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센트럴 역의 야경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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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연재물의 글감을 찾는 고전적인 방법은 책과 신문을 정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과 신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영상 미디어를 추가해야 한다. 특히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 게 좋다. 어떤 영화를 보아야 할까.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다. 제목, 소재, 배경 등이 선택 기준이다. 그중에서 내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영화가 전개되는 공간 배경과 실화(實話)를 바탕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이다.
영화 제목에 빈, 파리, 뉴욕, 런던, 베를린과 같은 도시가 들어갔다든가 제목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영화 배경에 세계적인 도시들이 나오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다가 '레이니데이 인 뉴욕'(A Rainyday in NewYork)을 몇 번 지나쳤다. 볼까 말까. 그러다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영화감독 인터뷰를 하러 뉴욕에 간 대학신문 여기자와 남자친구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에게 우연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엮었다.
내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두 가지다. 과연 뉴욕이 들어간 이 영화에도 '그곳'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뉴욕의 어떤 모습이 그려질까 하는 기대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전반부에 여주인공의 입에서 이곳이 나왔다. 나는 영화를 정지시켜놓고 자막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시계 아래서, 영화처럼."
2020년 미국 NBC '지미 팰런쇼'에 출연했을 당시의 방탄소년단. 방탄소년단은그랜드센트럴 역 로비를 배경으로 '온'(ON) 퍼포먼스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Andrew Lipovsky / NBC 제공 ©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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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터' '커튼 클럽' '아마겟돈'…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Grand Central Terminal).
44개 플랫폼과 67개 노선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기차역이다. 뉴욕이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들을 보면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이 기차역이 등장하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몇 개를 열거하면 '커뮤터' '2시 22분' '어벤저스' '아마겟돈' '커튼 클럽' 등이다.
'커뮤터'(Commuter)는 말 그대로 통근자라는 뜻이다. 보험 판매원이 된 전직 경찰이 주인공(리암 니슨 분)이다. 뉴욕 교외에서 기차로 맨해튼 한복판의 회사로 출퇴근한다. 그러다 범죄에 휘말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커뮤터'를 보면 이 기차역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그랜드 센트럴 역)이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된 것은 방탄소년단(BTS) 때문이다. BTS가 2020년 미국 NBC방송의 '지미 팰런쇼'(The Tonight Show Starring Jimmy Fallon)에 출연하면서 그랜드 센트럴 역의 로비를 배경으로 '온'(ON) 퍼포먼스를 처음으로 펼쳤다. 널찍한 로비, 시계탑, 매표박스 등이 훌륭한 무대가 세트가 될 줄이야. BTS로 인해 그랜드 센트럴역이 세계의 '아미'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었다. 실제로 BTS 퍼포먼스가 나가고 그랜드 센트럴 역을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BTS와 그랜드 센트럴 역을 입력하면 블로그 탐방기가 주르륵 뜬다.
BTS 공연 이전에 그랜드 센트럴 역을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알게 된 것은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2' 때문이 아닐까. 백종원이 세계 주요 도시를 발로 걸으며 식도락기행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백종원이 그랜드 센트럴 역을 찾아간 것은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驛舍) 안에 있는 유명한 식당 때문이다.
오이스터 바 & 레스토랑(Oyster Bar & Restaurant). 상호에 굴이 들어간 것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식당은 굴 전문 식당이다. 특이한 것은 굴을 품종·산지별로 분류해 손님의 주문에 따라 내놓는다는 점이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맛과 식감이 각기 다른 굴을 음미하며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게 뉴요커다. 나는 이 식당에서 뉴요커들은 굴을 품종과 산지를 따져가며 즐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세계인문여행' 6회 참조)
영화 '2시 22분'에서 주인공이 그랜드 센트럴역 로비를 내려다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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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22분'이란 영화에서는 그랜드 센트럴 역이 아예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된다. 2017년에 나온 이 영화의 주인공은 뉴욕 JFK 공항의 항공관제사 딜런. 딜런은 현상의 패턴을 읽어내는 데 비상한 능력이 있다. 자연현상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믿는 그는 남들이 그냥 넘기는 사소한 패턴에서도 숨은 의미를 찾아낸다. 그는 패턴에 숨은 의미를 읽어내면 불행도 막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전생의 일이 반복되는 공간이 바로 그랜드 터미널역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시계탑이 있는 메인 로비에서 사건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딜런은 패턴을 읽어내는 데 성공해 자신의 애인이 희생되는 것을 막는다.
그랜드 센트럴 역이 유명한 것은 유구한 역사, 터미널 규모, 여객 수 등과 함께 풍부한 스토리들이 공간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어서다.
