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 속 우크라 거주 한인이 전하는 '키이우(키예프) 일기' ①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한국교육원에서 근무하는 임길호(51) 실장이 전쟁 발발 후 키이우 상황을 2일(현지시간) 중앙일보에 e메일로 보내왔다. 우크라이나에서 22년째 거주하고 있는 임 실장은 한국 대사관의 대피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정상 현지에 남았다가 발이 묶였다. 임씨가 전해온 현지 소식을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주식인 빵·고기 동났는데, 과자로 버틸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미콜라이우의 한 마트 물건이 1일 거의 동났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일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습이 있을 거란다. 키이우 북부 지역에 사는 지인은 특별 방공호로 이동했다. 로켓이 어디로 날아올지 예상할 수 없으니 나도 걱정이다. TV로 전쟁 관련 소식을 듣고 있는데 키이우 북부와 서부 피해가 큰 것 같다. 1일 오후 늦게 굉음과 함께 사이렌이 들리더니 방송에서 TV 타워(방송 수신탑) 피격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러시아가 이제는 무차별 작전으로 나가는 것 같다.
지난달 24일 새벽 5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걸 지인의 연락을 받고 알았다. 이후 피란길에 오르지 못하고 수도 키이우 남부에 있는 집에 머물고 있다. 침공 후 4~5일은 정신이 없었다. 계엄령에 이어 강력한 통행금지(2월 26일 오후 5시~28일 오전 8시)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직 수도와 전기는 공급되고 있다. 통신도 끊기지 않아 인터넷도 가능하다. 하지만 키이우 주변 유류 저장 시설이 지난달 27일 폭격 당했다. 한동안 차량 주유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 다른 기간 시설도 공격받으면 어떻게 생활할지 막막하다.
식량도 걱정이다. 지금 시내 매장에는 주식인 빵·햄류·육류 등이 동이 났다. 기타 식품류는 아직 구할 수 있다. 매장마다 재고분을 전부 방출해 시민들을 돕고 있지만 기본 주식이 없이 지내기는 힘들다. 과자를 먹으면서 버티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상황이 나아지면 빵 제조 공장이 바로 가동하겠지만 언제일지 기약 없다. 약국도 사명감을 가지고 문을 열었고, 특정 의약품은 무료로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공습경보가 울리는 동안 군 차량을 타고 인적이 없는 도로를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러시아 탱크 막고 철군하라고 소리치는 우크라이나인
이번 침공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 '므리야(Mriya)'가 사라진 게 아쉽다. 세계에 딱 한 대인 므리야는 1988년 우크라이나가 만들었고 우주왕복선을 실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키이우 북서부 외곽의 호스토멜 공항에 있었는데 지난달 27일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손실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어로 므리야는 '꿈'을 뜻한다.
므리야는 파괴됐지만 우크라이나의 꿈은 파괴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부 하나가 돼 저항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20만 병력을 충원하며 결사 항전을 계획하고 있다. 비정규 시민군도 포함되어 있다. 벨라루스가 러시아군에 합세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북쪽 국경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입국을 막기 위해 시위하고 있다. 러시아군에게 철군하라고 항의하거나 러시아군 탱크 진격을 막고 설득하는 장면이 계속 방송에 나오고 있다.
━
사재기 없이 평온했던 키이우, 진짜 침공하다니
전쟁 발발 후 키이우는 지하철 역사가 대피소가 됐다. 한 지하철 역사에는 BTS 제이홉 생일을 축하한다는 광고판이 있다. 마리나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나는 한국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어 강좌를 원격으로 수업 중이지만, 올 봄학기에 400명이나 강의를 신청했다. 한국어능력시험도 역대 최고 인원이 접수했다. 2월 중순만 해도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이 걸려도 키이우로 시험을 보러 오겠다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았다. 이에 힘입어 한국교육원은 우크라이나 초·중등 교과서에 한국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을 교육부에 제출할 계획이었다. 이달 내 마감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교과서 개정까지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지난달 11일 한국 대사관에서 12일 오후 5시까지 출국하라고 했을 때 떠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8년 동안 내전 중이라 외부에서 전쟁 위험성을 이야기해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키이우에선 사재기도 없었고 다들 평온하게 일상생활 중이었다. 오히려 매일 보도되는 긴장 상황이 우크라이나 국민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모두 설마 러시아가 전면전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일어나다니 착잡하다.
━
대피소에서 '한국어 공부' 마리나, 서울 가는 게 꿈인데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대피소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있는 마리나. 마리나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일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 시청 건물 포격 이후 중앙 광장이 파괴된 모습. 파손된 차량 옆에 시신이 있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달 28일 한국어 강좌 수강생들에게 e메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 불빛으로 반짝이는 남산타워(N서울타워) 유튜브 영상 주소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에 사는 30세 여성 마리나가 다음날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줘서 감사하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는 멋진 미래를 생각하면서 한국어 시험을 위해 대피소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답신했다. 아이돌 BTS(방탄소년단)를 좋아한다는 마리나는 "지난달 중순 키이우에 갔다가 지하철역에서 BTS 멤버인 제이홉 생일 축하 광고를 봤는데, 지금은 대피소가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전쟁이 끝나면 서울과 부산에 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마리나가 답신한 1일에는 러시아군이 하르키우 시내 광장 등 민간시설을 포격했다. 러시아군은 키이우와 하르키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점령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2014년 민족주의 시위가 일어난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의 원조 지역이다. 흔히 러시아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은 하르키우에 러시아계가 많고 러시아어를 사용해 러시아를 반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크라이나인이라는 강한 독립 정신이 있는 곳이다. 하르키우는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 임길호의 '키이우(키예프) 일기'
임길호 실장은 대학에서 국제지역학을 공부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외관계가 핵심 전공이다. 지난 2월에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북방물류리포트에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나토 가입 전망' 칼럼을 썼다. 러시아 침공 이후 급박한 현지 상황을 담은 1편에 이어 2편에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 및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정치·외교 상황에 대해 전할 예정이다.
임 실장이 근무하는 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은 한국 교육부에서 외교부와 협의해 2017년 3월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의 부속 기관이다.
정리=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