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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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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깨졌다”…‘휴전선 철통경계’의 불편한 진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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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중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육군 5사단 장병이 한파 속에서도 철책 경계시설물을 점검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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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휴전선 GOP(일반전초) 철책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경계태세’를 상징하는 존재로 기억된다.

새해가 되면 장병들이 철책을 순시하는 모습이 방송에 늘 보도됐고, 군은 ‘물샐 틈 없는 경계태세’를 강조하며 ‘강한 군대’의 모습을 과시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철책 경계는 ‘물샐 틈 있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2020년 11월 강원 고성군 육군 제22사단 GOP 철책을 넘어 탈북한 A씨가 지난 1일 같은 지역을 통해 월북했다. 1년여 동안 동일인에게 두 번이나 철책이 뚫린 것이다. 철통경계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한 기강 해이 문제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기존 경계 개념을 바꾸는 혁신과 실험이 필요하다.

◆‘철통경계’가 군대를 짓누른다

서해안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휴전선에는 육군 10여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남북 군대가 대치하던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때, 사단급 이상 부대가 원활하게 움직이면서 북한군과 싸우려면 넓은 공간과 전선이 필요하다. 휴전선 방어를 맡은 사단들이 각각 수십㎞의 경계구역을 갖게 된 이유다. 경기 김포와 강화 해안 경계를 맡은 해병대 제2사단은 255㎞, 월북 사건이 발생한 육군 22사단은 휴전선과 해안을 합쳐 100㎞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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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우리 군 철책이 보인다. 고성=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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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넓은 지역을 제한된 병력으로 완벽하게 경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방 지역 지휘관과 장병들은 불가능한 과제를 완수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병력을 경계에 투입하는 것이다. 기자가 강원 화천군 중동부전선 GOP 철책 경계 임무를 수행했던 2000년대 초 어느 날 밤에 휴전선에 비상 상황이 발생했던 적이 있다.

그때 소초장은 모든 초소와 진지에 병력을 투입, 고강도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경계병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투입되자 전방 경계와 정찰은 매우 원활하게 이뤄졌다.

대신 소초에는 돌발상황에 대처할 예비병력이 없었다. 고강도 경계태세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면서, 병사들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예정됐던 정신교육과 시설보수 등은 취소 또는 연기됐다.

이처럼 경계에 역량을 집중하면, 유사시 전투에 필요한 교육훈련이나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가 없다. 경계에 투입되는 병력을 최소화해야 전투력 유지가 가능한 셈이다.

철책 지역에 광망(철조망 센서), 감시카메라 등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갖춰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군 구조 개편과 병력 감축으로 인한 경계 공백을 첨단 장비로 대체하면서 휴전선을 24시간 감시, 경계 효과는 높이고 병력 투입은 줄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경계실패는 끊이지 않는다. 철통경계가 이뤄지려면 고성능 과학화 장비가 24시간 정상 가동하고, 장비 운용병과 경계병의 전문성이 높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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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에 있는 보존 GP 전경. 9.19 군사합의에 따라 병력이 철수하고 감시장비를 보강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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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같은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월북 사건이 발생한 22사단은 지난해 2월 ‘헤엄 귀순’, 2020년 11월 ‘월책 귀순’이 일어났던 곳이다.

‘헤엄 귀순’ 직후 군 당국이 지난해 3월 운용했던 국방통합점검단 조사에 따르면, 해당 부대의 과학화 경계시스템은 2010년 이전에 소요가 결정돼 2015~2016년 전력화됐다.

과학화 경계장비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5~7년. 조사 시점에서 노후화가 진행됐고, 기술 수준도 뒤떨어져 오경보가 과도하게 발생했다.

군은 대대적인 성능개량을 실시할 방침이다. 내년까지 해당 부대 GOP 지역의 노후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교체하고,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한 지능화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위사업청과 협업해 신속시범획득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GOP 지역의 과학화 경계 장비를 2026년까지 보강할 계획이다.

하지만 장비 운용병과 경계병의 전문성 및 동기부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과학화 경계 장비 보강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이번 월북 사건 당시 GOP 철책을 넘는 모습이 감시카메라 3대에 5회 포착됐지만, 감시병은 실시간 인지하지 못했다. 복기 과정에서도 실제 월북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대의 영상을 돌렸다. 영상 저장 장비가 녹화시간 입력 시 실제 시간과 4분 34초의 오차가 있어 매일 두차례씩 동기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관련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았다.

A씨가 오후 6시 36분쯤 철책을 넘을 당시 경고가 울려 소초장을 비롯한 6명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별다른 점을 찾지 못하고 철수했다. 사건 직후 확인 결과 북쪽 철책을 넘어간 자리에 쌓인 눈에서 발자국이, 윤형철조망에서는 패딩 충전재(깃털)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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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국무총리가 지난달 29일 경기도 양주 25사단을 방문해 철책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양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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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화 경계시스템과 장비 운용병 및 경계병 능력 강화는 단기간에 이뤄지기 힘들다. 경계 지역은 넓은데 경계 역량 강화가 단기간 내 이뤄지지 않는다면, 전방 지역 지휘관들의 부담은 한층 커진다. 경계가 뚫려 사회적 파장이 확산하면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을 더한다.

이는 지휘관들이 자신의 역량을 경계에만 쏟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군인에게 경계는 중요한 임무다. 하지만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은 경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투에서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지휘관들이 경계에만 몰두한다면 휴전선에 인접한 부대 중 상당수는 ‘전투형 군대’가 아닌, ‘경비형 군대’가 될 수밖에 없다. 파괴적 혁신을 통해 군을 전투준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경계의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혁신의 출발점은 “개미 한 마리 못지나가게 막는다”는 철통경계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휴전선 경계 실태를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일종의 외연 확장이다. 국민의 공감은 혁신을 순조롭게 해주는 지렛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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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해병대 장병들이 해안 순찰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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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새로운 개념의 경계작전을 구상해야 한다. 철책 경계와 저지를 중시하는 ‘손에 손잡고’식 방어개념은 6.25 전쟁 당시의 것이다. 병력과 군 조직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같은 인력 집약형 전략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대안으로 거론된 것이 지역방어다. 철책 이남의 일정 지점을 경계선으로 정하고, 철책과 저지선 사이의 공간에서 침투 저지 작전을 하자는 것이다.

지역방어는 유사시 신속하기 옮겨 다니며 전투를 치르는 기동력 강화가 필수다. 최전방 부대의 경계력과 기동성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길이 좁고 험한 중동부전선에서도 이같은 지역방어가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반박도 있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개념을 적용한 경계작전을 다양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등 분쟁지역에서의 경계작전 사례 등을 반영, 새로운 경계 개념과 작전을 구상한 뒤 특정 지역에서 실험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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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한 해병대 장병이 해안을 살피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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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 발견되는 문제점은 개선하면서 새로운 경계 개념과 작전을 만들어내면, 3월 대선 직후 집권할 차기 정부에서는 군 경계실패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국방개혁 과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제이슨 바틀릿 미국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NAS) 연구원은 4일(현지시간) 아시아 지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 기고에서 “이번 사태를 보면 한국군이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한 가지 문제만큼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이런 말이 또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철저한 자성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군 당국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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