그랜드 센트럴 역을 세계적으로 알린 것은 단연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이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 또한 유명해졌다.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집이 있는 뉴욕에 왔지만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방황하며 들르는 지점들이다. 펜실베이니아 역, 그랜드 센트럴 역 오이스터바, 메인 로비 시계탑, 센트럴파크 연못, 센트럴파크 회전목마, 라디오시티…
드보르자크는 왜 뉴욕行을 선택했을까?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이 자주 연주하는 교향곡 레퍼토리를 선정해 취합한다면? 아마도 상위 10곡에 신세계교향곡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의 9번 교향곡은 국적과 관계없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9번 제목은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다. 이를 보통 '신세계교향곡'이라 부른다.
'신세계교향곡'은 알려진 대로 드보르자크가 뉴욕국립음악원장으로 초빙돼 1892~1896년 미국에 살면서 쓴 작품이다.
오십 넘어서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19세기 오십대면 지금 나이로 환산하면 환갑이 넘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절 보헤미아에서 신대륙 미국에 간다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을 요하는 일. 엄청난 체력 소모를 각오해야 한다. 기차와 마차를 바꿔 타고 뉴욕행 정기선이 출항하는 항구에 도달하는 데만 여러 날이 걸린다. 여객선에 승선해서는 장시간 뱃멀미를 각오해야만 밟아볼 수 있는 게 미국땅이다. 그런데도 드보르자크는 뉴욕을 선택했다.
일생일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보헤미아라는 내륙 공간에 갇혀 있던 음악세계의 지평이 뉴욕에서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렸다. 뉴욕 4년은 신대륙의 거대한 역동성에 놀라워하면서 그와 동시에 보헤미아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괴로워한 나날이었다. 미국의 용솟음, 흑인 영가(靈歌), 향수병 등이 뒤섞여 빚어진 작품이 '신세계교향곡'이다.
작곡가는 뉴욕 초청을 받고 고민했다. 연봉을 비롯한 대우가 보헤미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음에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이 나이에 고향을 떠나 물설고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주저하고 망설이는 그를 움직인 것이 바로 그랜드 센트럴 역이다.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기차역에 가면 언제든지 미국 전역에서 오고 가는 기차를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석탄차, 침대차, 식당차가 달린 최신식 열차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기차 구경을 언제든 실컷 할 수 있다는 말에 작곡가는 흔들렸다. 음악을 제외한 유일한 취미이자 관심사가 기관차였다. 가족회의 끝에 결국 초청서에 서명한다. 작곡가는 실제로 뉴욕에 살면서 시카고행 특급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려고 그랜드 센트럴 역을 찾아가곤 했다.
넬라호제베스 역사 전경. 현재는 폐역이 되었다. 조성관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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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에 본 기차, 평생의 취미가 되다
작곡가의 고향은 보헤미아 넬라호제베스.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40여분 거리다. 1849년 어느 날. 여덟 살 소년은 부모님과 함께 집 앞에 난 기차역으로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기차역 플랫폼에 모였다. 그날 프라하에서 출발한 기차가 30여분 만에 넬라호제베스 역에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프라하는 마차로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 쇳덩어리 바퀴가 증기 내뿜는 소리와 함께 굴러가는 모습은 소년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소년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쇠바퀴가 철로 위를 굴러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기차는 소년에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기차 관련 사진과 자료를 수집하는 게 평생의 취미가 되었다. 실제로 기차역에 나가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했다.
작곡가로 성공하고 프라하에서 살 때 그의 집은 지트나가(街) 14번지. 이 집에서 프라하 중앙역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작곡가는 곡이 잘 써지지 않거나 머리가 복잡해지면 으레 프라하 중앙역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그는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모든 열차의 시간표를 다 꿰고 있었다. 기차를 관찰하고 기차를 연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는 '기차 박사'가 되었다.
기차는 창작의 압박감에서 작곡가를 해방하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그랬으니 미국에서 가장 큰 기차역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프라하 중앙역은 그랜드 센트럴 역에 비하면 규모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43년 된 취미가 타향살이에 지친 작곡가를 위로했다.
프라하 중앙역의 플랫폼. 조성관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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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오픈한 그랜드 센트럴 역은 1960년대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맨해튼의 상징을 지켜야 한다는 운동을 벌인 이가 재클린 케네디다. 맨해튼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게 했다.
BTS의 그랜드 센트럴 역 퍼포먼스를 보다 보면 누구나 이 역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들은 더할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본 두 편의 영화 속에서 그랜드 센트럴 역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랜드 센트럴 역은 조명이 켜진 야경이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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