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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까지가 호의다'라는 오래된 경구가 있습니다. 소고기를 사주는 사람은 선을 넘은(?) 호의인 만큼 그 의도를 좀 의심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라는 표현도 있죠. 이렇듯 오랜 세월동안 '고기를 먹는 것'은 이른바 좋은 대접과 호의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육식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으신가요? 고기 섭취를 의식적으로 줄이려 하는 '채식주의'에 대응해 육식하는 문화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른바 '미러링(mirroring)'이지요. 한 사회의 대부분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는 소수자들의 존재와 행보는 독특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따로 지칭할 만한 이름도 붙지 않고요.
'육식주의'라는 지칭이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지만, 이제 '채식주의', '채식'이라는 키워드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 됐습니다. 지금도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채식으로만 구성된 급식을 경험하고 있고, 서울의 경우 2024년엔 모든 학생들이 한 달에 서너 번 가량 채식 급식을 먹게 됩니다. 매일 채식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채식 선택제' 시범학교도 마흔 곳으로 늘어난다고 하네요.
이를 두고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장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엔 채식 문화의 단백질 함유량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니냐는 견해와, 어려서부터 '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할뿐더러 오히려 아이들의 건강에도 좋다는 견해가 부닥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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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환경주의자들의 고집으로만 여겨졌던 채식이 이렇게 '급식'이라는 전통적인 식문화의 중심에 오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30여 년 전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채식 운동을 전파하고 2005년 한국채식연합을 만든 이원복 대표가 그 산 증인입니다.
소개에 앞서 채식의 단계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채식의 종류는 여섯 가지나 있습니다. 많아 보이죠. 그런데 들여다보면 분류 자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나 먹는 것을 제한하느냐에 따라 구분됩니다.
먼저 완전히 식물성 식품만 섭취하는 완전 채식입니다. 흔히 '비건'이라 부릅니다. 그 외에 유제품까지 섭취하는 '락토 베지테리언', 유제품 받고 달걀까지 먹는 '락토-오보 베지테리언', 생선까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그리고 붉은 고기류를 제외한 닭고기까지 먹는 '세미 베지테리언'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간헐적으로 붉은 고기류를 먹는 '플렉시테리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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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대표는 완전히 식물성 재료만 섭취하는 '비건'입니다. 대학시절 육식이 가지고 있는 폐해를 불현 듯 깨닫고 채식에 완전히 뛰어들었습니다. 건강에 부쩍 관심이 커지는 4050 중심의 채식 문화가 지금처럼 젊은 세대로 무게 추를 옮기게 된 건 비교적 최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패닉이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봅니다. 인류에 치명적인 전염병은 대체로 육식 문화에서 촉발된 게 많습니다. 메르스, 광우병도 그렇고 돼지독감도 마찬가지죠. 반려동물 인구가 늘고, 생존을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자각도 가치소비 본능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소비에 적극적인 젊은 세대를 잡기 위해 대기업들도 '채식'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풀무원, 농심, 신세계푸드 등에서도 대체육 식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고, 대체육 브랜드를 사용하는 비건 식당을 론칭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채식 시장 잠재력은 큰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대체육 시장 규모는 약 238억 원 수준입니다. 가장 규모가 큰 미국에 비하면 약 2%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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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에 비토(veto)하는 정신이 채식주의다보니 축산업계와의 갈등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대체육을 일컬어 '고기'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대체육을 과연 '축산' 코너에서 팔아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겁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전국한우협회 등 26개 단체는 지난해 12월 축산 코너 매대에서 대체육을 판매하고 있는 대형마트에 "소비자 인식을 왜곡한다"며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콩으로 만들었으니 두부 등을 진열해 놓은 가공품목에 배치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정부에 식물성 대체 식품에 '고기'나 고기를 뜻하는 '육(肉)'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현재 국내 대형마트에서 대체육을 판매하는 매장은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를 합쳐서 150곳 미만입니다. 이중 가장 적은 약 20개 매장에서 대체육을 판매하고 있는 이마트는 아직 냉동 축산 코너에서 대체육을 판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매출 규모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전체 육류 매출 대비 대체육 매출 비중은 0.006%에 불과합니다. 이마트 측은 "축산업계에서 매대 위치를 두고 항의성 공문을 두 차례 보내왔지만 식물성 대체육을 찾는 고객들의 접근성을 따져 배치했다"고 밝혔습니다.
축산업계 항의가 빗발치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기준 마련을 위한 연구조직을 결성하고 가이드라인 마련에 돌입했습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식물성 원료는 물론 줄기세포 배양 등을 통한 배양육을 원료로 인정하기 위한 안전성 기준을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명칭, 표시, 정의 등을 어떻게 구분하면 좋을지도 자문도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현재까지는 대체육에 대한 뚜렷한 지침은 고시로 마련되지 않았지만 '소비자를 기만하는 표시 또는 광고를 금지'한다는 식품표시광고법에 의거해 '고기', '육(肉)' 등의 표현은 규제 대상으로 유권해석 처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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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을 둘러싼 논쟁은 이른바 공장식 축산업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미국 텍사스 주에서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텍사스 주는 지난해인 2021년 5월 고기의 정의를 '소, 돼지, 닭 또는 기타 가축에서 도축한 식용 부분'으로 한정하는 식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비슷한 법이 미시시피, 미주리, 루이지애나 주 등에서도 제정됐습니다.
이 법에 따라 콩이나 두부 같은 단백질로 만든 제품이나 벌레 또는 세포 배양을 통해 만든 제품을 '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으로 부르는 것이 금지됐습니다. 다만 '버거'라는 명칭은 새로 제정된 기준에서 빠졌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구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는 것이 법 제정의 이유입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2020년 유럽 의회에선 '채식 버거', '채식 소시지' 같은 명칭을 대체육에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됐으나 부결됐습니다. 지난해 '크림 같은', '버터 같은' 이라는 표현도 식물성 식품에 쓰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역시 부결됐습니다. '상식적 수준에서 허용 가능한 표현'이라는 이유에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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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니즘'이 이른바 '돈 되는' 가치 소비재로 자리 잡으면서 식품 업계를 넘어서 패션에서도 '비건'을 표방한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물 가죽이나 털을 뽑거나 깎아 만드는 의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을 최대한 지양하자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반대 급부로 '비건'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는 합성 섬유 재질의 옷들이 환경에 더 악영향을 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폴리에스테르, PVC 소재의 합성 섬유들은 결국 또 다른 환경오염의 주범, 플라스틱이라는 겁니다. 물론 ESG에 대한 투자가 강화되면서 땅에 묻으면 썩는 재생 소재를 활용한 옷과 신발 등 제품도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진정한 채식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루 한 끼만 고기를 먹는 것으로도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실천적 방안부터,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채식에 길들여진 식습관을 국가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정책'까지 채식 문화도 더는 지나칠 수 없는 '대세'가 된 걸까요?
■ 참고문헌
조너선 사포란 포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2011, 민음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우리가 날씨다>, 2020, 민음사
주윤지‧강주연‧정자용, <서울지역 성인여성의 채식주의 실태 및 관련 식행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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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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