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위 지키려는 美·대만, 추격하는 中…유럽·日 자급도 높이기
지정학적 요소 더해지며 국가 총력전으로…한국의 선택은
반도체 칩 손에 든 바이든 미국 대통령 |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미중 신냉전이 국제 질서의 상수로 자리 잡은 가운데 미래 산업의 근간인 반도체 영역에서는 이미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크게 주목하고 있지만 반도체 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의 총력전이 펼쳐지면서 포연이 짙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메이드 인 USA' 영광 되찾으려는 미국
미국은 오랫동안 유지해온 반도체 산업 우위를 지켜가며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은 최대 반도체 회사인 인텔을 비롯해 AMD, 퀄컴, 엔비디아 등 세계 굴지의 반도체 회사들을 거느린 반도체 강국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에 걸쳐 미국 반도체 산업이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 영역에 집중하면서 세계 반도체 생산의 중심지가 대만, 한국, 중국 등 동북아 일대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고민이 시작된다.
미국은 중국이나 중국의 침공 위험에 노출된 대만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안보 위협 요인이 된다고 본다.
바이든 행정부가 520억 달러(약 62조4천억원)의 반도체 육성 투자 계획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메이드 인 USA 반도체'를 다시 늘리는 것이다.
세계 1∼2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인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가 미국에 대규모 시스템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인 가운데 미국 인텔도 최근 오하이오주에 200억 달러(약 24조원)대를 투자해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겠다는 발표를 한 것은 미국의 노력이 일정한 성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반도체 전쟁' 전략의 다른 한 축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다.
미국은 다양한 제재를 활용, 중국 최대 파운드리인 SMIC(中芯國際·중신궈지) 같은 반도체 업체들이 자국 기술이 포함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막고 있다.
나아가 SK하이닉스가 우시(無錫) D램 반도체 공장에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를 들여놓는 것에 제동을 건 것처럼 미국 정부의 제재는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둔 제삼국 기업에까지 미치고 있다.
미국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매우 선명하다. 앞으로 반도체 시설 투자를 하려는 기업은 중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의 이런 압박은 중국을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주로 '반도체 거함'을 겨냥했던 미국의 제재망은 최근 더욱 촘촘해지는 모습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7일 '중국판 ASML'을 꿈꾸는 중국 유일의 반도체 노광장비 업체 상하이마이크로일로트로닉스(SMEE·上海微電子裝備)를 수출 통제 대상인 '미검증 리스트'(unverified list)에 올렸는데 이는 제재 영역이 '소부장'(소재·부품·반도체)으로까지 확대된 것을 뜻한다.
◇ 국가 총력전에 빅테크 자본까지 동원한 중국
중국 반도체 굴기(PG) |
반대로 중국은 반도체 자급 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다.
아직은 반도체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에 반도체 분야는 중국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의 가장 큰 힘은 국가 차원의 총력 지원 체계에서 나온다.
중앙정부 주도의 반도체 산업 육성 펀드인 '대기금'(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이 유망 반도체 사업을 골라 투자를 선도하면 여러 분야의 국유기업과 지방정부 관할 펀드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십시일반으로 투자에 가세하는 방식이다.
최근 유동성 위기로 파산 절차를 밟던 '중국의 반도체 항모' 칭화유니(淸華紫光) 구제에 나선 것도 결국 당국 주도 펀드였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의 빅테크(거대 정보기술기업)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새로 가세하기 시작한 점이 눈길을 끈다.
중국 최대 인터넷 기업 알리바바는 최근 중국의 유일한 D램 양산 업체인 창신메모리(CXMT·長鑫存儲)의 1조5천억원대 증자에 '전주'로 참여했다.
이번 투자는 국가 주도의 '반도체 자급'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는 '투자 보국'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고강도 규제를 거쳐 당국에 순치된 빅테크의 자금을 반도체 등 국가 차원의 전략 사업 육성에 활용하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예컨대 이젠 국가 차원의 '정규군'뿐만 아니라 '민병대'까지 '반도체 전쟁'에 투입하고 나선 것이다.
경기 급랭 와중에 최근 중국 정부의 가용 재원이 매우 빠듯해졌다. 따라서 민간 빅테크 자금을 활용한 반도체 투자 모델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수조원대 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가 흐지부지 실패하는 등 중국식 반도체 육성책이 늘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칼 하나를 가는 정신으로 핵심 기술 영역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말처럼 중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고, 반도체 완성품에서부터 소·부·장에 이르는 공급망 전체에 걸쳐 서서히 정책 효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중국판 TSMC'인 SMIC, 칭화유니 산하의 낸드 제조사인 YMTC(長江存儲) 및 스마트폰용 시스템온칩(SoC) 전문 제조사인 UNISOC(쯔광잔루이<紫光展銳>) 등이 자국 시장을 중심으로 조용히 존재감을 키워나가는 가운데 작년 중국 내 반도체 제품 생산량은 3천594억개로 전년보다 33.3% 급증했다.
◇ 미중 사이 '줄타기'하며 인력 유출 차단 나선 대만
타이베이 TSMC 사옥의 회사 로고 |
세계 반도체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인 대만의 움직임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대만은 노골적으로 중국을 등지고 미국 주도의 시장 질서 재편에 적극 동조하면서 미국과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TSMC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의 투자 요청에 적극 화답해 2020년 5월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를 투입, 첨단 미세 공정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뒤 관련 공사를 진행 중이다.
다만 미국 재재 이행을 위해 '큰손' 고객 화웨이(華爲)와 거래를 끊은 뒤에도 중국은 북미 지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장이기에 TSMC는 미국과 중국 간의 반도체 전쟁에 과도하게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면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TSMC는 최근 국제관계 분석 업무를 담당하는 박사급 인력 채용 공고를 냈다. 이는 이 회사가 급변하는 국제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도체 인재를 중국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대만 정부의 최근 움직임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대만 정부는 산업 우위를 지키려고 첨단 기술 인력이 중국 취업 전 정부 심사를 받게 하고 위반하면 최대 1천만 대만달러(약 4억3천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되면 TSMC 같은 기업의 핵심 기술 인력의 중국 취업이 어려워질 전망인데 이런 방향이 바람직한지를 떠나 중국으로의 반도체 인력 유출 문제를 고민하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한편 '반도체 전쟁'의 직접 당사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일본과 유럽연합(EU)도 급변하는 공급망 질서 변화에 끌려가기보다는 어떻게든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해 논란 속에서도 4천억엔(약 4조1천억원)을 지원하며 TSMC의 구마모토(熊本)현 공장 프로젝트를 유치했다.
소니와 자동차 부품사 덴소가 공동 출자한 이 공장이 2024년부터 가동되면 소니는 이미지 센서 등 카메라 제품용 반도체를,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자동차용 반도체를 '입도선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U도 이달 430억 유로(약 58조9천억원) 이상의 공공·민간 투자를 동원하는 내용을 담은 'EU 반도체칩법'을 통해 현재 9% 수준인 EU 회원국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세계 각국이 이처럼 '반도체 전쟁'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반도체 업계의 판도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주요 반도체 강국인 한국은 양대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시안(西安)과 우시(無錫) 등지에 대규모 생산 시설을 두고 있고, 중국향 수출 비중 또한 높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미중 반도체 전쟁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도 최근 우리 측과 각종 접촉 때마다 노골적으로 자국과 '기술 연대' 강화를 희망한다는 뜻을 피력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신냉전 시대 외교·안보 전략과 반도체 산업 전략이 따로 놀 수 없게 된 이유다.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공장 |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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