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1일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열린 경제 6단체장과의 회동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 당선인은 이날 비유적 표현을 사용해 규제개혁 의지를 밝혔다. 국회사진기자단 |
“신발 안에 돌멩이가 있으면 힘들어서…” (2013년 1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필요 규제들을 빼내…” (2022년 3월 21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의도된 레토릭일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사용한 ‘신발 속 돌멩이’란 표현을 두고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사용한 비유를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21일 경제 6단체장을 만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필요한 규제들을 빼내 기업들이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껏 달릴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는 글을 남겼다. 간담회 현장에선 기업의 해외 진출 규제를 두고 “모래주머니를 달고 메달 따오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도 했다.
2013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열린 국정기획조정분과 국정과제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윤 당선인의 이 말은 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2013년 1월 경제1분과 업무보고를 받던 자리에서 “먼 길 좋은 구경 간다고 해도 신발 안에 돌멩이가 있으면 힘들어서 다른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고 말한 것과 거의 표현이 똑같았다. ‘모래주머니’에 대해선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박 전 대통령의 “손톱 밑 가시”란 비유가 떠올랐단 말도 나왔다.
당선인 측 관계자들은 “규제 개혁에 관한 좋은 표현을 고민하다 사용한 것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내부에선 “곧 퇴원(24일께 예정)을 앞둔 박 전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 아니냐”는 해석들을 제기했다. 윤 당선인이 대선 후보 시절 “박 전 대통령을 찾아뵙고 싶다”는 말을 수차례 해왔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이명박정부 국정운용에 관한 합동워크숍'에 참석해 이경숙 인수위원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
역대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들에게 ‘비유적 표현’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었다. 자신의 의도를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하면서도 권위와 품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 기간 일곱 글자 단문 메시지 등 직설적 표현을 사용해왔던 윤 당선인의 변화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단 해석이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대선 후보와 대통령 당선인의 메시지는 그 격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유를 가장 즐겨 사용한 건 박 전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심지어 임기 4년 차였던 2016년 2월 박 전 대통령의 어록을 담은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를 출간했다. 경제활성화법 처리 지연을 ‘불어터진 국수’로 비유하거나 ‘창가문답(창조경제의 가시화는 문화에 답이 있다)’는 표현 등이 포함됐지만, ‘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지며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규제개혁의 상징으로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언급한 것도 정치권에선 유명한 일화다.
문재인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문재인 정부에선 비유는 아니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문장이 정부의 상징과 같은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취임 초기 높은 지지율을 견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장들은 조국 사태가 터지며 문재인 정부에게 역풍으로 되돌아왔다.
2018년 문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강조하며 “19세기 말 영국에서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며 사용한 ‘붉은 깃발’의 비유도 마찬가지였다. 이재웅 전 쏘카 대표는 이듬해 국회의 '타다금지법' 통과와 관련해 “해외 토픽감이다. 지금이 2019년이 맞기는 하는가. 150년 전 영국의 ‘붉은 깃발법’과 다를 것 없다”며 문 대통령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 되돌려줬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신발 속 돌멩이가 빠지듯 규제개혁이 이뤄지려면 말뿐만 아니라 실천이 함께해야 한다”며 “윤 당선인과 국회의 협치가 결국 핵심 아니겠냐”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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