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장관 별세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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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공산당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체코 이민자의 딸에서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에 오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3일(현지시간) 별세했다. 85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가족은 그가 이날 워싱턴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소련이 붕괴한 1991년부터 2001년 9·11 사태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미국 외교의 '얼굴'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 1기에 유엔대사(1993~1997)를 지냈고, 2기 때 국무장관(1997~2001)으로 일했다.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한 탈냉전 시대 초반에 미국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국제 질서를 구축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확장하고, 발칸반도에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를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하는 등 '적극적 다자주의(assertive multilateralism)' 외교의 틀을 만들었다.
2001년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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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는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세계정세를 억지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의미로 "필수 불가결한 국가(indispensable nation)"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2001년 미국 장관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기도 했다.
그는 결혼과 출산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늦깎이' 학자로 출발했다. 탁월한 정치력과 개인적 매력으로 미국과 해외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외교 사령탑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NYT) 등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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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공산주의 피해 11세 때 미국으로 망명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1937년 체코에서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와 공산당의 처형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두 차례 망명했다. 1939년 나치가 체코를 침공했을 때, 48년 소련 지원을 받은 체코 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왔다고 NYT는 전했다.
올브라이트 가족은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피해를 본 유대인이었다. 조부모 3명을 포함한 가족 26명이 아우슈비츠 등 집단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올브라이트는 60세가 된 1997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살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낀 부모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올브라이트는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WP 특종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체코 역사에 정통한 학자가 오랜 기간 자신의 가족사를 몰랐다는 데 의구심을 가졌다고 WP는 전했다. 올브라이트는 당시 인터뷰에서 "부모님은 자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훌륭한 분들이셨다"면서 "그분들의 동기를 의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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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결혼 생활 종지부 찍고 전문가로 발돋움
올브라이트는1976년 컬럼비아대에서 공법 및 행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39세 때였다. 은사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가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한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됐을 때 그를 의회 담당으로 데려갔다.
올브라이트는 남편 외도로 이혼한 뒤 외교 전문가로 본격적으로 발돋움했다고 미국 언론은 전했다. 신문사에서 인턴을 하면서 만난 미디어 기업가 집안의 아들과 22세에 결혼해 46세에 이혼했다. 거액의 이혼 합의금을 바탕으로 워싱턴 사교계 여왕으로 떠올랐고 정치적 영향력과 인맥을 쌓았다.
WP는 "올브라이트 박사 경력에 가장 큰 기폭제(catalyst)가 된 것은 1982년 남편이 그를 떠나 다른 여성에게 갔을 때였을지 모른다"면서 "그는 처음에는 망연자실했지만, 이혼 합의가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당시 그는 워싱턴 시내 부촌인 조지타운 주택과 교외에 150만㎡(약 45만 평) 규모 농장, 그리고 1990년대 말 기준으로 350만 달러(약 42억 6000만원) 가치의 주식을 받았다.
조지타운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택을 미국 외교 정책을 논하는 '살롱'으로 변신시켜 정치인 및 외교 전문가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정치인을 위한 모금 활동을 주도하고, 외교 정책을 자문했다. NYT는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1984년 월터 먼데일, 1988년 마이클 듀카키스, 1992년 빌 클린턴까지 대통령 후보 3명의 외교 자문을 거쳤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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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언사의 매파 외교관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세계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는 미국뿐이며, 미국의 존재나 지원이 없다면 다자간 노력은 실패할 것이라는 "필수 불가결한 국가"론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미국은 세계 최대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 갈등을 해소할 수 있고,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수호해야 할 책임도 있다고 믿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1998년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에 협조를 거부했을 때 NBC 인터뷰에서 "우리가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수불가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라면서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우뚝 서서 먼 미래를 내다본다"고 말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미국의 영향력을 발휘해 동유럽 독재자들과 반(反)민주적 집단의 반 인류 범죄를 소탕하는 데 힘썼다. 가족이 나치 독일과 공산화를 경험한 영향이 컸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에 이르기까지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을 멈추기 위해 미국과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다.
유엔군의 세르비아 공습을 주장하며 발칸반도에서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를 꺼리던 콜린 파월 당시 미국 합참의장과 언쟁을 벌였다. "우리가 사용할 수 없다면 당신이 항상 말하는 훌륭한 군대를 갖는 이유가 뭐냐"고 거침없이 몰아붙인 일화가 유명하다. 훗날 파월은 "동맥류에 걸리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올브라이트는 정교한 논리와 지식을 바탕으로 설득의 외교에서도 기량을 발휘했다. 러시아와 미국 상원을 설득해 폴란드와 헝가리, 모국인 체코를 나토에 가입시킨 것은 그의 최대 외교 업적 중 하나라고 WP는 평가했다.
유럽이 미국의 안보 파트너여야 한다는 믿음에 나토 확장을 추진했다. 하지만 유럽 문제에 너무 매진한 나머지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대한 전략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자리에서 내려온 2001년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자유 무역이란 날개를 단 중국은 무섭게 시장을 넓히며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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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장관 중 첫 방북…비핵화 관여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했다. 특히 북한 비핵화 문제에도 관여했다. 1999년 미국은 대북 포용 정책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하고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조치를 취했다.
이듬해 7월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만나 북미 고위급 교류의 물꼬를 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과 협의해 적대관계 종식, 평화보장 체제 수립, 국무장관 방북 등을 골자로 하는 북미 공동 코뮤니케 발표를 성사시켰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했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남성 위주인 외교 및 국가안보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고 후배 여성들에게 길을 터 준 것도 올브라이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올브라이트 이후 임명된 국무장관 3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
올브라이트 후임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남성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여성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임명했다. 이어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기용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장문의 성명을 통해 "매들린은 항상 선함과 우아함, 품위를 지난 사람이었으며, 자유를 위해 힘썼다"고 애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과 모든 연방 정부 건물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최근 올브라이트 전 장관과 대화를 나눴는데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미국이 방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고 전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park.hy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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