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국내 단색화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권 디렉터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윤형근의 굉장한 팬을 자처하며 “작품을 보러 이탈리아에도 직접 다녀왔다”고 말했다. 앞서 같은 해 5월 베니스의 팔라초포르투니(Palazzo Fortuny)에서 열린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얘기였다.
이날 권 디렉터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청년은 바로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알엠(RM)이었다. RM의 미술 사랑은 이제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특히 윤형근의 팬으로 유명한 그는 이달 초에도 미 텍사스의 미술관을 찾아 윤 화백 특별전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직접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상당한 식견을 자랑하기도 해 화제가 됐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알엠(RM)이 지난 8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 미국 텍사스의 미술관을 찾아 고(故) 윤형근 화백의 작품을 감상했다. /RM 인스타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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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으로 대변되는 2030세대 컬렉터의 증가와 입지 강화는 올해 미술 시장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다. 젊은 컬렉터들은 갤러리스트나 아트 딜러의 조언을 듣고 미술 작품을 고르는 기성 컬렉터들과 달리 스스로 정보를 얻고 공부해 미술 시장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려는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도 2030세대의 중요한 특징이다.
권 디렉터는 이러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세대) 컬렉터들의 부상을 가장 가까이서 체감하고 있는 업계 전문가다. 아트앤포트(artnport)라는 이름을 내걸고 젊은 컬렉터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그는 ‘아트 딜러’보다 ‘아트 어드바이저’로 불리기를 선호한다. 단순히 미술품 매매를 중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컬렉터들에게 미술에 대해 교육하고 컬렉션을 어떻게 구성할 지 조언하는 등 종합적인 도움을 주길 지향한다.
이달 초 서울 장충동에서 권 디렉터를 만나 최근 미술 시장의 변화와 특징에 대해 물었다. 권 디렉터는 특히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 홍콩과 중국 베이징 및 미국의 갤러리들을 오가며 각계 각층의 VIP 컬렉터들을 응대해온 만큼, 글로벌 미술 시장의 동향과 ‘큰손’들의 컬렉팅 문화에 관한 생생한 얘기를 들려줬다.
윤형근의 '청다색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윤형근은 캔버스 위에 넓은 붓으로 암갈색이나 청색 물감을 내리긋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그의 작업이 1950년대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나 모리스 루이스를 연상케 하는 동시에 수묵의 번짐과도 가깝다고 봤다.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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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네이버 카페 같은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 공유를 즐긴다. 자신의 컬렉션을 당당하게 공개하는 것도 MZ세대의 특징이다.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취향을 서로 공유하려는 성향이 큰 것 같다. 기성 세대 컬렉터들이 대체로 갤러리스트의 안내와 추천을 받아 작품을 구매했다면, MZ세대는 강의를 듣거나 스터디를 꾸려 스스로 공부해 미술품을 산다. 또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아트페어가 온라인으로 개최됐는데, MZ세대가 이런 문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했다. 그 영향으로 오프라인 아트페어나 옥션에서도 온라인을 통한 거래가 크게 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젊은 컬렉터들의 부상에는 20대 인플루언서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RM이 윤형근의 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윤 작가의 전시를 찾는 20대 관람객이 급증했다. 작품은 워낙 고가라 사기 어렵지만 도록이라도 구매하겠다는 수요가 많았다. 빅뱅 멤버 지드래곤 역시 미국 화가 리차드 프린스의 간호사 그림 등 미술 컬렉션을 보유한 것으로 알고 있다. 팝스타 저스틴 비버도 유명한 미술 컬렉터다. 가수 뿐 아니라 IT 사업이나 패션 사업, 암호화폐 투자를 통해 큰 돈을 번 이른바 ‘영앤리치’들도 MZ세대의 컬렉팅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의 플렉스(FLEX·돈 자랑을 한다는 뜻의 신조어)는 감가상각되지 않으며 미적 취향으로 또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플렉스다.”
중국 예술가 자오자오(Zhao Zhao)가 루이비통과 협업해 만든 카퓌신(Capucines)백 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루이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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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원이나 문형태, 김선우 같은 젊은 블루칩 작가들을 일찍 알아보고 그들의 작품을 사는 젊은 컬렉터들이 많다. 최근 뜨고 있는 젊은 작가들 중에는 상업 브랜드와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스타성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키와 협업한 미국작가 카우스, 루이비통과 협업한 중국 작가 자오자오가 대표적인 예다. 자오자오는 중국 베이징의 오염된 하늘을 그리거나 유리에 총을 쏴서 오브제를 만들어내는데, 거장 아이웨이웨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국내 작가 샘바이펜 역시 MCM 같은 패션 브랜드들과 다양하게 협업하고 있다.”
단색화는 여전히 인기가 많은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극사실주의 회화를 포함한 구상화가 인기 있었다면, 이후 컬렉터들의 관심히 서서히 단색화로 옮겨졌다. 지금도 해외 미술 시장에서 일하다 보면 여전히 다들 약속이라도 한듯 같은 이름을 언급한다. 이우환이나 김환기,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하종현 같은 단색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찾는다.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 76-2-95-03(천사들)'. 대표적인 국내 아방가르드(전위) 예술가인 이건용은 캔버스를 등지거나 옆에 놓고 팔을 뻗어 신체의 궤적을 화면 위에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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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전세계 미술 시장이 ‘불장(Bull Market·가격이 계속 오르는 강세장)’이다. 해외 미술 시장의 분위기가 실제로 어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술 작품을 판매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면 이제는 작품을 확보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미술품을 선뜻 사겠다는 컬렉터가 나타나도, 판매는 고사하고 작품을 보여주는 일조차 까다롭고 엄격하게 이뤄진다. 해당 컬렉터가 과거에 어떤 작품들을 샀는지, 또 그 사람의 사회적 이미지는 어떤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작품을 보여준다.
