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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이슈 [연재] OSEN '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속초시 설악고 야구부 출정식에 가다…척박한 지방학교 운동부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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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瑞雪)이었다. 3월 20일, 강원도 속초시 설악고등학교(속초시 청대로 219. 교장 이웅)를 찾아간 날은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인해 설악고 교정에도 눈이 잔뜩 쌓여 있어 발이 푹푹 빠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신임 감독을 맞아 새롭게 출발하는 설악고 야구부로선 그야말로 희망과 축복의 봄눈이라 할 만했다. 설악고는 설악산이 굽어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설악산은 때마침 내린 흰 눈을 머리에 인 채 설악고 교정에서 아스라이 바라다보였고,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설악고 야구부는 그날, 학생들이 급하게 길목의 눈을 치운 340평(1130m⊃2;) 남짓한 실내 야구장에서 이웅 교장을 비롯한 학교 선생과 학부모, 총동창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야구부 출정식을 열었다. 꿈과 희망에 부푼 선수들의 맑은 눈망울,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학부모들의 마음이 그대로 읽히는 자리였다.

설악고는 1970년 속초실업고등학교로 개교한 이래 1976년 속초상업고등학교를 거쳐 2008년 설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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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생이 700명 채 안 되는 설악고의 야구부원은 모두 25명. 3학년생 11명, 1, 2학년생 7명씩으로 어렵사리 팀을 꾸렸다. 야구부원 대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1998년에 창단했던 설악고 야구부는 한국 프로야구 1호 만루홈런의 주인공 이종도를 비롯해 정순명 유두열 강정길 같은, 이른바 유명 선수 출신들이 감독을 거쳤으나 신통한 성과를 못 냈고, 잡음이 일기도 했다.

강원도에는 설악고를 비롯해 강릉고, 강원고, 원주고 등 모두 4개 고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선수 수급에 애로를 겪는 것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여느 지방 야구부와 다를 바 없다. 강릉고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성공기를 썼으나 김진욱 같은 우수한 자원을 수원에서 스카우트해온 덕분이다.

설악고도 마찬가지다. 속초시나 인근 지역에서 선수를 자체 충당할 수 없는 데다 주변의 지원조차 너무 빈약해 이른바 외지의 우수학생 스카우트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던 터였다.

지난해 9월에 새로 부임한 이웅 교장이 야구부 재건과 환경 개선에 발 벗고 나선 데 이어 야구부 감독을 공모한 끝에 윤현필(51) 감독을 발탁했다. 공개채용 형식으로 19명의 응모 경쟁을 뚫고 선택받아 3월 초에 부임한 윤현필 신임 감독은 광주진흥고와 건국대를 나온 내야수 출신 지도자. 실업팀 현대피닉스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진흥고 코치와 감독, 김해고 수석코치, 연세대 코치 경력을 쌓았고 코치로 재직했던 학교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등 경험이 풍부하다.

정부 방침에 따라 야구선수들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닌, 풀기 힘든 현장의 딜레마다. 엘리트 선수 육성과 진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웅 교장의 교육이념은 확고하다.

“성적보다 인성교육이 중요하고, 학업을 병행시켜 가르치다 보면 성적은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학교 수업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야구가 아닌 다른 분야로 진출해서도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장의 방침에 3월 초에 부임한 윤현필 감독도 전적으로 공감, 그에 발맞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윤현필 감독은 “오전에는 수업을 받고 오후 정해진 시간에 단체 훈련을 한다. 그 이후는 개인 생활이다. 다만 합숙소 생활이니만치 밤 11시 소등 이후 새벽 한두 시까지 개인 연습을 하는 학생들을 만류할 수는 없다”면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데 지장이 없게끔 시간 활용을 잘하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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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들의 꿈과 희망 사항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프로 선수가 되는 것과 대학 진학이다. 그런 측면에서 감독의 지도와 배려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윤 감독은 “단순히 야구만 잘해서는 안 된다. 감독 이전에 진학 선생으로서 프로, 아니면 대학으로 방향을 잡은 선수들의 학업과 기록관리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어디까지나 성적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이 선수 수급, 특히 우수선수의 확보문제다. 학부모의 월회비와 학교의 뒷받침만으로 야구부를 꾸려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점에서 주변의 도움이 절실한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다행히 설악고는 이번에 야구선수 출신으로 고교 감독도 역임했던 익명의 독지가가 앞장서서 야구부 선수들을 위한 장학금 명목으로 1000만 원을 쾌척, 재능은 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지원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에 화답해 설악고 총동창회와 속초시 야구협회도 야구부 후원금 적립에 동참했다. 비록 부족하나마 설악고 야구부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발판은 마련한 것이다.

