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인원 이후 관중들이 던진 맥주캔 등을 치우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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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폭죽처럼, 맥주와 맥주캔, 음료수가 일제히 그린 쪽으로 날아들었다.
13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TPC 스코츠데일에서 벌어진 PGA 투어 WM 피닉스 오픈 3라운드에서다.
파 3인 16번 홀에서 샘 라이더가 홀인원을 하자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맥주 등을 그린 쪽으로 집어던졌다.
홀 아나운서 아만다 발리오니스는 “땅이 맥주 등 액체로 뒤덮여 있다. 다들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원 봉사자들이 약 15분간 쓰레기를 치워야 했다. 미국 골프 닷컴은 “대회 스폰서인 WM(Waste Management, 폐기물 관리 혹은 쓰레기 처리) 대회 이름과 잘 맞는 장면”이라고 했다.
피닉스 오픈은 엄숙한 마스터스와 딱 반대 컨셉트다. 마스터스는 뛰어도 안 되고, 졸아도 안 되고, 손뼉 칠 때 등을 제외하면 소리를 내도 혼난다.
핸드폰을 몰래 가지고 들어갔다 발각되면 평생 출입금지다. 맥주를 그린으로 던졌다가는 유치장 신세를 질 게 뻔하다.
피닉스 오픈은 이런 골프의 갤러리 문화를 부정한다. 딱 25년 전인 1997년 이날 이 홀에서 타이거 우즈가 홀인원을 했는데 역시 환호와 더불어 맥주캔이 날아들었다. 선수들 실수에는 야유하고, 굿샷엔 천둥 같은 박수를 보낸다.
재미교포인 제임스 한은 2013년 이 홀 그린에서 당시 유행하던 '강남 스타일' 말춤을 춰 환호를 받았다.
싸움도 난다. 저스틴 레너드는 야유하는 관중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기도 했고, 라이언 파머의 캐디는 관중과 멱살잡이도 했다.
그게 이 대회의 매력이다. 국내에서 해방구라고 불린다.
피닉스 오픈이 대단한 건 최종라운드가 미국풋볼리그(NFL) 결승인 슈퍼볼과 날짜가 겹친다는 거다.
미국에서 슈퍼볼의 인기는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이벤트가 슈퍼볼을 피한다.
그러나 피닉스 오픈은 오히려 용감하게 슈퍼볼 당일 대회를 열면서도, 무모하게 싸우지는 않고 식전 행사 비슷한 전통을 만들어냈다.
올해 NFL 일정이 변경돼 슈퍼볼이 1주일 늦춰졌다. 피닉스 오픈은 다른 대회(AT&T 프로암)와 일정을 바꿔 슈퍼볼 날짜를 따라갔다.
16번 홀을 둘러싸고 있는 스타디움.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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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 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은 NFL의 준결승 격인 NFC 챔피언십과 일정이 겹쳐 현지 시각 토요일에 경기를 마감했다. 방송중계 사정이 있긴 했지만, 피닉스 오픈과 대비가 된다.
‘잔디 위의 가장 위대한 쇼’라는 별명이 붙은 피닉스 오픈은 일주일 관중이 70만명 정도다. 특히 야구장처럼 스타디움을 만든 16번 홀에는 2만 명이 들어간다.
관중 70만 명에 입장권을 5만원으로 치면 35억원이다. 주차비와 식음료비는 이보다 더 많다. 맥주 판매를 1인당 10잔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도 있었으니, 관중들이 대회에서 얼마나 돈을 많이 쓰는지 추측할 수 있다.
다른 대회들은 피닉스 오픈을 부러워한다. 따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든 곳이 해방구가 된다면 일상적인 곳이지 해방구가 아니다.
골프는 갤러리와 선수가 매우 근접하는 스포츠다. 티잉 구역 등에서는 바로 옆까지 접근한다. 이런 곳을 해방했다간 사고가 난다.
피닉스 오픈도 코스 전체를 해방하지는 않는다. 해방구 16번 홀은 야구장 같은 스타디움이어서 관중은 티잉 구역과 멀리 떨어져 있다. 갤러리는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대신 소리 지를 자유를 얻는 것이다.
떨어져 있더라도 조용한 상태라면 한두 명의 고함이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그중 일부는 술 마시고 왁자지껄해 시끄러운 상황이라면 한두 명이 소리를 질러도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피닉스 오픈처럼 관중이 많아야 해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코스 난도도 중요하다. 피닉스 16번 홀은 쉬운 홀이다. 약 160야드에 호수 등 물도 없다. 해발 450m라 공이 멀리 날아간다. 이 홀에서 선수들은 최대 9번 아이언, 대부분 웨지를 쓴다.
PGA 투어 혼다 클래식이 2018년 해방구를 만든 적이 있다. 대회장인 PGA 내셔널은 어려운 코스인데 주최 측은 ‘베어 트랩’이라는 별명이 붙은 17번 홀을 해방했다.
홀은 190야드로 길고, 그린은 작다. 바로 앞까지 호수인데 뒤로는 내리막 벙커다. 바람도 심하다.
이 홀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선수들은 소음에 실수가 늘어나 짜증을 냈다. 선수들은 “이런 홀은 피닉스 16번 홀 한 개로 충분하다”고 했다. 혼다 클래식 해방구는 진압됐다.
KPGA가 올해 피닉스 오픈과 비슷한 대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코스에 유휴부지가 있고 입지상 관중이 많이 올 수 있는 제네시스 챔피언십, 신한동해오픈 등이 괜찮을 것 같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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