구상 사이 경계를 탐구하면서 감춰진 비밀들로 가득 찬 이미지로 관객을 매혹한다. 추상적인 형태들을 좇다 보면 조금씩 인체의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두껍고 윤기 나는 여러 겹의 물감 층이 유혹적인 힘으로 생생한 생명력을 전달하며, 관객의 눈은 감춰진 여자의 몸을 찾아 나선다. 고전 명화의 빛과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 쿠닝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붓질을 혼합하고, 구상적인 현실과 회화적인 환영 사이에 걸친 색채와 촉감의 향연에 초대된 관객은 이내 작품의 포로가 되고 만다.


점차 기법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녀는 직접적인 구상 주제에서 더욱 멀어지면서 옛 거장들에게서 영감을 얻기 시작한다.

‘카니발과 렌트(Carnival and Lent, 2006~2008년)’. 브뤼헐의 명작 ‘카니발과 렌트의 결투(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2020년 7월 10일 크리스티 런던 이브닝 경매에서 약 610만영국파운드(약 97억원)에 낙찰됐다.

‘카니발과 렌트(Carnival and Lent, 2006~2008년)’. 브뤼헐의 명작 ‘카니발과 렌트의 결투(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2020년 7월 10일 크리스티 런던 이브닝 경매에서 약 610만영국파운드(약 97억원)에 낙찰됐다.


‘카니발과 렌트’는 피터르 브뤼헐의 1559년 명작 ‘카니발과 렌트의 결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교회가 있는 네덜란드 한 광장의 풍경으로 복잡한 상징주의, 유희적인 세부 묘사와 유머로 가득하다. ‘카니발과 렌트’는 이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저속에 가까운 야한 자유분방함 그리고 수도승의 절제 사이 충돌이라는 옛 주제를 다뤘다. 추상과 구상 간 긴장감을 통해 넘치는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내면서 혼돈과 통제, 몸과 마음, 화가와 그림 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전투를 영리하게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능숙한 안료 혼합과 탁월한 구성으로 일군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화면에서 머리와 몸통, 팔다리의 살 같은 인체의 부분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브뤼헐의 군중 풍경화를 마치 거대한 추상 에너지로 폭발시킨 듯한 이미지다. 유화라는 매체가 아니면 불가능한 관능적 특질들을 찬양하면서, 브라운은 화가가 그려낼 수 있는 붓질 하나하나의 촉각성과 그것이 빚어내는 미묘한 뉘앙스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작품은 모호함의 감성을 통해 고정되지 않은 비정형 속에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과 경험을 마법처럼 그려냈다.


브라운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욕망이 유혹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람 형상이라는 아주 약간의 힌트만 얻으면, 어느덧 관객은 어지러운 형태 속에서 퍼즐을 맞추려고 고심하면서 그림 앞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의 유혹이 성공한 이유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53호 (2022.04.06~2022.04.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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