윤현필 감독은 “최재호 감독의 강릉고 같은 경우도 성적을 내기까지 4, 5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 결실 뒤에는 강릉시나 동창회의 장학금제가 있을 것”이라면서 “선수 부모의 부담을 줄여준다면, 앞으로 설악고도 5년 뒤에는 강릉고 못지않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설악고가 발전해야 속초시 일원의 리틀야구 팀이나 초, 중학교 선수들을 다른 지역에 뺏기지 않게 된다. 지원 미흡으로 속초 시내 선수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고, 다시 외지의 선수를 데려와 팀을 꾸려가야 하는 악순환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설악고 이웅 교장은 이번에 외부의 도움을 계기로 우수선수에 대한 장학제를 정착시킬 작정이다.

설악고 실내 야구장에는 선수들을 위한 두 가지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맑고 청명한 날을 보기 위해서는 흐리고 어두운 날을 거쳐야 한다’는 플래카드가 야구장 오른쪽에,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십계(十戒)’를 걸어놓았다.

플래카드가 낡아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그 십계에는 ‘공의 뒤를 느릿느릿 쫓는 선수는 결코 야구선수가 될 수 없다’, ‘혼신의 정신이 집중된 채 배트가 나가지 않으면 결코 3할대 타자가 될 수 없다.’, ‘전일 경기를 너무 오래 생각하는 선수는 오늘 경기도 망친다.’, ‘언제나 뛰어라. 말보다 다리가 먼저다.’, ‘집중! 또 집중하라!’ 따위의 선언적인 글귀가 실려 있다.

이런 ‘의식화’가 학생 선수들에게 얼마만큼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운동을 좋아해 메이저리그 야구도 자주 보는 편”이라는 이웅 교장은 “감독선발 심사위원회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로 훌륭한 감독을 뽑았다고 생각한다.”고 윤현필 감독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설악고 야구부의 침체와 역대 감독들의 실패 원인에 대해 “그동안 많은 동문이나 주변 사람들이 인성을 가르치는 것을 보지 않고 성적이 안 나오면 불평했다. 오자마자(설악고 부임을 말함) 야구 코치진을 보름 만에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명 선수 출신 감독이 오면 성적을 내는 데만 혈안이 됐다. 학생들을 성적 내려는 도구로, 제 얼굴 알리거나 학부모 만족을 주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 듯하다. 교육자가 아니라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반짝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웅 교장은 “야구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교육이다. 성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적은 2, 3년 뒤에 부수적으로 쫓아오는 것”이라며 “교육적인 의문은 있을 수 있겠지만 학교장으로서 (선수가) 야구를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야구를 하면서 인성을 배웠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운동에만 몰입하는 것이 훌륭한 선수’라는 잘못된 사고가 우리나라 스포츠계에 널리 퍼져 있다. 열과 성의를 가진 사람, 이론과 실기, 문무를 겸비하면 이것저것 잘할 수 있다.”는 그의 교육 지론은 귀여겨들을 필요가 있다.

이웅 교장은 이렇게 야구부 코치진과 학생 선수, 학부모들에게 당부했다.

“야구만 잘 가르치는 것보다는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성을 가르쳐주시길 바란다. 야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통해서 인성을 기르고 야구를 끝내고도 인성에 초점을 두는 교육을 해야 한다. 내 아이만 야구 잘하면 된다는 마음보다 하나 되어 믿고 바라보고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린다. 선수들은 야구를 즐기자. 입에 단내가 나는 기본훈련을 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실책을 두려워하지 말고 창피해하지 말아라. 극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자. 우리 팀보다 잘하는 팀 만났을 때 기죽지 말자. 큰 배짱을 가지고 당당하게 제 실력을 발휘하자.”

설악고가 참 야구 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선수들의 인성이 무너진 시대, 야구 기능은 출중하지만, 툭하면 일탈과 방종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고액 프로야구 선수들의 모습이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이제 다시는 ‘일그러진 영웅’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글, 사진/ 홍윤표 OSEN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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