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사단장 재직 중일 때의 고인 |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지역 향토방위사단장으로서 강경 진압을 거부한 정웅(鄭雄) 전 의원이 23일 오전 10시께 서울 자택에서 잠을 자던중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93세. 유족은 "어제까지 식사도 잘하셨고, 평안하게 운명하셨다"고 말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육군 호국군사관학교(육군보병학교로 통폐합)를 1기로 졸업한 뒤 6·25 전쟁 때 육군 소위로 소집된 것을 계기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전쟁 중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뒤 대대장, 연대장을 거쳐 1980년 1월 소장 진급과 함께 광주 제31향토사단장으로 부임했다. 5·18 민주화운동 초기 강경 유혈 진압 지시를 거부했다가 사단장직에서 해임된 뒤 예편까지 당했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외부 강압으로 중도 사퇴했고, 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부의장을 거쳐 1988년 광주 북구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해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득표율은 91.45%였다. 같은 해 평민당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장을 맡았다. 독실한 기독교도로 최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자랑스러운 성결인상'을 받기도 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까지 회고록을 집필했다. 회고록 머리말에는 "(죽고 다친 광주시민과 국민뿐 아니라) 전두환 등 정치 군인들에게 이용당한 대한민국 국군도 피해자"라며 "나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국민들에게 총을 쏠 수 없었다. 삼엄한 계엄 하에서 나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선택하였다"고 적었다.
또 1980년 5월19일 낮에 광주 지역 기관장들로부터 "이러다가는 광주시민들 다 죽이겠다"는 말을 들은 뒤 사단 작전참모를 불러 "지금 이 시간부터 상부의 강경진압명령을 무혈진압명령으로 전환하여 작전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진압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고, 작전참모가 "구두 명령으로 하달하시겠습니까? 문서 명령으로 하달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문서 명령으로 하달한다"고 답변했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부인 전성원(전 한기총 여성위원장)씨와 사이에 2남(정대균<경희대 유전생명공학과 교수>·정성균<신한대 치위생학과 교수>) 등이 있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고인(1988.12.21) |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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