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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전두환 사망] 남북관계 부침…아웅산테러·KAL기 폭파·北 수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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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첫 남북 물자교류·이산상봉도

아웅산테러로 시작해 KAL기 폭파로 마무리

헤럴드경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1983년 10월 12일 전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씨가 아웅산 테러 순직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학병원 합동영헌 안치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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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전두환 정권 시기 남북관계는 극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사건 등으로 위기로 치닫는가하면 북한의 남측 수해지원으로 반전을 맞기도 했다.

1983년 10월 미얀마를 방문한 전 전 대통령 암살을 노린 초유의 아웅산 테러는 한반도정세를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훗날 북한군 정찰총국의 소행으로 밝혀진 아웅산 테러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미얀마 방문 공식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 전 대통령은 아웅산 국립묘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테러를 피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모든 남북대화를 단절했다.

좀처럼 회복되기 어려워보이던 남북관계는 이듬해 급반전을 맞았다.

1984년 늦여름 남측의 서울과 경기, 충청 일원에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대남 인도적 지원 뜻을 밝힌 게 계기가 됐다.

당시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남측 대홍수 피해 복구 지원을 위해 쌀 5만석(7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아웅산 테러의 아픔이 채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선전용 활용 등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고심 끝에 북한의 제의를 수락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기류 조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수해 지원 물품은 판문점과 인천·동해안을 통해 전달됐고, 이에 남측은 카세트 라디오와 손목시계, 양복지, 담요 등을 북한 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6·25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간 물자 교류 재개였다.

이를 계기로 1985년 12년만에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담이 재개됐고, 분단 이후 첫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로까지 이어졌다.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산가족찾기 운동도 전두환 정권 때의 일이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453시간 45분 동안 KBS가 생방송으로 방영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은 총 10만 952건의 접수가 이뤄져 500여 가족이 혈육을 찾았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말기 남북관계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은 남측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남짓 앞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해 서울로 향할 계획이었던 대한항공(KAL) 858기를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했다.

중동에서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 근로자와 승무원 등 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88 서울올림픽 방해 책동의 일환으로 결론내렸다.

이 사건으로 한미 안보태세는 한층 강화됐으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테러국가로 낙인 찍혀 지금의 외교적 고립의 출발점이 됐다.

전 전 대통령은 통일정책으로는 1982년 1월 22일 제시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내세웠다.

민족통일협의회의 구성, 남북 국민투표에 의한 통일헌법, 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 및 통일국회와 정부 구성 등을 내용으로 한다.

다만 남북 최고책임자 회담에 무게를 싣는 등 권위주의적이고 구조상 모순되는 부분이 존재하는 등 진정성 있는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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