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 제공= 로이터AF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푸틴의 전쟁은 유럽의 9·11이다."
미국 정치외교 전문 매체 포린폴리시는 지난달 28일자 칼럼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같이 규정했다. 9·11 테러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 회원국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도 아니라는 점에서 일견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례 없는 EU의 대응만은 9·11 테러 당시 미국에 비견할 만하다.
9·11은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첫 해 발생했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2001년 1월 취임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쭉 50%대에 머물다 9월 말 86%까지 상승했다. 부시 재임 8년 중 가장 높았던 시기다. 당시 그에 대한 지지율이 90%를 넘었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9·11 당시 미국이 그랬듯 러시아의 침공 후 유럽은 전례 없는 단합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Brexit)로 분열 위기에 몰렸던 EU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새로운 시대에 진입… 獨 동방정책의 종언"= 르몽드 최초 여성 편집국장을 지낸 실비 코프만은 우크라이나의 비극 위에 새로운 유럽이 부상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를 증명하듯 EU의 주요 지도자들은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다.
EU 순회 의장국을 맡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한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우리 대륙과 우리 시대의 결별을 의미한다. 유럽은 단결을 보여줬으며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브렉시트로 EU 분열 위기를 촉발한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지난 6일 뉴욕타임스(NYT)에 기명 기고를 싣고 EU의 단합을 강조했다. 존슨 총리의 기고는 "지난 한 주 동안 우크라이나의 가슴 아픈 상황들에 대처한 서구의 단합은 인상적이고 고무적이었다"로 시작한다. 그는 "(유럽은) NATO와 미국 안전 보장에 안주했다"며 "다시 전쟁 억지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유력 일간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브렉시트에 대한 환상을 끝내버렸다고 평했다.
EU의 맹주 독일 정부도 극적인 변화를 선택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은 EU, NATO 회원국, 그리고 호주·일본·스위스·뉴질랜드 4개국을 NATO에 준하는 국가(NATO-equivalent countries)로 규정하고 이들 외의 제3국에 대한 무기 수출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하지만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의 침공 다음 날인 지난달 25일 이례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1000개와 스팅어 미사일 500개를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숄츠 총리는 "러시아의 침공은 전환점이 됐다"며 "최선을 다해 푸틴의 침공을 방어하고 우크라이나를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독일 외교위원회의 러시아 전문가인 슈테판 마이스터 박사는 "동방정책(독일어 Ostpolitik)의 끝을 의미한다"고 평했다. 동방정책은 1969년 취임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취한 공산권 국가와의 화해 정책을 뜻한다.
◆러시아 공포증 vs 서구 공포증= NATO 가입을 꺼렸던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뿌리 깊은 러시아 공포증(루소 포비아)이 더욱 확대됐기 때문이다.
핀란드 방송사 YLE가 지난달 23~25일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NATO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이었다. 설문 응답자 53%가 NATO 가입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YLE가 마지막으로 NATO 가입 의견을 물었던 2017년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19%에 불과했다. 스웨덴 타블로이드 아프톤블라데트(Aftonbladet)가 지난 4일 공개한 여론 조사에서도 NATO 가입 찬성률이 51%로 반대 여론(27%)을 압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EU 가입 신청서에 서명한 사실을 알리며 EU에 특별 절차를 통해 즉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지아와 몰도바도 지난 3일 EU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만약 이들 국가가 EU에 가입한다면 2013년 크로아티아 가입 이후 약 10년 만이 된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EU에 가입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러시아를 더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EU·NATO 가입 저지다. 서구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EU와 NATO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갖고 있다.
스티븐 월트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는 (서구의)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우크라이나 위기를 불렀다고 지적했다. 1991년 소련 해체를 계기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승리에 도취된 서구 유럽 국가들이 과하게 세력을 확장한 것이 러시아의 반발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실제 EU는 2000년대 중반 세력을 급속히 키웠다. 2004년 5월 폴란드, 헝가리, 체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키프로스, 몰타 등 동유럽 10개국을 한꺼번에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2007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추가로 받아들였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이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EU의 확장은 제동이 걸렸다. 동유럽 국가들이 잇달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등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으면서 EU 가입에 대한 회의론이 급속히 확산됐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금융위기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되레 일부 동유럽 국가 사람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금융위기 뒤 EU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는 크로아티아가 유일하다.
러시아와의 정면충돌이 부담스러운 EU는 내심 우크라이나를 완충 지대로 러시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EU의 바람과 달리 2014년 러시아가 지지하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으로 축출한 뒤 꾸준히 EU 가입을 추진했고 결국 푸틴은 이를 참지 못했다. 이미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낸 푸틴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서구와 러시아 간의 타협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크라, 제2의 아프간 되나= 한편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우크라이나가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수도 있다고 포린폴리시는 분석했다. 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1989년 10년 만에 패퇴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베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련에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포린폴리시는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클 정도로 광활한 데다 서구의 전폭적인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