당시 양해를 구하고 집안의 컬렉션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우리나라 사업가 한 분이 사진 속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을 마음에 들어 했다. 비슷한 작품 한 점을 구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결국 수소문을 한 끝에 뉴욕의 갤러리에서 비슷한 조각 한 점을 찾아냈지만 해당 갤러리에서 작품 실물을 보여주길 꺼리더라. 의뢰인이 누구인지 묻더니, 최소한 조지 콘도(최근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미국 화가)의 작품 한 점 정도는 갖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야 실물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미술시장은 수요가 많고 공급은 제한돼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컬렉터가 어떤 사람이며 사회적 이미지가 어떤지도 중요해졌다. 작품을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가 해당 작가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컬렉터가 갤러리와 신뢰를 쌓고 교류하는 것도 중요하다. 갤러리스트나 아트 어드바이저들은 단순히 작품을 대신 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갤러리 및 옥션과 소통하며 최적의 작품을 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국 테이트리버풀 미술관에 전시된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 '마망(Maman)'. 대형 조각은 서울 한남동의 삼성미술관 리움에도 전시돼있다. /테이트리버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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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나 옥션과 친분을 쌓으면 미술 작품을 살 때 실질적으로 어떤 이점을 얻을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아트페어의 경우 대중들을 상대로 한 퍼블릭오프닝이 있고, 그 전에 VIP 컬렉터들을 위한 VIP오프닝이 마련된다. 그런데 VIP오프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VIP오프닝 전날 소수의 컬렉터만 참석할 수 있는 VVIP오프닝이 따로 있다. 갤러리 및 아트 어드바이저들과 오랫 동안 좋은 신뢰 관계를 쌓은 컬렉터는 VVIP오프닝에 미리 참석해 작품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처럼 주최측의 초대를 받아야만 미리 참석할 수 있는 전시를 베르니사주(vernissage)라고도 한다.
갤러리에도 프라이빗 뷰잉 룸(private viewing rooms)이라는 이름의 VIP 전용 판매 공간이 있다. 고객이 판매를 위탁한 작품들을 갤러리의 단골이나 좋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곳이다. 미술 작품은 너무 많이 노출되면 가치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커, 공개적으로 판매하는 대신 이렇게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파는 경우가 많다. 노출도가 낮은 미술품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컬렉터들은 요즘 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야요이 쿠사마의 ‘호박’ 중에서도 경매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작품만 찾기도 한다.”
VIP 컬렉터들과 교류하며 겪은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면.
“파크뷰아트 갤러리 베이징 지사에 파견 근무를 할 당시, 파라다이스시티의 VIP 도슨트로 스카웃돼 VIP 컬렉터들을 상대로 야요이 쿠사마, 데미안 허스트, 우고론디노네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만난 국내외 VIP들은 컬렉팅을 많이 해온 만큼 스스로 미술 작품을 보는 안목도 뛰어나더라.
홍콩 갤러리에 근무할 때 만났던 이탈리아인 컬렉터 부부도 기억에 남는다. 경매장에서 만나 알게 됐는데, 처음부터 딜러와 고객으로 지내지 않고 친구로서 편하게 교류했다. 그들이 리조트에서 연 파티에 놀러가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준 파스타를 맛보며 친한 친구로 지내다 자연스럽게 고객으로 발전했다. 경매장이나 미술 관련 행사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컬렉터들 가운데는 이처럼 좋은 친구이자 고객이 된 사람이 많다.”
권정은 아트앤포트(artnport) 아트디렉터. /권정은 디렉터 제공 |
현재 한국 미술 시장의 국제적 위상은 어떤가.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지는 오랜 기간 홍콩이었지만, 최근에는 서울로 옮겨오는 분위기다. 우산 혁명에 이어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악재가 잇달아 발생하며 홍콩 미술 시장이 많이 닫혔다. 아트바젤과 함께 세계 양대 아트페어로 간주되는 ‘프리즈(Frieze)’가 내년 서울에서 개최된다. 세계적인 갤러리 타데우스로팍은 최근 아시아 지점을 서울에 개관했다(기존 지점은 런던, 파리, 잘츠부르크에 있다). 독일 갤러리 쾨닉 역시 도쿄 지점을 서울로 옮겼고, 페이스갤러리도 올해 서울 한남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수준 높은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있어, 양질의 미술품을 감상하기 위해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좋은 미술품을 사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나는 보통 오리지널리티(원작으로서의 독창성과 신선함), 희소성, 작품성 세 가지를 고려하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이우환 작가의 경우, 누구나 이우환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오리지널리티가 강하다. 또 작가가 고령인 만큼 작업량도 점점 줄고 있어 희소성이 있다. 작품성 역시 세계 미술 시장에서 인정 받았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전시한 적이 있으며 뉴욕현대미술관(MoMA)에도 작품이 소장돼있다.
연 수입의 5~10%를 미술품 구매에 할당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좋아하는 작가의 행보에 주목하며 갤러리스트나 아트 어드바이저의 조언을 얻어 컬렉팅하길 추천한다. 개인 컬렉터 뿐 아니라 기업체도 아트 어드바이저를 고용하는 것이 보편화한 시대다(권 디렉터 역시 금강엔터프라이즈의 아트 어드바이저로 활동 중이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는 동시에, 미술관과 아트페어 및 갤러리를 두루 방문해 시장 동향을 살피며 자신만의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수요가 많고 가격이 치솟고 있다 해서 한정판 제품을 경쟁적으로 사듯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노자운 기자(jw@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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