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4년 총액 8천만 달러의 연봉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 팀으로 간 류현진의 호랑이 담배 적 얘기다. 홈경기가 끝난 뒤 구장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마저 보고 나서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가볍게 1승을 추가한 날이었다. ‘어서 가서 쉬지 않고 어딜 가는데 그렇게 급하게 가니?’, ‘형들이 아이스크림 사 오래요’하며 룰루랄라 뛰어가는 게 영락없는 철부지 소년이었다.”
이 글은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구단 사장을 역임했던 이경재(74) 학교법인 북일학원 이사장의 회고담이다.
최근 『시간 길어 올리기-그 설핏한 기억들을 위하여』(샘터 발행)라는 산문집을 펴낸 이경재 이사장의 책 가운데 그가 ‘프로야구 춘추기’에 풀어놓은 류현진의 옛이야기 한 토막이다. 이경재 이사장은 “이미 최고 스타였던 류현진이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군말 없이 하는 비슷한 장면을 그 후 경기장, 숙소 주변에서 여러 차례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와 더불어 2005년 8월에 열렸던 2006년 신인 2차 지명회의를 통해 류현진을 지명하게 된 경위-영업비밀은 생략했지만-를 풀어놓기도 했다.
‘프로야구 춘추기’에는 류현진 말고도 박찬호를 고향 팀에 데려오게 된 뒷얘기, 이젠 옛사람이 된 최동원과 조성민이 한화 구단과 인연을 맺게 된 일화도 털어놓았다.
『시간 길어 올리기』는 이경재 이사장의 다양, 다방면의 오랜 경험(특히 여행을 통한)이 무르녹아 있는 흥미로운 산문집이다. ‘그 설핏한 기억들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추억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박제돼 있던 기억에 숨결을 불어넣은 솜씨가 범상치 않다. 사유의 시공간이 방대하고 폭넓은 관심과 세밀한 관찰,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 촘촘하거나 때로는 성글게 엮어낸 삶의 에스프리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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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 이사장은 오랜 세월 한화 그룹에 몸담았다. 대한일보,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75년 한화그룹에 입사, 한화그룹 홍보실장, (주)한컴 대표이사, (주)한화 이글스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학교법인 북일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강제 폐간당했던 대한일보의 폐간사를 썼던 그는 그 후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거쳐 한화 그룹으로 이적, 주로 홍보 분야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대한복싱 연맹 회장을 맡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복싱 사상 최고의 성과를 일궈냈을 당시 복싱연맹 홍보이사로 손발을 맞추었다.
복싱연맹 임원으로 체험했던 그 자취가 이번 『시간 길어 올리기』에서 재미난 얘기로 재구성, 되살아나 있다.
옛 동독의 간판 복서였던 헨리 마스케의 은퇴와 연결, 이탈리아의 가요 ‘Time to say goodbye’(원제는 Con te partiro`, 당신과 함께 떠나리)가 태어난 유래와 소련의 복싱 선수나 임원들이 국제 대회에 나와서 용돈을 만들기 위해 ‘캐비아’를 파는 것을 직접 경험한 얘기를 그려놓은 ‘캐비아 연정’ 같은 스포츠 비화는, 그 시대의 흐름과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일화들이다.
스포츠에 국한된 글만을 언급했으나, 『시간 길어 올리기』에는 체육은 물론 문학이나 영화와 음악, 역사를 넘나드는 시공간을 초월한 아기자기한 세계를 거침없이 펼쳐 보인다. ‘문학을 사랑한 언론인 출신의 전문 경영인’이라는 수식이 전혀 놀랍지 않다.
『시간 길어 올리기』는 사실 두서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끄집어내 읽어도 흥미로운 이야기와 맞닥뜨린다. 사적인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그의 다양한 관심의 심연 속으로 읽는 이를 이끌어 들이는 마력이 있다.
‘문청(文靑)’ 시절 소설가를 꿈꾸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여전히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저자는 “부대껴온 세사(世事)들은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피는 봄꽃처럼 아름답다”면서 “지금 절망뿐인 시간 속에 계신 분들은 무슨 허튼소리냐고 핀잔주시겠지만 ‘절망’도 흘러간다”고 보듬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미물이다. 그 미물이 가진 자와 못 가진, 배운 사람과 못 배운, 동쪽과 서쪽, 피부색, 76억 마리 호모 사피엔스들의 그 완연한 다름 들을 단번에 없앴다. 인류가 오래 염원했으되 이룰 수 없었던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평등은 혼란이었다.(…) 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것 때문에 가뜩이나 생각들이 더 많아졌었는데,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더 진솔한 묵상을 하며 낮게 더 낮게 낮아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거나,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는 고요하다. 들어 보려 해도 놓치기 쉽다. 고요한 소리는 고요한 가운데서만 들린다. 맑은소리가 나는 찬물 따르는 소리도, 더운물 따를 때 나는 뭉근한 소리도 세월이 지나면 가릴 줄 알게 된다. 젊어서는 안 들리던 그 소리 들이 나이테가 커져야 비로소 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기쁨과 노여움, 즐거움과 슬픔마저 제풀에 바스라지고, 벼린 상처도 세월과 바람에 부대껴 두루뭉술해질 때가 돼야 사람들은 넉넉하게 품을 벌리며 살아온 소리를 들을 줄 안다.” 따위의 글귀들은, 그의 사유의 깊이와 성찰의 지혜를 읽게 한다.
현장감이 살아 있는 한 호흡의 문장, 기자 출신다운 성실한 취재와 메모를 바탕으로 촘촘하게 엮은 문장이 초대하는 그 시절, 그 시간 그 장소로 기꺼이 가 보면 좋겠다. 그의 얘기는 인간관계, 사람 사는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글/ 홍윤표 OSEN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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